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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야. 아빠가 이번에 배를 타고 다시는 안 탈거야. 다녀와서 맛있는 것 많이 사줄게.”
그렇게 떠난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43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편과 생이별한 어머니는 올해 일흔셋, 칭얼대며 아버지를 조르던 8살짜리 그 딸도 어느덧 쉰 줄에 들어섰다.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이하 시변)은 15일 문을 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에 이 안타까운 사연을 제1호로 접수했다.
사연의 당사자인 김정희씨 외에 정치범수용소나 탈북과정에서 감옥에 수감되어 불법감금 및 고문 등 피해를 입은 피해자며 납북되어 현재도 억류 중이거나 생사불명인 납북피해자의 가족 등 북한인권 피해자들 21명의 진정서도 함께 제출됐다.김정희씨의 아버지 김경두씨(1935년생)는 ‘부길호’의 기관장이었다. 1968년 6월 6일 인천 옹진군 연평면 소재 연평도 인근 앞바다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부길호는 영문도 모른 채 북한경비정에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기관장 김 씨를 비롯해 선장, 부선장, 부기관장 등 선원들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납치 이튿날 경찰 2명이 찾아와 “아버지가 납북되었다”고 통보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납북은 평생 손과 발에 무겁게 차야 할 억압의 고리였다.
8살 꼬마는 19살까지 경찰 등 국가기관으로부터 감시를 당했다. 20살 이후에도 취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더한 고통은 이 감시와 의심의 눈초리가 김정희 씨 본인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4촌들까지 소위 연좌제에 걸렸다. 남동생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도, 심지어는 TV를 새로 사도 마치 간첩을 다루듯 의심을 받았다.납북되기 전 아버지는 기계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군에서 하사관으로 근무(상사 전역)하면서 여러 기술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과 경찰들은 북한도 아버지의 기술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마 절대로 한국으로 안 보내 줄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부길호를 타고 어로작업 중 납치된 사람들로서 한국으로 귀환한 사람은 없다.
그러던 중 2006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 기대도 안했는데 당첨이 됐다.
“혹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지만 북한 당국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확인불가”라는 통지를 해왔다.
김씨는 아버지의 납치로 어머니와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평생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왔다고 울먹였다. 그 고통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김씨의 진정이 인권위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에 접수된 15일 오후 통일부는 “북한 어민 27명을 서해 해상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