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독립문제를 처음으로 연합국들이 합의한 것은 카이로 회담이다.
    세계 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반전되면서 1943년 11월 22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카이로에서 만나 전후처리 문제를 협의한 결과물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한 3대국은 ‘적당한 절차’에 따라 한국을 해방 독립시키기로 결의했다“는 이 선언으로 일제의 패전과 더불어 대한민국은 건국되었다.
    이 카이로 선언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초안을 만들었다.
    루즈벨트와 처칠이 부분수정은 했지만 골격은 그대로 채택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홉킨스가 한국독립 조항을 선언문에 넣게 되었을까.

    일부에서는 김구의 임시정부 요청을 받은 장개석 총통의 영향으로 이 조항이 들어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중국의 입장이나 국제정세를 외면한 일방적 이야기다.
    카이로 회담은 미국, 소련, 영국이 테헤란에서 회담을 열기로 하고, 테헤란으로 가는 길에 열린 예비회담 성격이었다. 루즈벨트는 전후 극동문제 논의를 위해 테헤란 회담에 장개석을 참여시키려 했으나 처칠과 스탈린이 반대했다. 그래서 예비회담에만 참석시킨 것이었다.
    “중국은 만주와 한국의 재점령을 포함, 광범한 영토의 야심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훗날 공개된 미국무성 극비문서에서 보듯이, 장개석은 한반도를 중국의 속방으로 생각해온 사람이다. 1941년 광복군이 조직되었을 때 중국은 광복군을 한국임시정부와 무관한 단체로 분리했다. 광복군을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소속으로 편입하였고 참모장과 정훈차장을 중국인으로 임명했다. 이는 광복군이 한국의 독립투쟁을 위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없도록 묶어두려는 목적에서였다. 장개석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일정수준 지원은 했지만 한반도의 독립에는 극히 부정적이었다. 장개석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해방때까지도 승인하지 않았다.
    한국독립당이 생기자 임시정부를 ‘한독당의 임시정부’로 불렀으며, 몇 차례의 임정 승인 요구를 번번이 거절했다. 일본이 항복한 8월15일에도 임정 승인을 요청했지만 장개석은 끝내 거부해버렸다.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자 중경(重慶)의 임시정부에서는 ‘적당한 절차’란 대목을 놓고 한국이 중국의 위임통치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한편, 미국의 이승만은 ‘in due course'에 대하여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음모‘임을 간파하고 루즈벨트와 의회를 상대로 진상규명 요구와 함께 규탄운동을 벌인다. 소련을 태평양 전선에 끌어 들이려 조바심치는 미국이 한반도를 댓가로 내주려한다는 것이 강대국정치를 꿰뚫는 이승만의 결론이었으며, 그의 반소노선은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우리의 우군으로 믿었던 장개석정부의 표리부동과 소련의 야심을 알 리 없는 한국인들에게 ‘독립 조항’은 기적 같은 복음이라 할 것이었다.

    루즈벨트와 홉킨스는 그러면 왜 ‘한국독립’ 조항을 초안에 넣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장기간 이승만이 벌인 미국 외교활동이 맺어진 열매라고 하겠다.
    잘 알려진 대로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박용만이나 김구의 무장투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방위 국제외교 투쟁’ 노선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무장투쟁은 식민국 일본의 한국 탄압만 강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강대국 미국의 힘을 빌어 강대국 일본을 물리치자”는 것이 이승만의 전략전술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장투쟁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시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받음과 동시에 한국도 선전포고와 함께 참전해야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先승인’ 캠페인을 끈질기게 벌였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합법정부 자격으로 참전해야만 전쟁중엔 물론 전후에 일본정부와 대등한 위상을 획득한다, 국제정치통 이승만다운 선택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전쟁말기에 임정의 이름으로 선전포고도 하였고 무장투쟁(OSS)도 추진한다.
    간단히 줄여서 우선 이승만은 미국의 2명의 루즈벨트와 특별한 인연을 가졌다.
    1905년 고종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 데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를 만난다. 미국이 1882년 조선과 맺은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일본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이미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한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맺은 직후였다.
    그후 1933년부터 집권한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 부부와 연을 맺는다.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국은 1882년의 조미조약을 파기하면서 일본의 한국강점(1905 을사조약)과 병합(1910)을 허용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듯이 이승만은 미국의 약점을 공격하면서 기회있을 때마다 미국을 압박했다. 또한 이승만은 루즈벨트 외교팀의 실력자 섬너 웰즈의 지지를 얻었다. 웰즈는 전국 신문 신디케이트에 이렇게 썼다. “한국이 독립하면 미국이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죄악중 하나가 청산되고, 새로운 태평양 국제질서에 한국이라는 안정요소가 추가될 것이다.”
    ‘태평양의 안정요소’란 일찍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시절부터 줄기차게 펼쳐 왔던 한국독립의 세계적 긴요성을 설득한 논리다.
    이와 같이 조미조약을 파기한 T.루즈벨트의 죄, 태프트-가츠라 밀약으로 한국을 희생시킨 행위에 대하여 F.루즈벨트나 미국 지도층이 ‘죄의식’까지 느끼게 된 것은 우연일까. 일본에 배신당한 미국의 기독교적 양심과 자유, 속죄 본능에 불을 지른 이승만의 심리전 효과에 틀림없는 것이다.
    F. 루즈벨트와 T.루즈벨트는 먼 친척간이다. F.루즈벨트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는 T.루즈벨트의 조카였다. 이승만은 대통령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와 친분을 쌓았고, 엘리노어는 이승만의 요청들을 남편에게 전하는 일도 많았다. 이승만이 무장투쟁을 위해 요청한 무기대여문제도 엘리노어가 루즈벨트에게 독촉할 정도였다.
    또한 해리 홉킨스는 백악관에서 루즈벨트와 기거하는 측근중의 측근이었다. 목사의 딸인 어머니의 기독교 신앙으로 성장한 홉킨스는 루즈벨트와 손잡기까지 빈민 퇴치등 억압받는 계층의 구원운동에 헌신할 정도로 기독교 정신에 투철한 인물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정신을 독립외교의 동력으로 풀 가동시킨 이승만.
    미국의 유력정치인들을 규합한 ‘한미협의회’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오래 다닌 교회목사이자 연방상원의원 원목인 해리스 목사를 이사장으로 내세워 정교(政敎) 총력체제로 뛴 이승만.
    루즈벨트 회고록엔 “이승만의 저서 ‘Japan Out Inside'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1941년 여름에 출판한 이 책을 이승만은 백악관을 비롯하여 스팀슨 육군장관, 헐 국무장관등 정계 요로에 모두 보냈다. 홉킨스도 물론 받아서 읽었을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경고한 책이 나온 지 몇달 만인 12월7일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이승만을 예언자로 만들어 준 일본, 진주만뿐 아니라 소련의 탐욕과 미-소 충돌까지 예언한 선지자 이승만, 오로지 조국을 위해 일생을 희생한 순교자적 이승만의 독립정신이 루즈벨트 가족과 미국인들의 독립정신에 녹아들어 카이로 선언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