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9회 이승만포럼/2016. 11. 15(화) 오후3:00~5:00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

    이승만 대통령은 왜 작전지휘권을 이양했을까?

                남 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Ⅰ. 머리말
    Ⅱ. 이승만은 꼭 그런 조치를 취해야만 했을까?
    Ⅲ. 이승만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작전지휘권 이양을 작성했는가?
    Ⅳ. 왜 1950년 7월 14일 작전지휘권을 이양했는가, 시기적으로 적절했는가?
    Ⅴ. 유엔은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Ⅵ. 이승만은 작전지휘권 이양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Ⅶ. 맺음말 : 작전지휘권 이양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 Ⅰ. 머리말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은 1950년 7월 14일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전격 이양’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 당시 작전지휘권(엄격한 의미에서 작전통제권) 이양은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을 포함하여 군 수뇌부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해 국내 학계는 전쟁수행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들어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작전지휘권 이양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미동맹의 근간을 이루며 대북억지전략으로 크게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함께 이승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해서는 ‘주권의 포기’라는 일부의 비판이 여전히 남아 있다. 당연히 이승만의 평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의 이런 비난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한 학문적 연구는 전무(全無)하다시하다. 과문(寡聞)한 탓인지 몰라도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수미일관(首尾一貫)한 글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내용은 6·25전쟁의 흐름을 담고 있는 공간사(公刊史) 및 관련 연구서등에 일부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일부의 비판도 결국은 제대로 된 연구에 기초하지 않고 그저 이승만 흠집 내기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6·25전쟁을 수행하면서 범인(凡人)의 상상을 뛰어넘는 통치행위를 결행했다. 그중 첫 번째 행위가 바로 작전지휘권 이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왜 작전지휘권 이양이라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 날짜가 7월 14일이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했는가?
    이승만은 누구와 상의하고 그런 조치를 취했을까가? 아니면 순전히 혼자의 판단으로 그렇게 했는가? 이승만의 조치에 유엔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긍정적이었을까 아니면 부정적이었을까?
    작전지휘권 이양은 국군 및 유엔군의 작전에 도움을 줬는가? 이승만의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가? 그가 노린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한 위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데 있다. 뿐만 아니라 전시 국가지도자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위기대처능력과 국가이익을 위해 국가지도자는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데 있다. 나아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시 국가지도자의 판단과 결심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성찰하는데 있다. 결국 이 글은 작전지휘권 이양이라는 이승만의 특단적 조치를 통해 다시 한 번 전시 지도자로서 그의 리더십을 재평가해 보는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연구는 더욱 필요하다 하겠다.      

         

  • Ⅱ. 이승만은 꼭 그런 조치를 취해야만 했을까?

    이승만 대통령에게 6·25전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에게 6·25전쟁은 ‘제2의 독립전쟁’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의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온갖 풍상(風霜)을 겪으며 일제강점기 40평생을 바쳐온 이승만의 독립운동도 한갓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만사휴의(萬事休矣)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평생 조국독립의 꿈과 노력도 그리고 어렵게 성사시킨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대한민국도 한꺼번에 사라질 순간이었다. 이승만 개인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오랜 독립투쟁으로 일궈낸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됐다. 75세의 고령에 달한 이승만에게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경우, 이를 다시 만회할 시간적 여유도, 그럴 힘도 없어 보였다.
    그만큼 북한의 기습남침은 이승만에게나 대한민국에게 충격적이며 치명타였다. 어쩌면 이승만에게 북한의 남침전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것은 조국에 대한 그의 마지막 召命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북한군의 전력은 질적이나 양적으로 국군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침당시 남북한 간에는 현격한 전력상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북한군은 국군에게도 단 한 대도 없는 전차 242대와 전투기 226대 그리고 병력면에서도 약 20만명(북한군 병력) 대 10만명(국군병력)으로 크게 우세했다. 북한군은 이런 우세한 전력을 앞세워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말했듯이 대한민국을 마치 ‘먹이 감을 잎에 둔 코브라’처럼 달려들며 공격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6·25전쟁초기 남북한 간의 현격한 전력차이 및 전쟁수행능력에 대해, “제갈량(諸葛亮)이가 국무총리였어도 공산군의 장총대포(長銃大砲)와 전차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정부가 이에 대한 대책을 미리 세우지 못한 것은 미국의 군사물자가 오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북한군은 중국대륙에서 항일전과 국공내전에서 수년간 단련된 중공군 내 한인(韓人)병사 5-6만 명을 북한군 사단으로 둔갑시켜 남침의 선봉으로 내몰았다. 북한군 제5사단과 제6사단 그리고 제12사단이 바로 중공군 사단들이었다. 더욱이 북한군은 소련이 제공한 현대식 무기와 장비 그리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해 준 남침전쟁계획을 가지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방어형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사정없이 휘몰아 내리쳤다. 누가 봐도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의 ‘승리’를 예견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현대전을 지도하고 수행할 수 있는 전쟁관리능력이나 위기관리능력이 전혀 축적되지 않았고, 그럴만한 시간적 여유도, 그리고 이를 경제적으로 뒷받침 할 재정적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단독의 힘으로는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소총하나 만들 수 없는 신생국이자, 열악하기 그지없는 방어형무기로 무장한 국군으로서는 잠시 북한군의 남진을 늦출 수는 있어도 전쟁을 획기적으로 만회할 힘도 능력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국군에게는 최소한 현대전을 수행할 적 전투기나 전차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와 장비가 전무(全無)한 상태였다. 이는 6·25전쟁이전 미국의 소극적인 대한정책(對韓政策) 및 유럽우선주의 전략에서 비롯됐다.
    그럼에도 전쟁이전 이승만 정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국을 향해 군사동맹과 군사원조 그리고 주한미군 주둔 및 기지제공 등을 요청했으나, 미국의 무성의한 대한정책으로 인해 모두 무위로 끝났다. 즉, 이승만은 6·25전쟁 이전 미국에게 태평양동맹 체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주한미군 주둔, 진해해군기지 제공, 전차와 항공기 등 최소한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지원 등을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북한은 이런 대한민국의 안보상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일제히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현대식 무기와 현대전 수행능력을 갖춘 북한의 침공을 받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자력으로는 북한의 남침공격으로부터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미국이나 유엔 등 외부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불리하게 진행되는 전쟁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다. 단지 대한민국으로서는 국군의 활약에 따라 조금 더 국가의 명운(命運)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실을 이승만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당일부터 미국과 유엔에 도움과 원조를 요청했다.
    천우신조였다. 남침 상황을 접한 미국과 유엔은 이를 ‘국제평화의 파괴 및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대한민국 돕기에 신속히 움직였다. 그것이 바로 1950년 6월 25일과 27일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이하 유엔안보리)의 결의다. 유엔안보리 결의는 북한의 침략에 맞서 유엔회원국으로 하여금 자국의 군대를 한국에 파병하여 돕도록 조치했다. 나아가 유엔안보리는 7월 7일 한국에 파병될 유엔회원국 군대를 통합 지휘할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하면서, 유엔군사령관 임명을 포함해 유엔군사령부가 수행할 작전 전반에 대한 권한을 미국에 위임했다. 다음은 유엔안보리에서 결의한 ‘유엔군사령부 설치 결의안’이다. 결의안에서는 유엔군사령부 명칭을 통합군사령부(United Command)로 지칭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이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확정하고, (…)군사력과 기타 지원을 제공하는 모든 회원국이 미국 책임하의 통합군사령부(United Command)가 그러한 군사력과 기타 지원을 운용하도록 할 것을 권고하며,
    미국이 그러한 군사력을 지휘할 사령관을 지명하도록 요청하며, 통합군사령부가 그의 재량으로 북한군에 대한 작전 중 유엔기를 여러 참전국의 국기와 함께 사용하도록 인가하며,
    미국은 통합군사령부의 책임 하에 취해진 작전경과에 관한 적절한 보고서를 안전보장이사회로 제출하도록 요청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엔군사령부 설치결의안이 통과된 지 불과 1주일만인 1950년 7월 14일 ‘국군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승만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재빨리 처리했다.

    Ⅲ. 이승만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작전지휘권 이양을 작성했는가?

    1. 작전지휘권을 둘러 싼 이승만 전시내각의 능력과 한계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국난을 당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가차원의 전쟁을 지도할 매뉴얼(manuel)도 전쟁을 수행할 전쟁지도기구나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은 만 2년도 안 된 신생국이었다. 대통령인 이승만이 모든 국정을 전반적으로 이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전쟁수행은 이승만이 담당할 몫이었다. 남침 이후 3일간 대한민국 운명을 가름할 72시간은 이승만의 능력을 빛나게 했다. 75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쟁 초기 가장 중요한 시간을 매우 슬기롭게 처신했다.
    이승만은 ‘북한 남침 이후 72시간’ 동안 밤을 세면서 미국과 유엔에 수차례에 걸쳐 도움을 요청했고, 전쟁당일부터 주한미국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대통령과 우리 정부의 입장을 밝히고 미국의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또 국군에게 당장 필요한 무기 및 탄약지원을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와 미국 대사 무초(John J. Muccio)를 통해 요청하여 지원을 받았는가하면, 전쟁 당시 단 한 대도 없던 전투기를 요청하여 한국공군이 운용하게 했고, 미국 군함을 구매하고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해군총장 손원일(孫元一) 제독에게 신속히 귀국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이승만은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여 필요한 전시조치를 취했고, 비상국회에 출석하여 필요한 입법을 요청했고, 군사지휘본부라고 할 육군본부와 치안의 총사령탑인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하여 현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으로 하여금 전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던 이범석(李範奭) 장군과 김홍일(金弘壹) 장군 등 군사원로들로부터 전시 타개책을 듣도록 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쉼 없이 토해냈다.
    이승만은 대전으로 내려가 있으면서도 한강시찰을 위해 방한(訪韓)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와의 회담을 위해 수원까지 올라와 한국사태의 해결을 위한 회담했다. 이후 그는 미국 대사관과 군 수뇌부의 상황 오판으로 부득이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7월 9일에야 대구로 올라와 있던 중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 결의안이 통과된 날로부터 1주일 뒤인 7월 14일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도 이승만은 건국 이후 늘 그랬듯이 주요한 국사(國事)는 혼자의 힘으로 해결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그와 상의하고 협의할 국제적 감각을 갖춘 역량 있는 국가적 동량(棟樑)이 없었다. 이승만을 상대할 국제정세를 꿰뚫고 이에 맞는 방책을 내놓을 능력 있는 인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인 이승만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정부수립이후부터 각료들의 무능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승만은 1949년 3월 경무대를 방문한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에게 “올리버 박사, 당신은 우리 정부가 아주 엉망인 것을 아실 거요?”라고 묻었다. 올리버 박사는 지체 없이 “네,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승만이 다시 올리버 박사에게, “두통거리는 장관들이 아무도 자기부처를 꾸려나가는 방법을 모르고 있소, 이 사람들이 조직이나 행정을 이해하지 못하오. 이 사람들은 돈을 너무 많이 쓰고 너무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며, 책임과 권한을 위임하는 방법도 이해 못하고 있소.”라며 하소연했다.
    그 중에서도 이승만은 가장 아끼던 임병직(林炳稷) 외무부장관에게 실망이 컸던 모양이다. 이승만은 직무와 관련하여 임병직 장관에게 “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자네를 친 아들처럼 생각하여 왔네. 내가 자네를 외무부장관으로 데려왔을 때, 나는 정부를 위해서나 자네 자신을 위해 하나의 큰 야심이 있었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네가 조지 워싱턴 내각의 해밀턴이나 제퍼슨처럼 하나의 위대한 장관으로 한국역사에 전해지는 것일세. 나를 좀 도와주게, 벤”하고 말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하지만 6·25전쟁이 났다고 해서 각료들의 능력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전시임에도 중요한 국사, 그 중에서도 외교안보와 관련된 문제, 특히 작전지휘권 이양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기까지의 행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 작전지휘권 이양의 작성 주체, 시기, 장소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이나 맥아더 사령관이 이를 수락한 서한은 남아 있으나, 그 과정에 대한 기록물은 흔치 않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기록에 대해서는 프란체스카의 영문일기가 남아 있고, 맥아더 장군의 6·25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회고록과 평전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이승만이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하여 논의할 수 있는 국내 인사는 제한적이었다. 더욱이 이는 군사문제이기 때문에 군 수뇌부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볼 때 이승만이 상대할 수 있는 주요 인사로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육해공군총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정일권(丁一權) 육군총장, 그리고 범위를 조금 확대하면 손원일 해군총장과 김정렬(金貞烈) 공군총장 정도였다. 그런데 당시 손원일 해군총장은 하와이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에서 구매한 구축함을 인솔해서 귀국 중에 있었고, 김정렬 공군총장은 여기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도 그럴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인사는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육해공군총사령관뿐이었다. 왜냐하면 신성모는 국무총리를 겸한데다 국방부장관이었고, 정일권은 3군을 통할하는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합참의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여기에 육군총장과 계엄사령관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그 당시 대한민국 군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그 때문인지 정일권 장군은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하여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남겨놓았다. 그의 회고록(『정일권회고록: 6·25비록 전쟁과 휴전』)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7월 13일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육해공군총사령관을 임시경무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북도지사 관저로 긴급히 불러, 영문으로 작성된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서한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구했다. 다음은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련된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 내용이다.

    “내가 대구로 내려 간 것은 7월 13일이었다.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정식 부임해 오는 워커 중장을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대구 동천비행장에서 간단한 영접행사가 있었다. 행사장으로 대구 경무대의 긴급지시가 날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흘 전인 7월 9일 부산에서 대구로 올라와 있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도 호출을 받았다. 李대통령은 관사에 도착한 申장관관 나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얼굴표정은 꽤 무거워 보였다. 申장관, 丁장군 잘 들어주시오. 李박사는 무겁게 입을 뗐다. 나는 오늘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나의 뜻이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李대통령은 흰 종이 두 장을 탁자위에 내놓았다. 잘 읽어보고 내가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申장관이 먼저 한 장을 짚어들었다. 나도 나머지 한 장을 들었다. 영문서한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보인 영문서한은 일본 동경에 있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서두는 이렇게 시작했다. 맥아더 장군 귀하, 대한민국을 위한 국제연합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서…나는 그 즉시 작전권이양에 관한 서한임을 알아차렸다. 사실 유엔안보리의 유엔군 창설 결의가 있은 직후부터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사이에는 작전지휘권 대한 협의가 진행됐다. 이러한 협의의 중간 역은 무초 주한미대사가 맡았다. 공산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해서는 유엔군의 작전지휘권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과 이에 따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도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기기로 한미 양국은 합의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언론인 출신으로 국회위원을 지낸 박실(朴實)은 그의 『한국외교비사』에서 정일권이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것과는 다른 주장을 내놓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각료들이 대구에 남아 있던 7월 중순, 이 박사는 부산 숙소에서 밤새 타이프와 씨름하며 한 동안 공한을 작성하고 있었다.
    유엔안보리가 7월 7일 한반도에서의 미군을 주축으로 한 참전국 군대의 통합사령부 결성을 결정하고 유엔기의 사용을 허가한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신속하게 전쟁수행을 위한 지휘계통을 확립했다.
    7월 8일 트루먼은 맥아더를 극동지역 미군 총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대구에 와서 작전지휘를 하던 워커 미8군사령관도 한국군과의 지휘계통의 확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같은 필요성에 직면하여 이 대통령은 한국군의 지휘권을 그의 존경하는 친우 맥아더 원수에게 이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동이 트는 새벽에야 편지를 완성했다. 무치오 대사가 가져온 초안을 검토한 후였다.”

    여기에서 정일권의 회고록과 다른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이승만이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서한을 부산에서 작성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초 대사가 가져온 초안을 이승만 대통령이 검토한 후 직접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언제, 어디에서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서신을 작성했을까?”이다. 이승만이 작전지휘권 이양의 서한을 작성할 일자는 아무리 빨라도 유엔안보리에서 7월 7일 유엔군사령부 설치 결의안이 통과되고 7월 8일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일 것이다. 정일권도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 창설직후부터 한미양국 정부가 작전지휘권 이양문제를 협의했다고 했다. 박실은 7월 중순 이승만이 부산에서 작성했다고 하면서 정확한 날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이승만이 작전지휘권 서한을 작성할 시기는 정일권이 회고하고 있는 것처럼 7월 8일 이후가 될 것이다.
    또 정일권과 박실은 이승만이 작전지휘권 이양의 서신을 작성 또는 이 문제를 협의하는데 있어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박실은 무초 대사가 준 초안을 검토한 후 이승만이 작성했다는 것이고, 정일권은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 창설 결의가 있은 직후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작전지휘권 대한 협의를 할 때 무초가 중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무초 대사의 행적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7월 7일 이후 이승만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승만은 7월 3일부터 부산에 있다가 7월 9일 오전 8시에 부산에서 대구의 경북지사 관사로 올라왔다. 이는 프란체스카의 영문일기와 미 국무부 외교문서철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주한 미국대사관의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 참사관은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부장관에게 7월 9일 오전 10시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7월 9일 오전 8시에 기차로 부산에서 대구로 갔고, 대전에 있던 무초 대사는 오후 6시에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대구로 와서 최근의 군사상황과 국제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서한을 쓸 수 있는 7월 7일과 7월 8일은 부산에 있었고, 7월 9일 오전 8시 이후부터는 대구에 있었다. 무초 대사는 7월 1일부터 대전에 있으면서 부산이나 대구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프란체스카 영문일기에 의하면 무초 대사가 7월 1일부터 7월 16일까지 부산 또는 대구로 이승만을 방문한 날짜는 7월 1일(부산), 7월 9일(대구), 7월 10일(대구), 7월 13일(대구), 7월 14일(대구), 7월 15일(대구), 7월 16일(대구)이었다.
    7월 7일 유엔안보리 결의부터 작전지휘권 이양한 날인 7월 14일까지 이승만과 무초가 만난 날은 7월 9일, 7월 10일, 7월 13일, 7월 14일뿐이다. 만약 정일권이나 박실의 주장처럼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무초가 어떤 역할을 했다면 7월 14일 작전지휘권 이양 날짜를 제외하면 3일뿐이다. 그런데 미국의 국무부 외교문서철이나 프란체스카 영문일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다만 프란체스카의 7월 14일자 영문일기에 의하면, “오후 6시에 국무회의가 열렸다. 정부가 대전에 남아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여러 가지 안건들이 처리됐다. 무초는 대통령에게 한국군을 맥아더 사령부의 지휘하에 두는 것을 생각해 봤는지를 물으면서 다른 국가들은 이미 그렇게 했고 그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란체스카 영문일기를 볼 때 이승만과 무초가 만난 7월 9일과 10일 그리고 13일에 이승만과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하여 논의했거나 협의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7월 14일 무초가 이승만에게 “한국군을 맥아더 사령부의 지휘 하에 두는 것을 생각해 봤느냐?”라고 물어본 점으로 볼 때 7월 14일 이전에 무초는 정일권이 주장한 것처럼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련하여 이승만과 논의를 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의견 교환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박실이 주장한 것처럼 무초가 초안한 내용을 검토한 후 작성했다는 것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 서한 작성에 관련해서 또 다른 증언이 있다.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장 미 고문관이었던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는 “[주한민군] 사령부가 대전에 가 있던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사령부에 위임했다. 그 위임명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하달됐으며 먼저 한국말로 된 것을 내가 영어로 번역해 대통령의 결재를 맡은 후 맥아더 사령부에 전달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유엔 결의에 의해 한국 전선에 뛰어든 모든 군대를 작전 지휘할 권한이 있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하우스만 증언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정일권 총장은 7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이 건네 준 영문으로 된 서한을 읽은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서한 작성은 무초 대사와 사전 논의는 있었을지 모르나 최종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으로 작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이승만이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는 이승만의 오랜 정치고문인 올리버 박사일 것이다. 그런데 올리버 박사에게도 이 문제를 상의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 관련 그의 저서에서 “7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현 전쟁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육해공군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양도한다“라고 결과만을 기술하고 있고, 7월 14일 이승만이 그에게 보낸 서한에도 이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않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결정은 순전히 이승만 대통령의 혼자만의 작품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작전지휘권 이양 서신을 7월 14일 언제 무초에게 건넸을까? 그것은 프란체스카의 영문일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프란체스카 영문일기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무초 대사에게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문서를 건네 준 것은 적어도 국무회의가 끝난 7월 14일 오후 6시 이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초가 7월 14일 오후 6시에 개최한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작전지휘권 이양을 고려해 보았느냐는 물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이때 국무회의에서 각료들에게 작전지휘권 이양을 밝히고 무초로 하여금 맥아더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작전지휘권 이양을 작성한 실제적인 장소도 부산보다는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대구에서 작성했을 개연성이 크다. 비록 박실이 부산에서 작성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국방조약집』(제1집)에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작전지휘권 이양 서한에도 부산이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는 7월 8일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이후 무초가 이승만을 최초로 만난 날은 7월 9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7월 9일이면 이승만은 이미 대구에 와 있었고, 작전지휘권을 이양한 7월 14일에도 그는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서한은 대구에서 작성했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 7일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가 통과되고 이어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미국정부의 지시를 받은 무초 대사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국군작전지휘권 이양에 대한 요청을 받고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고민하여 결정을 내린 후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된 내용을 직접 영문으로 작성하여 7월 13일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 정일권에게 미리 보여주고 의견을 구한 다음, 최종적으로 7월 14일 국무회의를 거친 후 무초 대사에게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Ⅳ. 왜 1950년 7월 14일 이양했는가, 시기적으로 적절했는가?

    유엔안보리가 1950년 7월 7일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하고, 그 권한을 미국에게 위임한 후 이와 관련된 조치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잘 짜여 진 시간표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듯한 인상을 갖기에 충분했다.
    유엔안보리로부터 유엔군사령부에 관련하여 권한을 위임받은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7월 8일 미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가 단일후보로 추천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元帥, General of the Army)를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 합참은 7월 10일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임명됐음을 통보했다.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데에는 미 군부에서의 추천도 있었지만 당시 미 국무부 고문이었던 덜레스(John F. Dulles)의 영향도 컸다. 덜레스가 한국에서의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아야 된다는 중요성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 할 때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에 적임자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다. 덜레스는 미 공화당원이면서도 민주당 정부에서 국무부 고문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 장군이 7월 12일 펜타곤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미국의 작전임무는 국제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6·25전쟁에 미국이 참가하고 있지만 그것은 유엔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참가하는 것이고, 전쟁은 유엔에 의해 지도되는 유엔의 전쟁이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또 맥아더 장군도 미국의 장군이지만, 유엔의 지도를 받는 유엔군사령관이라는 본분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어서 미 합참으로 하여금 유엔군사령부를 통제하여 한국에서의 전쟁을 지도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이른바 미국정부를 대신하여 한국에서의 전쟁수행을 총괄하는 군사지휘본부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미 합참은 한국에서의 전쟁전략을 수립하여 유엔군사령부에 지시하고, 유엔군사령부로부터는 전쟁 상황을 비롯하여 작전 전반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특히 유엔안보리에서는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할 때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유엔회원국은 자국의 국기와 함께 유엔기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유엔사무총장 리(Trygve Lie)는 상징적으로 유엔군사령부에 게양될 유엔기를 유엔주재 미국대표를 통해 미국 정부에 전달했고, 미국 정부는 육군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으로 하여금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유엔기를 전달하도록 했다. 이에 콜린스 육군총장이 유엔기를 전달하러 7월 14일에 일본 도쿄로 가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승만은 이런 타이밍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유엔기가 유엔군사령관에게 전달된 7월 14일, 바로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국대사 무초(John J. Muccio)를 통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유엔회원국이 아닌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의 자격을 얻게 됐고, 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싸울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유엔안보리가 규정한 북한의 국제평화 파괴 및 침략행위에 유엔군과 공동으로 대처하게 됐다. 이는 유엔의 전쟁에 대한민국은 전쟁의 직접 당사국이면서 유엔회원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전지휘권을 이양한 날인 7월 14일은 정치 및 군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이 날은 육해공군총사령부 겸 육군본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했고, 그 전날 유엔군지상군사령부 겸 미 제8군사령부도 대구에 설치됐다. 그런 의미에서 7월 14일은 유엔군작전이 대구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되는 상징적인 날이었다. 유엔사무총장은 유엔을 대표한 카친(Alfred G. Katzin) 대령을 7월 17일 대구로 보내 유엔군지상군사령관 겸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에게 유엔기를 전달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의 타이밍은 절묘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정치학자로서 그의 뛰어난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승만이 아니면 감히 생각할 수도 또 그렇게 정확히 타이밍을 맞춰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직 이승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시지도자로서 이승만의 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Ⅴ. 유엔은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7월 14일 주한미국대사 무초를 통해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국군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내용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이승만에게 이를 수락한다고 보낸 답신 서한은, 1950sus 7월 25일 유엔주재 미국대표에 의해 유엔사무총장에게 보고되어 유엔공식문서(Un Doc. S/1627)로 채택됐다.
      유엔공식문서에 의하면, 유엔주재 미국 대표 오스틴(Warren R. Austin)은 1950년 7월 25일 유엔사무총장에게 “유엔주재 미국대표는 사무총장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울러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간에 교환된 다음의 공한에 대해 안전보장이사회의 주의를 환기하도록 요청하는 영광을 가집니다.”라는 공한(Note)을 보냈다. 다음은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국군작전지휘권 이양에 관련하여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의 공한(公翰) 내용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에게 보낸 공한
    (전달 : 1950년 7월 15일)

    맥아더 장군 귀하
    대한민국을 위한 유엔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중인 국제연합의 모든 군대는 귀하의 통솔 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그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으로 임명되어 있음에 비추어,
    본인은 현 적대행위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이양(assign)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다.
    모든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귀하가 한국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한 기타 사령관이 행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 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존에 관한 비열한 공산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야 힘을 합친 유엔의 모든 군사권을 받고 있는 귀하의 전반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한 격려되는 바입니다.
    귀하에게 심후하고도 따뜻한 개인적인 경의를 표하나이다.
    1950년 7월 14일
    이승만

    주한미국대사를 통하여 이대통령에게 보낸 맥아더 원수의 공한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전달 : 1950년 7월 18일)

    대통령 각하
    현 적대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작전지휘권을 위임한 7월 14일부 귀하의 서신에 관한 맥아더 원수의 다음과 같은 회신을 전달함을 본관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7월 15일자 공한에 의하여 이대통령이 취하신 조치에 대하여 본관은 충심으로부터의 감사와 심심한 사의를 그에게 표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한국 내에서 작전 중인 유엔군의 통솔력은 반드시 증강될 것입니다. 용감무쌍한 대한민국 국군을 본관 지휘 하에 두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나이다. 이대통령의 본관에 대한 과도한 개인적 찬사에 대한 사의와 그에 대하여 본관이 또한 가지고 있는 존경의 뜻도 아울러 전달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우리의 장래가 고난하고 요원할지도 모르겠으나 종국적인 결과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므로 실망하시지 마시도록 그에게 전언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맥아더”

    본인의 변함없는 존경과 함께
    존 무초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14일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서한을 주한미국대사 무초를 통해 보냈으나 맥아더는 7월 15일 이를 받아보게 됐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을 받은 다음날인 7월 16일 이를 수락하는 내용의 서한을 7월 16일 작성하여 7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프란체스카의 영문일기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의 서신을 7월 18일 날 받아본 것이 아니라 7월 16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프란체스카의 영문일기에 7월 16일에 “무초가 한국군이 이제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리는 내용의 서한을 대통령에게 가져왔다(Muccio brought a letter from General MacArthur acknowledging that the Korean forces are now under his command.)”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맥아더의 회신에도 작성일이 7월 16일로 되어 있다.
    이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무초는 7월 14일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의 서한을 전문을 통해 도쿄의 맥아더에게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7월 14일과 7월 15일 무초는 일본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보낸 회신 내용도 7월 16일 전문으로 보낸 것을 무초가 워커 장군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고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프란체스카의 영문일기가 이를 정확히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맥아더의 회신 내용을 보면 먼저 머리말을 무초가 작성하고 그 뒤에 맥아더의 작전지휘권 이양과 관련한 회신내용이 인용문으로 처리되어 작성되어 있다. 말미에 서명도 맥아더가 먼저 되어 있고, 맨 나중에 다시 무초의 서명이 되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맥아더의 회신을 전문으로 받아서 다시 무초가 작성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리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작전지휘권 이양을 수락한다는 것을 알린 다음, 7월 17일 워커 미8군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이양했다. 


    Ⅵ. 이승만은 작전지휘권 이양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이승만은 작전지휘권을 넘겨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3일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총장에게 영문으로 된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내용을 보여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의견을 물었다. 이때의 상황이 정일권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신성모 장관에게  어떠한가? 라고 물었다. 신장관이 “각하 잘하신 결정입니다”라고 말하면서, “7월 7일 유엔안보리 결정으로 유엔군이 창설됐습니다. 또 유엔군의 총지휘를 맥아더에게 맡게 된 만큼 우리 국군도 그 산하에서 함께 싸우는 뜻에서 필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정일권 장군에게, “정장군도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정장군은 “예, 각하, 하오나…몇 가지 문제되는 점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있겠지, 나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네.”라고 말하면서, “어떤 점이 걱정되는가?”라고 물었다.
    정일권은 “예, 지휘권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우리 국군이 자체 편제라든지 인사문제는 절대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통령은 “옳은 말이오. 우리 국군은 어디까지나 우리 대한민국의 군대이니까.”라고 말했다.
    정장군이 다시 “우리 국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작전을 우리 뜻대로 없게 된다는 불편한 점을 각오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그러한 때가 있겠지, 그러나 이 중대한 때에 우리는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처지오. 그러니 그러한 불편을 겪더라도 그들의 작전을 원만히 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므로 이 결정을 내린 것이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언제라도 작전지휘권을 되찾아 올 것입니다. 이 점을 유의해서 앞으로 미군과 잘 협조하여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7월 14일 작전지휘권을 이양했지만, 우리 군의 고유한 인사권이나 편성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수행해 나갔고, 국가이익 및 민족의 생존에 관련된 문제나 작전에 대해서는 군 통수권자로서의 권한을 미국이나 유엔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과감히 행사했다. 이승만은 그런 점에서 전혀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행동했다.
    이승만은 정일권 총장이 우려했던 군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미군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 대령급 국장을 비롯하여 대령급 사단장을 대부분 장군으로 진급시켰고, 정일권 육군총장을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미8군사령관과 같은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그것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백선엽 총장을 미8군사령관보다 높은 대장으로 올렸다. 그래서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 후임으로 온 미8군사령관 테일러(Maxwell D. Taylor) 중장은 영접 나온 백선엽 대장의 계급장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이승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인사권 행사였다.
    특히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작전에 대해서도 유엔군이나 미군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사했다. 이승만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사령부에서 38도선 돌파명령을 내리지 않자, 9월 29일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로 내려가 정일권 총장에게 “내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10월 1, 38도선에 제일 먼저 도달한 국군 제3사단이 38도선을 돌파하게 됐다. 이승만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했다.
    또한 이승만은 전시에는 유엔군부사령관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여기에 국군 장성을 앉히려고 했다. 명분은 유엔군 작전을 협조하며 돕기 위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다운 발상이었다. 군의 편제상 사령관이 있으면 반드시 부사령관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에는 부사령관이 없었다. 이승만은 이것을 노렸다. 하지만 미국의 반대로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승만은 작전지휘권 이양을 계기로 국가와 군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거리낌 없이 수행해 나간 역량 있는 국가지도자였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작전지휘권 이양을 중요한 협상 카드로 활용했다. 특히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휴전정책을 추진해 휴전이 성사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켜 단독북진을 하겠다며 미국에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이에 워싱턴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우방국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도움을 주고 있는 대한민국 군대가 유엔군에서 철수하여 미국과 유엔이 추진하고 있는 휴전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올 경우, 미국의 국제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서의 지도력에 상처를 입는 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거기에다 공산국가는 이를 기회로 “도와주고 있는 한국도 통제하지 못한다”며 미국을 비아냥거리며 조롱거리로 삼을 것이 뻔했다. 실제로 반공포로석방 후 공산군 측은 미국에게 한국정부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런 미국을 어떻게 믿고 휴전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느냐며 비난했다.
    그렇게 될 경우 미국의 국제적 위신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도력은 추락되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이 점을 노렸다. 그는 전쟁초기 유엔회원국이 아닌 대한민국 군대를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우게 했던 작전지휘권 이양을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비장하면서도 유리한 카드로 활용했다. 이승만은 우리가 필요로 해서 준 전쟁초기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해 준 ‘작전지휘권 이양’이라는 카드를 미국과의 어려운 협상 때마다 매우 요긴하게 써 먹었다. 이른바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국군의 유엔군철수라는 카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도 크게 한몫했다.
    오죽했으면 이승만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은 한미상호방조약을 위한 세부사항을 합의한 1954년 11월 17일 ‘한미합의의사록’에,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 방위를 책임지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 하에 둔다(Retain ROK forces under the operational control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while that Command has responsibilities for the defense of the ROK)”고 못을 박았을까.
    이처럼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한민국이 하찮은 존재가 아닌 대등한 존재로서 임했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아주 당당하게 얻어냈다. 이승만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기준은 국가이익과 민족의 생존권이었다. 작전지휘권 이양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승만의 위대함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Ⅶ. 맺음말 : 작전지휘권 이양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승만에게 6·25전쟁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 마다 그는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생존권을 놓고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낙동강 전선과 중공군 개입 후 1·4후퇴라는 위기 속에서 미국의 해외망명정부 수립을 반대한 것이 그랬고, 한국정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협상에 반대하여 반공포로석방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놓은 것도 그랬고, 전후 보장 없는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유엔군에서 국군을 철수시켜 북진하겠다는 것도 그랬다. 그 중에서도 이승만의 나라를 구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가 바로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최대의 국가위기를 맞아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 이로써 그는 유엔회원국이 아닌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우게 했고, 국제평화를 지향하는 유엔헌장을 준수하게 했고, 북한의 남침을 국제평화의 파괴행위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창설된 유엔군사령부의 작전 효율성을 위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작성했음이 확인됐다. 그는 7월 7일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 창설을 결의하자 바로 작전지휘권 이양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불과 1주일만인 7월 14일 국군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이승만의 장점 중 하나인 결심하면 이를 빨리 추진시키는 것이었다. 작전지휘권 이양도 그랬다. 그 과정에서 그는 나올 수 있는 문제도 미리 고려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군을 대표하는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육해공군총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 이양 서한을 보여주고 의견을 구한 다음,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는 현명함도 보였다.

    이승만은 정일권 사령관이 우려했던 작전지휘권 이양에 따른 국군 인사권이나 국군 편성 그리고 국익에 반하는 작전의 제한이라는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끌고 나갔다. 이승만은 전쟁발발 당시 1성(준장) 또는 2성(소장) 장군의 각군 총장을 3성(중장) 장군을 넘어 4성(대장) 장군으로 임명함으로써 국군을 통제하는 미8군사령관보다 높게 때로는 같은 동급으로 만들었다. 인사권을 통해 군의 위상을 높이는 조치였다. 국방부 및 육군본부 국장급과 사단장들도 모두 장군으로 임명하는 인사권을 행사했다. 전쟁 중에도 이승만은 국군을 새롭게 창설하여 전쟁이전 없던 군단을 3개 군단으로 증편했고, 사단도 전쟁당시 8개 사단에서 16개 사단으로 증편해 나갔다. 이승만은 작전지휘권 이양을 통해 오히려 군 인사를 자주성을 갖고 했을 뿐만 아니라 군을 확장해 나갔다.

    특히 작전에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라고 우려했던 불안을 불식시키고 오히려 이승만은 인천상륙작전에 국군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고, 유엔군사령부에서 38도선 돌파명령을 내리지 않자 국군통수권자로서 38도선 돌파를 당당하게 명령했고, 미국의 휴전정책에 맞서 반공포로석방과 유엔군에서 국군철수를 앞세워 미국이 내키지 않아했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게 했다. 이로써 한미동맹이 결성되어 오늘날 대북억지전력의 한 축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렇듯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주권의 포기가 아니라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전후 대한민국이 살아 갈 수 있는 한미동맹의 촉매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에게 해(害)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던 작전지휘권 이양이 오히려 유엔군과의 작전을 효율성을 높이고, 대한민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살리는 역할을 했다. 또 이로 인해 국군의 전력증강을 도모하고 나아가 전후 대한민국이 살아갈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했다.

    특히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단순히 그의 국내 통치행위에 머물게 하지 않고, 작전지휘권 이양 문서가 유엔주재 미국대표를 통해 유엔의 정식문서로 채택되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침략행위를 재확인하게 하고, 대한민국이 유엔의 일원으로서 국제평화 유지를 위해 싸운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승만이 아니면 그 당시 아무도 작전지휘권을 이양할 수 없었고, 이양했더라도 그것을 통해 국가와 군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38도선 돌파나 반공포로석방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카드로 활용할 염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작전지휘권 이양은 전시 그의 통치행위 중 가장 뛰어난 업적 중의 하나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