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은 민주화 1세대  
      이승만은 민주화 1세대, 박정희는 민주화 2세대, 노태우는 민주화 3세대이다.
    최성재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살풀이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의 문화유산만 임시 창고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도 박물관의 폐물 창고로 들어갔다. 그 이전의 정부는 무능과 혼란의 장면 정부 외에는 모조리 독재 정부로 매도되었다.

    방송만 아니라 신문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한국의 역대 정부에 대해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그 때는 상극인 조선과 한겨레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이승만의 친일독재와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대해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내렸다. 방송사의 스튜디오와 신문사의 데스크만이 아니었다. 대학의 캠퍼스도, 도회지의 다방도, 농촌의 마을회관도, 주택가의 안방도, 뒷골목의 술집도 구더기 쫓을 힘도 없거나 숟가락 하나 들 권력도 없어진 옛 독재자들을 성토하느라 아니 마시고도 목마르지 않았고 아니 먹고도 배고프지 않았다.

      군사독재의 본당과 문민민주의 영남 갈래당과 옛 군사독재의 잔당, 이 세 정당의 합당으로 정권을 장악한 김영삼 정부로선 노태우 정부마저 군사독재라고 도매금으로 넘기기엔 조금 찜찜했는데,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의외의 정치적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전직 두 대통령의 시커먼 통장을 통째로 서서히 시들해져 가던 여론재판의 불에 던졌다. 

    이 때만 해도 좌파숙주 대통령은 제도란 일종의 유기체로서 자체의 입과 머리와 팔다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지 모른다. 문민민주 대통령이 도입한 금융실명제가 배은망덕하게! 자신이 아들에게 맡겨둔 정치자금을 권력 누수기에 때맞춰 폭로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선거 민주주의이고, 둘째는 평등 민주주의이다. 김영삼 정부 때는 이 중에서 선거 민주주의를 주로 얘기했다. 이승만은 간접이든 직접이든 선거에 의해 선출되긴 했으나 마지막에 만천하에 드러난 선거부정을 저질렀으므로 독재자로 매도되었고, 군 출신 세 대통령은 선거는 했으나 군사쿠데타로 일단 권력을 장악한 후에 은연중에 국민을 협박하거나 세뇌하여 당선되었으므로 독재자로 매도되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주로 평등 민주주의를 권력의 후광으로 삼았다. 평등 민주주의는 인민민주(공산주의)와 민중민주(사회주의)가 있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 분단 현실에서 차마 공산주의는 내놓고 주장할 수 없으므로 그건 친정부 성향의 외곽단체에게 맡기고, 분배정의와 평등과 민족자주를 내세워 실질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끝없이 헐뜯고 북한의 현대사는 요식 행위로만 비판하고 북한의 '힘있는' 동족을 으스러져라 끌어안는다.

      바로 이 선거 민주주의와 평등 민주주의란 두 개념에 치명적 오류가 있다.  
     선거 민주주의가 제도상의 민주주의라면 평등 민주주의는 이념상의 민주주의다. 그런데 제도상의 민주주의는 선거만 있는 게 아니고 선거도 절차상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승만의 30일 선거부정은 안 되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30년 공천장사는 괜찮은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는 안 되고, 노무현의 국회농성 쿠데타는 괜찮은가. 

     이념상의 민주주의도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문제다. 이념 때문에 3백만의 동족을 잃은 적이 있는 한국으로선 자유민주 외에는 논의될 수가 없다. 구 서독이 1956년 위헌심사결정으로 공산당(KPD)을 해체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보다 앞서 독일연방에선 1951년에 헌법재판소가 출범하자, 니더작센의 란트 자치정부에서 11%의 지지를 획득한 극우정당 사회주의제국당(SRP)도 자진 해체한 적이 있다. 극좌든 극우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법치의 확립이다. 이것이 언제부터 가능해졌는가.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된 이후다. 그 이전 3년은 법보다 주한미군의 힘이었고 통역관의 말이었다. 한국에서 모든 법률이 완비된 것은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서이다. 대한민국의 어떤 국회도 국가재건최고회의보다 생산적이었던 적은 없다. 지금도 대부분의 법률은 그 때 제정된 법에 기초하고 있다.

      법치를 확립하려면 법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국가안보가 튼실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필수적으로 경찰의 공권력이 살아 있어야 한다.
    한미동맹으로 이승만은 북한만이 아니라 소련과 중공도 감히 대한민국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는 자주국방계획과 실천으로 베트남의 적화통일로 한껏 꿈에 부풀던 김일성의 야욕을 원천적으로 분쇄했다.

    안보의 둑은 오히려 김영삼 정부부터 곳곳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김정일은 핵으로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협박하기 시작하여 이제 당당히 핵 보유국의 지위를 얻기 직전이다.

      장면 정부 때 한국의 치안 상황은 거의 무정부 상태였다.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조직과 권력과 돈 앞에서는 경찰이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을 일거에 정리한 정부가 박정희 정부다. 이렇게 제자리를 찾은 법의 파수꾼은 노태우 정부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자랑이었다.

    김영삼 정부부터 경찰은 불법폭력시위대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젠 아예 대한민국의 경찰은 동네북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더 심해졌다.

      법치의 확립과 함께 경제성장이 뒤따라야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이승만은 성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분배임을 알고 5천년 역사상 가장 큰 결단인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협동농장으로 국가소작제를 도입한 북한과 중공과 소련이 생산성 저하와 분배왜곡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 이승만은 가난하지만 골고루 고통을 분담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이승만 정부는 평등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눈 먼 돈을 방방곡곡에 원님이 꽃잎을 뿌리듯 마구 뿌린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는 효과를 거두었다.

    다 아시다시피, 경제성장은 박정희 정부에서 전두환 정부를 거쳐 노태우 정부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세계1위를 자랑하던 경제성장 시기에도 분배의 척도인 지니계수가 서구 선진국에 비해서도 별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분배정의도 좌파정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승만은 민주화 1세대, 박정희는 민주화 2세대, 노태우는 민주화 3세대이다.
    반면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포퓰리즘(populism) 1세대, 노무현은 포퓰리즘 2세대, 이명박은 포퓰리즘 3세대이다..  (2008.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