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도심의 덕수궁과 경복궁 앞에선 매일 守門將(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 엄격하게 말하면 守門將 교대 쇼이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조선조 시절의 옷을 복제한 것이고, 이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가짜이다. 수문장과 그 병사들은 연극의 役을 하고 있을 뿐 실제로 경복궁과 덕수궁을 지키는 군인이 아니다. 일종의 배우들이다. 경복궁과 덕수궁 안에 王族이 사는 것도 아니다.
     
    영국 런던의 버킹검 궁 근위병 교대식을 본뜬 것 같은데 버킹검궁엔 왕족이 살고 있고 근위병은 배우가 아니라 진짜이다. 
     
    수문장 교대 쇼를 보던 한 시민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閔妃 시해도 막지 못한 자들이 무슨 자랑을 한다고..."
     
    1895년 閔妃가 살던 경복궁이 일본깡패들(낭인)과 이들에게 포섭된 조선 군인들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왕후가 살해당할 때 수문장과 侍衛隊(국왕의 근위병)는 제대로 싸우지 못하였다. 당시 侍衛隊는 미국인 퇴역장성 다이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일본측 병력이 몰려오자 달아나버렸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兵力을 이끌고 저항하다가 사살되었고,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군부대신 안경수는 도망쳤다. 前 군부협판(현 국방차관)은 일본인 깡패들과 손 잡고 閔妃 시해에 가담하였다. 훈련대의 세 대대장도 일본측에 동참, 國母를 죽이는 데 협력하였다. 물론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일본측에 협력하여 며느리를 죽이는 일을 도왔다.
     
    조선조 역사뿐 아니라 한민족 2000년 역사중 가장 수치스러운 閔妃시해(을미사변)는, 조폭 수준의 일본낭인들을 막지 못한 조선 군대의 치욕이고 수문장과 시위대의 치욕이다. 덕수궁과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은 그러니 자랑꺼리가 못되는 것이다. "민비시해도 막지 못한 주제에..."라는 한 시민의 불평은 핵심을 찌르는 것이다. 
     
    文弱하여 망한 조선조 경복궁, 덕수궁 수문장 교대 의식보다는 國軍 해병대 의장대의 사열이 훨씬 힘 차고 외국인들에게 볼 거리일 것이다. 조선조의 수문장이 보여주는 초라한 兵器와 갑옷이 아니라 세계적 强軍으로 성장한 국군 해병대의 尙武정신이 철철 넘치는 사열은 한국의 國格을 높일 것이다. 공산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근대화의 주체세력이 되고,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도 훌륭히 수행하였던 國軍이다. 수문장 교대식에 등장한 가짜 무기를 보고, 군사문화의 전통이 강한 서양사람들이 "아니, 저런 무기로 어떻게 나라를 지켰단 말인가. 한국이란 나라는 경제와 문화만 발달하였지 군사력은 형편 없는 체질이군"이라고 경멸하지 않도록 하려면 국군 의장대를 동원하여 기를 죽여주는 수밖에 없겠다. 
     
    국군 의장대가 매일 광화문 일대를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은 사회분위기도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국가상징거리인 광화문 일대에서 성공한 나라 대한민국의 상징을 다 몰아내고 실패한 나라 조선조의 상징들로 도배를 해놓는 한심한 국가지도부의 역사관에도 경종을 울릴 수 있다. 좋은 진짜가 있는데 왜 굳이 초라한 가짜를 외국관광객들에게 보이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어슬픈 모방 행위로 말이다. 
     
    특히 외국 국가원수가 한국을 방문할 때 조선조의 병정차림을 한 의장대가 등장하여 사열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국군의장대로 바꿔야 한다. 조선조 병정 차림의 사나이들은 연극배우이지 군인이 아니지 않는가. 한국인들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여 실제행동을 해야 할 때 연극을 하는 수가 있다.
     
     ======================================================================
     
    시위병영터는 조선 말기 왕권 호위 부대인 侍衛隊의 보병 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였던 곳으로 현재 서울 중구 서소문동 56, 120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당시 일제의 간섭에 의해 여러 軍門을 군무아문에 소속시켜 일원화하였다가 훈련대로 편성하였다. 1895년 삼국간섭에 의해 일제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독자적인 侍衛隊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2개 대대를 1개 연대로, 1개 대대를 2개 중대로, 1개 중대를 3개 소대로 편제하였다. 시위대는 미국인 교관에 의해 훈련되었고, 궁내 侍衛를 담당하였으며, 병졸을 두개 편대로 나누어 3일마다 교대근무토록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제에 의해 훈련대에 편입되었다가 1896년 아관파천 후 친러내각이 성립됨으로써 1897년 다시 조직되어 친위대 5개 대대로부터 하사와 병졸 1000여 명을 두고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1907년 순종의 군대해산령에 따라 훈련원에서 해산되었다.
     
     
     =======================================================================
    을미사변 (乙未事變)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을 가리킨다. 

    1894년의 갑신정변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이완용(李完用)·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 등 소위 '정동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시키고, 미군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리하여 미우라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金弘集)·어윤중·김윤식(金允植)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 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 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왕궁을 호위하던 다이 지휘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하여 패배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민비의 침소인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廢黜詔書)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 녹원(鹿苑) 숲속에 묻었다. 이후 대원군을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왕비학살을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방안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민비시해는 아는 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민비의 폐위조칙을 위장 발표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미국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발표했다. 또 이들은 일본이 뒷받침하고 있는 김홍집 내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렇게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한편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민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으나 일본인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여 이주회(李周會)·윤석우(尹錫禹)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후 이준용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데서 사건을 매듭지으려 했다. 또 내외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추진, 단발령과 건양(建陽)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비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