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宗이냐 李承晩이냐?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에 우리는 어떤 화두를 던져야 할 것인가? 오늘의 우리의 출발점은 대한제국인가, 대한민국인가? 그것이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심각한 쟁점이다. 정통 주류 국사학계 권력은 우리의 뿌리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광무개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의 청년 운동권 투사였던 이승만 박사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와 수구파의 조선왕조를 타도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조선왕조를 누가 근대화로 극복하려 했거나 그러려다 좌절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이론적 학문적 다툼이 있는 셈이다. 

     주류 학계의 “광무개혁이 시작"이라는 가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던 교과서포럼 등 일단의 신세대 자유주의 계열 연구자들은 “고종의 광무개혁 좋아하네. 그건 일본의 훈수에 밀려서 억지로 한 것이지, 미욱한 군주였던 고종이 제풀에, 제 의지로, 제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세상을 연 시조 할아버지는 역시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였다고 주장한다. 

     주류학계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앞에 대한제국이 있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계몽군주 또는 장차의 입헌군주제 준비를 했다는 가설을 세우고 싶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이 그런 적 있나? 패장(敗將)은 또한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고종은 패장이고 이승만은 승리한 장수다. 이승만은 조선 멸망이 당시 왕조의 큰 탓이라고 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조선을 독립 시켜도 그것이 조선왕조를 복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확고한 소신을 가졌을 것이다. 

     고종이 설령 망명을 기도한 적이 있었을지도 그 미완(未完)의 시도가 국권상실 과정의 그의 책임을 무죄로 사면시켜 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고종은 그의 은밀한 망명 시도 여하간에 망국의 책임에서 면제될 길이 없다. 나라가 망하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왕이 대표적인 채임을 져야 한다. 

     이승만 박사는 이를테면 유럽 근대 정치사에 등장하는 프랑스 혁명 이후 시대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퇴영적인 '앙시앙 레짐'인 조선왕조를 청산하려 한 한 한국판 ‘1789년 7월 14일’의 미라보와 라파이에트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여망은 좌절했고 그는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다. 

     감옥에서 그는 조선왕조와 영원히 결별했다. 그리고 새로운 조국의 미래상의 모델을 미국-유럽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서 구했다. 한 마디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은 아무런 연속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 이씨 왕조 유족들에 대해 냉정하고 차갑게 대했다. 그 만큼 조선왕조에 대한 그의 혐오감이 깊었다는 뜻이다.  

     결국 한반도 최초의 근대 문명개화 세상의 시발은 대한제국 아닌 대한민국의 이승만 박사의 작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

    류근일 (본사고문 /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