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파독광부총엽합회 권이종 부회장서울대 나와도 일자리 없던 시절, 너무도 배고파 ‘너도 나도 광부 지원’“목욕은 하느냐?” 독일인 첫 물음, 막장 환경 열악 “매 순간 죽음과 싸워”
  •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뉴데일리
    ▲ 파독광부들의 기념촬영 ⓒ뉴데일리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12월 18일 박대통령 내외는 광산을 방문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기 위한 자리였다. 

    박 대통령은 이들을 보자마자 울먹였다. 당시그 자리에 있었던 한 광부는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이게 무슨 고생입니까. 나라가 못살아 여러분들이 이국땅 지하 수천미터에서 이런 고생을 합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여러분들의 새까만 얼굴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대통령은 당부했다.
    “외교관이란 마음가짐으로 독일국민의 근면성을 배우고 한국에 돌아와 우리나라가 발전하는데 힘을 보태 주십시오. 지금은 못살아도 우리 후손들에겐 부강한 나라를 물려줍시다”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 내외와 광부들 모두 부둥켜 안고 울었다.

    고희를 넘긴 한 대학 교수가 46년 전 가슴 아픈 추억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부가 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다. 이른바 ‘파독광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이 땅의 젊은 이들은 독일인들이 기피하던 광부와 간호사가 되기 위해 10대1이 넘는 경쟁을 치렀다.

    그렇게 독일로 건너간 이들은 공식 집계로만 2만1천여명. 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 후손을 합치면 파독광부와 간호사 가족은 5만여명에 이른다. 

    권 교수 처럼 광부와 간호사로 시작해 교수가 된 이들도 20여명이나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파독광부’였음을 숨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대우받으며, 묵묵히 지하 갱도를 파내려가야 했던 그들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을까? 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은 과연 무엇일까?
    교수가 된 파독광부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파독광부 총연합회 부회장)ⓒ뉴데일리
    ▲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파독광부 총연합회 부회장)ⓒ뉴데일리

    기념관 건립을 추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현재 부유함의 바탕에는 기성시대의 땀방울이 있다. 이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상상할 수없을 만큼 가난해고 배고팠던 그 때 우리는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꿈과 희망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꿈과 희망’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이룩한 나라인지를 자라나는 세대들이 한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경험을 통해 근검과 절약의 가치도 다시금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부로 독일을 간 이유는 무엇인가
    1963년 첫 파독당시 한국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수출품이라고 해야 고작 가발과 봉제완구 정도였고, 봄이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해야 했다. 서울대를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 힘들었다. 굶는 것이 제일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행을 선택했다. 독일이라는 선진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있었다.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고 들었다.
    광부를 신청한 이들 중 상당수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이었다. 공무원과 교사들도 있었다. 광부라지만 당시 한국임금의 10배를 넘는 급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계약조건은 어땠나?
    정해진 근무기간은 3년이었다. 나머지는 그 당시 독일 근로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당시 한국의 실정에 비한다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파독광부 시찰 당시 모습 ⓒ뉴데일리
    ▲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파독광부 시찰 당시 모습 ⓒ뉴데일리

    일하기가 쉬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처음 갔을 때 독일 사람들이 목욕은 자주 하느냐는 말을 했다. 그만큼 우리를 후진국의 미개인으로 여기는 듯 했다.

    말도 다르고 음식도 달랐다. 광부와 간호사는 당시 독일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직업이었다. 모든게 어려웠다.

    특히 막장의 환경은 열악했다. 지하 1,000미터를 내려가 작업을 했는데 100미터 내려갈 때마다 지열이 1도씩 올라갔다. 때문에 막장 내부온도는 35가 넘었다. 너무 덥고 습해 옷을 거의 벗고 일을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장화속 양말이 흥건히 젖어, 신고 있던 양말을 짜낸 후 다시 신어야 할 정도였다. 막장에 내려갈 때 6~7리터들이 큰 물통을 가지고 내려가는데 일을 하다보면 물통이 비곤 했다.

    광산 일을 끝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모은 돈의 대부분을 송금하다보니 독일에서도 늘 배고픈 생활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
    매 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일을 했다. 막장이 무너져 내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가스폭발이나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로 평생 장애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매일 죽음이란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석탄가루가 폐에 쌓이는 진폐증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더위도 정말 참기 힘들었다. 

    독일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숙소 근처에 고사리가 지천으로 널려있어, 그것을 뜯다 ‘자연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힌 일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청국장과 김치를 정말 좋아했는데 한번은 숙소에서 청국장을 끓여먹다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일도 있었다. 악취가 난다는 이유였다.

    광부생활을 그만 둔 후 아헨대 사범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마늘을 먹은 다음날이면 같은 과 동료들이 냄새가 난다며 전부 자리를 피하곤 했다. 
     
    광부생활을 그만 둔 후, 독일에 남아 대학을 진학했다
    3년이 지나 광부 일을 그만두고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짐도 모두 한국에 보낸 뒤였다. 비행기를 타러 공항까지 갔는데 독일에서 나를 보살펴 주던 현지인 수양어머니께서 나를 붙잡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다. 남아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말씀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한국행 비행기를 그대로 보내고 결국 독일에 남기로 했다.
    수양어머니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국립 아헨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을 말해 달라
    독일에 남기로 했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려면 다시 체류허가가 필요했다. 내게 공부를 권유했던 현지인 어머니의 소개로 당시 독일에 주둔해 있던 벨기에군 PX에 임시로 일자리를 마련해 겨우 고비를 넘겼다.

    어려서부터의 꿈이 초등학교 교사였다. 자연스럽게 사범대학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다른 나라 사람이 독일 국립대학의 사범대에 입학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입학허가를 받는 것이 정말 어려웠는데 사범대학장께서 내 딱한 사정을 듣고 특별히 입학을 허가해 줬다.

    그렇게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광산에서 일만 한 사람이 어떻게 대학수업을 따라 갔겠는가?

    사전을 씹어 먹으면서 공부했어도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을 따라가기가 정말 힘들었다.
    고향이 너무 그리웠다. 배고픔도 고통스러웠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 걸고 울기도 여러번이었다. 우울증에 자살을 생각해 본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도교수님께서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해선 안된다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장학금도 알아봐 주시고 일자리도 소개해 주셨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해 나가면서 주말에는 한글학교에서 동포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직업학교 교사도 잠시 했다. 67년 입학해 79년 드디어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혼을 독일에서 했다
    대학에 입학해보니 한국인 여학생이 있었다. 나와 같은 파독 간호사 출신이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 출신 대학생 커플이 결혼을 한다고 현지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 출신으로 교수가 된 이들도 있다던데
    나를 포함해 모두 20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안다. 국내에는 15명 정도가 있다. 그러나 광부출신임을 밝히지 않는 이들도 있어 정확한 집계는 아니다. 대부분 자연과학이나 공학계열을 전공했고 인문사회분야를 전공한 이는 내가 유일한 것 같다.

    파독광부들의 현재 생활수준은 어떤가?
    소재가 확인된 국내 거주 파독광부 중 연합회에 가입한 이들은 채 5백명 안 된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연 1만원인 회비를 납부하기 어려울 만큼 생활이 곤궁하다. 아직도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황식 총리가 취임해 가장 먼저 만난 외부단체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김황식 총리께서 취임한 후 총리공관으로 우리를 초대해 만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에 파독광부 간호사 기념관 건립, 공무원 및 학생 등 국민에 대한 강연 및 홍보지원,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예우 등 세 가지 안을 요구했다.

    총리와 정치권 일각에서 이 문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 파독광부총연합회 정기총회. ⓒ뉴데일리
    ▲ 파독광부총연합회 정기총회. ⓒ뉴데일리

    파독광부총연합회에 대해 말해 달라. 어떤 일을 하는가?
    파독광부와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약 2만1천여명에 이른다. 광부는 8,968명, 간호사는 약 1만2천여명이다.

    이들에 대한 자료가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고, 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진 존재가 돼 가고 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애환이야 말 할 것도 없지만 이 사업이 당시 우리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영향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체계적인 연구가 없다.

    자라나는 세대가 모르고 지나쳐쳐 좋을 단순한 옛 추억이 결코 아닌데 소홀이 다뤄지는 측면이 있다.

    연합회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자 2008년 10월 결성됐다. 파독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백서를 발간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해 보급 중이다. 각급학교 학생과 군부대 장병, 지역주민들을 위한 강연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내 거주하는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소재를 확인해 정보를 교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 추진 상황은 어떤가?
    연합회 차원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예산 마련에 어려움이 크다. 국가에 관련 예산 25억원을 신청해 놓은 상태지만 반영될지 불투명하다.

    유명한 체육선수나 연예인을 위해서도 수십억 이상의 예산을 들여 공원이나 기념관 등이 만들어지는 현실을 보면 마음이 더욱 착잡하다.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가 자기들의 조상들이 왜 먼 타국땅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