• 시뮬라크르란 무엇인가?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고, 가상이 실재(實在)보다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의 시대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컴퓨터가 프로그래밍한 가상현실을 진짜 현실로 믿고 살고 있는 현대인

  • 보드리야르 ⓒ 뉴데일리
    ▲ 보드리야르 ⓒ 뉴데일리

    에 대한 은유다. 이처럼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시뮬라크르(simulacres)의 사회라고 명명했다.  1981년에 나온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였다. 워쇼스키 형제는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 ‘매트릭스’(1999년)를 만들었다. 영화에는 주인공 네오가 이 책 안에 불법 프로그램 파일을 숨겨 갖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한 대학원생은 기말 리포트에서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시뮬라크르로 변환되고 있다”라고 썼고, 한 중학생은 “섹시함의 상징인 전지현이 시뮬라크르인가요?”라고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묻고 있으며, 한 젊은 저술가는 “시뮬라크르와 숭고가 현대 미학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이 낯선 용어, 시뮬라크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라틴어 시뮬라크럼(simulacrum, 복수는 simulacra)의 프랑스식 표기이다. 라틴어-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simulacrum은 image, likeness, portrait, effigy, shade, ghost, imitation, phantom, appearance 등의 뜻이다. 그러니까 시뮬라크르의 원래 의미는 이미지, 비슷함, 초상, 동전에 주조(鑄造)된 초상, 그림자, 유령, 흉내, 환영(幻影), 가상(假象) 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 이후 현대 철학에서 시뮬라크르는 ‘원본 없는 복제’, 또는 ‘복제의 복제’ 등의 의미가 되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플라톤의 동굴의 신화

    시뮬라크르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플라톤 주의는 가지적(可知的) 차원과 감각적(sensible) 차원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가지적’(可知的)(intelligible)이란 오로지 지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고, 감각적(sensible)이란 우리의 감각으로만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데아의 세계라고도 하는 가지적 차원은 본질의 차원이고 변화하지 않는 차원이며, 감각적 차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경험적이고 현상적(現象的)

  • 플라톤의 동굴(platos-cave) ⓒ 뉴데일리
    ▲ 플라톤의 동굴(platos-cave) ⓒ 뉴데일리

    인 세계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경험적 세계는 겉 껍데기의 외관만 있는 가상(假象)(appearance)의 세계이다. 가시적이고 감각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엄연한 실재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가지적 차원인 이데아(理念) 세계의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짜 실재(實在)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의 영원한 세계인데 반해 그것의 그림자인 현상계(現象界)는 언젠가는 스러져 없어져 버리는 불완전하고 낮은 단계의 감각적인 세계이다. 
         
    한갓 가상 혹은 현상에 불과한 경험적 세계는 그것의 실체인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내 앞의 책상은 저 멀리 이데아의 하늘에 있는 책상의 이데아를 흉내낸 그림자이다.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진짜 책상이고,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그 진짜 형상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감각적인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든다. 어릴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채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죄수들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들은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 멀리 뒤쪽에서는 불빛이 타오르고 있다. 이 불빛과 죄수들 사이에 길이 하나 나 있고, 이 길을 따라 담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담 위로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든 인물상 및 동물상들을 쳐들고 지나간다. 

    죄수들은 불빛에 의해 맞은 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이외에는 자기들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도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이 벽면에서 보는 것들을 실물(실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들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 이상한 죄수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플라톤은 말한다.   

    두 종류의 가상(假象)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감각적 대상은 이데아의 세계 속에 그 일치하는 형상(形相)이 있다. 형상(form)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에이도스(eidos)는 플라톤에서는 이데아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데아의 세계는 형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의 지각으로 파악하는 세계가 아니라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이므로 가지적(可知的) 세계(the intelligible)이고, 또 이 세계야말로 그림자가 아닌 실제의 세계이므로 실재(實在)(the real) 라고도 한다.  

  • 매트릭스의 한장면 ⓒ 뉴데일리
    ▲ 매트릭스의 한장면 ⓒ 뉴데일리

한 편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감각적인 세계(the sensible)는 가시적(the visible)인 세계이며, 가상(假象)(appearance) 혹은 현상적(現象的)인 세계(phenomenon)이다. 이 가상의 세계가 그리스어로 에이돌론(eidolon)인데, 이것은 ‘그림자’라는 의미이다. 영어의 image (이미지), shadow (그림자), copy (복사)라는 단어들이 이 에이돌론에서 파생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그림자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림자의 세계인 가상에도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형상(이데아) 자체는 아니지만 형상을 모방하여 형상과 비슷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가상인데, 그것이 바로 eicon이다. 이 eicon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아이콘(icon)과 복제(copy)라는 말이 파생했다. 

또 하나의 가상은 형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환타스마타(phatasmata)이다. 요즘의 환타지(fantasy)의 어원이며, 바로 시뮬라크르와 동의어이다. 아이콘은 형상을 모방하므로 원본이 있지만, 판타스마타는 형상을 거부하므로 아예 원본이 없다. 여기서 복제와 시뮬라크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복제는 원본이 있고, 시뮬라크르는 원본이 없다.

다시 정리해 보면 플라톤의 사상은 이데아와 이미지의 이원론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다시 두 개의 차원으로 나뉘어 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로 구분된다. 이데아는 절대적 선(善)의 세계이므로 이데아와 닮을수록 좋은 것이다. 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의 차이점은 ‘닮음’의 여부이다. 이데아와 닮은 것은 좋은 이미지이고, 이데아와 닮지 않은 것은 나쁜 이미지이다. 우리가 유의할 것은 그 좋은 이미지가 도상(圖像)(icon) 혹은 복제(copy)라는 이름을 가졌고, 나쁜 이미지는 환영(幻影)(phantasm) 혹은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 홀바인의 '죽음의 시뮬라크르' 연작중 (왼쪽부터) 귀족, 노파, 부자, 판사 ⓒ 뉴데일리
    ▲ 홀바인의 '죽음의 시뮬라크르' 연작중 (왼쪽부터) 귀족, 노파, 부자, 판사 ⓒ 뉴데일리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 하나 더

    시뮬라크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의 예술관을 한 번 살펴보자. 플라톤은 시(詩)나 그림 같은 예술 활동을 ‘모방’ 행위로 규정한다. 

    여기 침대와 식탁이 있다. 관념의 하늘에도 두 개의 이데아가 있다.  하나는 침대의 이데아이고 다른 하나는 식탁의 이데아이다. 침대와 식탁을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다양한 모양의 서로 다른 침대와 식탁을 만들뿐, 그 어떤 장인도 침대의 이데아, 식탁의 이데아 자체를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침대 장인은 ‘참으로 침대’라 할 수 있는 침대의 형상(形相)을 만든 것이 아니라 많은 침대 중의 하나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침대의 실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실재와 유사하되 실재는 아닌 그런 침대를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모방자(mimetes)이다. 따라서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을 실재(實在)라고 보았을 때, 이들이 만든 침대와 식탁은 실재에서 한 단계 내려온 두번째 단계의 실재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장인이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린 화가를 생각해 보자. 캔버스에 그려 넣은 행위도 어떤 식으로는 침대의 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진짜로 제작하지 않고, 다만 침대의 장인이 만든 침대를 그림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방을 또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만든 침대는 침대라는 실재를 기준으로 보면 세번째 단계의 실재이다. 

    더군다나 장인이 만든 침대도 ‘있는’ 그대로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를 모방했다. 우리의 시각은 하나의 침대를 동시에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앞에 서 있으면 그 뒷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시각의 한계이다. 그러나 옆쪽에서 보건 마주 보건 또는 어디서 보건간에 사물의 원래 모습은 하나이다. 다만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 화가는 그 침대를 ‘보이는’ 그대로 모방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이는 현상’(phantasma)의 모방일 뿐 진리(aletheia)의 모방은 아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재현적 예술을 경멸했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것이 서구 예술의 유구한 전통인 재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세번 째 단계의 이미지가 바로 시뮬라크르라는 점이다. 

  • 하이퍼 리얼리티(second life)  ⓒ 뉴데일리
    ▲ 하이퍼 리얼리티(second life)  ⓒ 뉴데일리


    원본의 은유로서의 이데아

    현실의 사물들이 이데아의 하늘에 똑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원본(original)과 복제(copy)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대적 상황에 플라톤의 사상을 적용해 보면 이데아와 가상의 관계는 실재(實在)(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와 이미지의 관계, 또 혹은 원본과 복제의 관계이다. 

    이미지란 어떤 실물을 그려놓은 그림이거나 아니면 머리 속에서 그 실물을 떠올리는 상(像)이다. 이미지란 언제나 어떤 실재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플라톤이 두 가지 가상 중 첫번째 것으로 지목한 도상-복제(아이콘-카피)이다. 

    그러나 어떤 실재를 모방하지 않고 완전히 환영(幻影)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상을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아무런 형상도 모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두 번째 가상, 즉 환타스마타(phantasmata)이다. 예컨대 현실에는 없는 괴물의 그림 같은 것이다. 

    형상을 모방하지 않는 가상 중에는 반드시 환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은 모방하지 않으면서, 다만 다른 가상을 또 모방하는 가상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시뮬라크르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마릴린 몬로라는 배우가 있었다. 실제로 존재했던 실재이다. 그 실재를 찍은 사진은 실재는 아니지만 마릴린 몬로라는 실재를 모방한, 그 실재를 닮으려고 하는 복제(copy)이다. 그런데 앤디 워홀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이 화가는 마릴린 몬로의 사진 한 장을 무수하게 여러장 다른 색깔로 복제했다. 그것은 실재를 복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복제를 또 복제한 것이다. 복제의 복제이다. 우리 말로 ‘복제의 복제’이지 영어로는 simulated copy이다. 첫번째 단계의 것은 copy이고 두번째 단계의 것은 simulacre인 것이다.

  • 원본과 복제의 관계: 앤디 워홀의 마릴린 몬로 ⓒ 뉴데일리
    ▲ 원본과 복제의 관계: 앤디 워홀의 마릴린 몬로 ⓒ 뉴데일리

    실재를 결정하는 시뮬라크르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 하는 것인데, 시뮬라크르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 하기이다. 실재를 참조대상으로 삼지 않으면서 마치 뒤에 실재가 있는 척 하는 것이다. 전자는 있음의 계열이고 후자는 없음의 계열이다. ‘감추기’는 실재의 원칙을 손상하지 않지만 시뮬라시옹은 참과 거짓, 실재와 상상 사이의 다름 자체를 위협한다. 참과 거짓, 실재와 상상의 차이가 더 이상 무의미해진 것이다. 

    ‘시뮬라크르 하기’라는 뜻의 시뮬라시옹(simulation, 영어로는 시뮬레이션)은 재현과는 정반대이다. 재현은 기호와 실재의 등가의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실재가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가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이때 실재와 기호는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등가 원칙을 무시하고, 기호의 지시기능을 사형집행의 기능으로 전환한다. 이미지에는 실재를 죽이는 기능이 있다. ‘욘사마’라는 이미지는 ‘배용준’이라는 실재를 죽여 없앤다. 이건 모든 배우의 문제이다. 이미지가 실재를 완전히 뒤덮어 실제의 인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시뮬레이션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니 모의 실험이니 군대의 훈련 같은 것들이다. 행사의 리허설도 시뮬레이션이다. 중요한 행사는 완벽하게 프로그람이 짜여져 있고, 그에 따라 미리 행사를 한 번 치러 본다. 그리고 실제 행사날 리허설과 똑같이 다시 본 행사를 치른다. 준비하는 요원들은 리허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온 힘을 다 기울인다. 리허설을 완벽하게 하면 본 행사는 그 리허설을 그저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본 행사가 실재이고 리허설은 그것의 이미지에 불과한데, 주객이 전도되어 이미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실재인 본 행사는 이미지인 리허설의 부속물로 떨어졌다. 

    선거에서의 여론 조사도 마찬가지다. 여론조사가 유권자의 성향을 미리 다 정하고 나면, 본 선거에서 유권자는 그 시뮬레이션을 충실하게 따라 투표한다. 여론조사는 모의(模擬)의 선거에 불과하지만 선거의 부속적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선거에 선행하고 선거를 결정한다. 

    시뮬레이션은 현실을 모의로 해 보는 가상이다. 그런데 시뮬레이션이 실재보다 먼저 실행되고, 따라서 실재를 미리 결정한다. 그러므로 실재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상이다. 가상이 현실을 지배하고 결정한다. 효율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은 시뮬라시옹이지 결코 실재가 아니다.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지도는 지리적 영토에 선행하고, 전쟁의 이미지는 진짜 전쟁에 선행한다.                                                                                   

    시뮬라크르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 보르헤스(왼쪽)의 한 문단 짜리 짧은 소설 ⓒ 뉴데일리
    ▲ 보르헤스(왼쪽)의 한 문단 짜리 짧은 소설 ⓒ 뉴데일리

    근대 이전에 이미지는 현실의 반영이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이미지는 현실을 감추고 변질시켰다. 곧 이어 이미지는 아예 현실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원본의 시대에서 위조의 시대로, 다음에 기술복제 시대, 그리고 제3 세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 복제는 원본을 대신한다. 본 행사가 원본이라면 리허설은 복제인데, 그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여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된 시대이다. 한 사람의 배우, 한 사람의 정치인의 이미지는 실제 인물이라는 원본을 복사한 복제에 불과한데. 지금은 아예 그 복제만이 중요하고, 원본같은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현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사라져 버렸다.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현실, 그것이 바로 하이퍼리얼리티(極寫實, hyper-reality)이다.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TV의 리얼리티 쇼야 말로 하이퍼리얼리티의 전형이다. 참조대상이 없고 자기 충족적인 이 하이퍼 리얼리티에서 현실은 기호에 의해 지워지고 대체된다. 현실과 이미지 중에서 어느것이 다른 것의 반사인지도 모호하게 되었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한 문단 짜리 짧은 소설 <과학의 정밀성에 대하여>(On Exactitude in Science)는 그런점에서 흥미롭다. 대제국이 지도를 제작했는데, 너무나 상세해서 실제 제국과 같은 크기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지도 위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미지가 한없이 커져서 현실을 뒤덮고 있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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