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논설위원이 쓴 <2007년 ‘북한 변수’는 없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0년 4월 10일자 신문엔 사흘 뒤 치러질 총선 판세가 실렸다. ‘여당인 민주당 우세 85곳, 한나라당 우세 95곳, 초접전 선거구가 30곳’이라는 내용이었다. 막판 변수가 없다면 한나라당이 10석 정도 차로 이길 것이라는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변수’가 발생했다. 오전 10시 남북한이 동시에 정상회담 개최합의를 발표한 것이다. 민주당 사람들은 표정관리에 들어간 반면, 한나라당 쪽은 침통했다.

    상당수 전문가들도 ‘정상회담 카드가 실향민 표심을 움직일 것’이라고 점쳤다. 6·25 전쟁을 전후해 월남한 실향민과 2세 유권자가 수백만명이었다. 그중 일부만 민주당 쪽으로 움직여도 선거 판도가 뒤바뀔 판이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뜻밖이었다. 전국구를 포함해 한나라당이 133석, 민주당이 115석을 얻었다. 정상회담 발표 전 예상보다 의석 차가 오히려 벌어졌다. 1000표 내로 승부가 갈린 초접전 지역 15곳 중 13곳이 한나라당 차지였다. 막판 표 쏠림이 한나라당 쪽으로 이뤄졌다는 얘기다.

    필자는 본가, 외가, 처가 어른들이 모두 실향민이다. 그래서 실향민 정서를 알 만큼은 안다. 대부분 실향민은 김일성-김정일 정권을 극도로 싫어한다. 북한정권과 협상한다는 생각 자체에 부정적이다. 김씨 정권 주머니에 현금을 보태주기 싫어 금강산 관광도 마다할 정도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풍을 기대했던 쪽도, 우려했던 쪽도 실향민 정서를 잘못 짚었던 셈이다.

    2002년 10월 17일 밤 TV뉴스의 헤드라인은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했다”는 보도였다. 10월 초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일행이 방북했을 때 북한 외교부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추진을 밝혔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합의의 핵동결 약속을 깨뜨린 것이다.

    대선까지는 두 달 남은 시점이었다. 8년 만에 다시 불거진 북핵은 햇볕정책 승계를 밝힌 노무현 민주당 후보에게 악재라는 게 자연스런 분석이었다. 그러나 표밭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10월 초나 11월 초나 30%대 초반에서 제자리걸음이었다. 반면 노 후보는 10%대 중반에서 20%선을 넘어서며 이 후보와의 격차를 좁혀 갔다.

    북한이 지난 10월 3일 핵실험 예고를 하기 직전 종합주가지수는 1374였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10월 9일 주가는 1319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부터 반등을 시작해 현재는 1430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한마디로 국민들은 북핵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마당에 남북정상이 새삼스레 만나 “북핵 해결에 완전 합의했다”는 뻔한 메뉴를 꺼내본들 흥행이 될 리 없다.

    국민들은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통일’이라는 햇볕장사, ‘내일 모레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안보장사에 신물이 날 만큼 났다. 정치인들이 너무 오랫동안 남북문제를 정치에 이용해 온 결과, 국민들에게 내성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치인들은 ‘북한 변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표도 안 되면서 남북관계만 꼬이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0년 총선 때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선거 직후 노 대통령은 “분명히 내가 이기고 있었는데 정상회담 발표 때문에 역풍을 맞았다”고 했었다. 그 분이 안 풀렸는지 청와대에서 열린 낙선자 위로 오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6년 전 뼈저렸던 기억을 이제 잊은 모양이다. ‘내년 3,4월 정상회담으로 대선 승부수를 띄운다’는 시나리오가 정권주변에서 끊이질 않으니 말이다. 이미 노 정권은 업보를 쌓을 만큼 쌓아 놓았다. 그 위에 ‘정상회담으로 선거에서 재미 보려다 남북관계에 부담만 준 죄’까지 보탤 작정이라면 누가 그걸 말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