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형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일제 말기에 그는 일본군에 끌려가 해방을 20일 앞둔 1945년 7월 23일, 소·만 국경 어디에서인가 전사, 한 줌의 재가 되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의 아버지·어머니가 그 부대를 찾아가, 그 아버지가 그 맏아들의 유골이 담긴 작은 상자를 목에 매고 돌아오던 날, 평양역에는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황장엽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나의 형과 비슷한 나이입니다. 노동당의 서기로 맹활약하던 그가 중국을 거쳐 서울에 왔다는 뉴스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김영삼이 당시에 대통령이었기에 그 일이 가능했지 아마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청와대의 주인이었다면 서울에 오는 일이 용납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중국 땅 어디에서 자객의 손에 죽었거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망명객으로 앙앙불락의 세월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가 아직도 바깥출입이 허락되지 않아 교외의 안가에서 삼엄한 경계 속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그를 책임진 단장이 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황장엽 씨가 김 교수를 한 번 만나기 원하는데 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사귐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날카롭고도 빛이 나는 맑은 눈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사심도 없는 깨끗한 사람임을 나는 그 첫 번 만남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절차가 하도 까다로워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는 나에게 있어 형님 같은 존재가 되었고 나는 그의 동생처럼 되어, 형제의 정은 날마다 두터워졌고 동지로서의 우의는 더욱 깊어져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황장엽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결심한 사람인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두고 온 그의 가족은 다 숙청되었고 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새 황 선생을 해치우려고 암살단이 남한으로 계속 파송되고 있다는데”라고 기자가 물었을 때 황장엽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가 나이가 몇인데”라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언제 죽은들 어떻냐”는 뜻으로 풀이가 됐습니다.

    그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했고 나는 조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니, 평화통일과 자유민주주의는 같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황장엽도 김동길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다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80대의 두 노인, 황장엽과 김동길은 오늘도 고개를 들고 각자 제 길을 갑니다. 앞으로 남은 두 사람의 황혼 길이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맺어진 두 사람, “형제는 용감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