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헬레스 교민회·駐필리핀 한국대사관 “사실과 달라…언론 왜곡보도에 정정 요구할 것”
  • 지난 17일 조선일보가 '단독보도'한 관련 기사. ⓒ조선닷컴 보도 캡쳐
    ▲ 지난 17일 조선일보가 '단독보도'한 관련 기사. ⓒ조선닷컴 보도 캡쳐

    필리핀 중부 앙헬레스시(市)에서 한국인 남성 8명이 현지 여성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필리핀 여론이 들끓고 있다. 한국 교민들은 필리핀 현지인의 보복을 걱정하며 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등 긴장하고 있다.


    지난 17일 오후 10시 28분 ‘조선일보’가 ‘단독’이라며 보도한 기사의 시작 부분이다.

    ‘조선일보’는 “한국인 남성 8명이 현지 여성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현지 TV보도를 전한 뒤 “하지만 피해 여성의 주장과 달리 한국인 남성의 집단 성폭행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뚜렷하지 않아 성폭행 주장의 진위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하루 뒤인 18일, 필리핀 TV의 보도 내용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정황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현지 한국 대사관과 필리핀 한인회의 노력으로 이 같은 내용이 허위로 드러난 것이다.

    조선일보는 17일 해당 기사에서 필리핀 최대 민영방송인 GMA가 15일 저녁 뉴스에서 보도한 내용을 인용했다.

    필리핀 TV방송사 GMA는 ‘자칭 피해자’인 필리핀 현지 여성 A씨(22세)가 채팅 사이트에서 알게 된 40대 한국인 이 모 씨를 14일 오후 10시 무렵 시내 레스토랑에서 만난 뒤 사건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필리핀 TV방송사는 “이후 A씨는 이 씨를 따라 옮긴 술집에서 이 씨를 기다리던 한국인 7명이 자신을 성추행했으며, 이 씨 등 8명의 한국인 남성이 술 취한 자신의 눈을 가리고 한인타운에 있는 프린스 호텔로 끌려가 성폭행 당했다”고 보도했다. 이 방송사는 “한국인 남성들이 반항하는 A씨의 다리에 담뱃불로 화상을 입혔다”고도 전했다.

  • 필리핀 방송사 GMA TV는 지난 15일 필리핀 여성의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앙헬레스 한인회 카페 캡쳐
    ▲ 필리핀 방송사 GMA TV는 지난 15일 필리핀 여성의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앙헬레스 한인회 카페 캡쳐


    필리핀 TV방송사의 보도는 A씨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단독보도’에서 필리핀 앙헬레스 한인회와 駐필리핀 한국 대사관의 이야기도 전했다. 하지만 보도가 나간 시점에서 앙헬레스 한인회의 ‘카페’와 외교부, 현지 대사관이 확인한 사실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대신 “필리핀 여론이 반한(反韓) 정서로까지 번질 양상을 보이자 앙헬레스가 위치한 중부 루손 지역 한인교민회는 ‘안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면서 페이스북 등에서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인을 향해 퍼부은 막말 등을 전했다.

    18일 외교부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조선일보’의 단독보도는 필리핀 TV의 보도에 너무 의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외교부에 따르면, ‘자칭 피해자’인 여성의 주장은 거의 ‘거짓’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피해여성’이 한국인 이 모 씨를 만났다는 술집의 CCTV 등을 확인한 결과 ‘집단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다른 한국인 7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 씨가 ‘피해여성’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강제로 끌고 갔다는 정황도 없었다는 것이다.

  • 2014년 1월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이 필리핀 경찰까지 낀 '한국인 대상 셋업 범죄조직' 검거에 대해 브리핑하는 모습.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14년 1월 24일 부산지방경찰청이 필리핀 경찰까지 낀 '한국인 대상 셋업 범죄조직' 검거에 대해 브리핑하는 모습.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선일보’가 “필리핀의 여론이 나빠질까 매우 우려 중”이라고 전한 필리핀 앙헬레스 한인회는 필리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숨어 있지 않고, 이 씨가 ‘셋업(Set Up, 함정) 범죄’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에서 술집과 호텔 등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증거를 확보했다.

    네이버에 있는 필리핀 앙헬레스 한인회의 ‘카페’에는 이와 관련된 글이 게재돼 있다. 해당 글을 보면 “필리핀 여성과 동석했던 다른 여성으로부터 집단 성폭행이 아니라는 증언도 확보했고, ‘피해자’라는 필리핀 여성이 입은 화상도 본인이 식당에서 실수해서 입은 것임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외교부가 駐필리핀 대사관에 확인한 데 따르면, ‘피해여성’은 고객인 이 씨가 자신이 요구하는 ‘바가지 요금’을 지불하지 않자 앙심을 품고선 ‘성폭행 범죄자’로 신고했다고 한다.

    현재 駐필리친 대사관과 앙헬레스 한인회 측은 ‘피해여성’과 이 씨가 만난 술집과 호텔 등의 CCTV 자료 등을 확보해 현지 경찰에 제공하는 한편, 필리핀 GMA 방송 측에 정정보도를 강력히 요청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조선일보’와는 달리 1시간 뒤부터 관련 기사를 보도한 연합뉴스, SBS 등은 사실 확인을 한 뒤 필리핀 여성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정황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는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조선일보’도 18일이 되어서야 駐필리핀 대사관과 앙헬레스 한인회 등을 인용해 ‘단독보도’와는 다른 방향의 보도를 내놓았다.

  • 조선일보는 다른 몇몇 대형언론과 함께 '다문화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조선닷컴 다문화 지지 기사 캡쳐
    ▲ 조선일보는 다른 몇몇 대형언론과 함께 '다문화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조선닷컴 다문화 지지 기사 캡쳐


    ‘조선일보’의 이번 ‘단독보도’는 다문화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평소 논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필리핀 현지 교민들은 GMA TV의 보도를 본 뒤 “혹시 한국인 이 씨가 필리핀 여성에게 ‘셋업 범죄’를 당한 게 아니냐”는 의혹부터 제기했다.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주로 대상으로 해 일어나는 ‘셋업 범죄’는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인을 범죄자로 만든 뒤 금품을 요구하는 악성범죄다. 한국인들이 체면을 중시하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습관이 있음을 파악한 필리핀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는 범죄다.

    특히 한국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자”며 유혹한 뒤에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필리핀 여성들의 ‘셋업 범죄’는 이미 인터넷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처럼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주로 ‘셋업 범죄’의 목표로 삼는다는 점은 2014년 9월 ‘추적 60분’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당시 ‘추적 60분’은 2014년 1월 관광도시 바가오와 2월 앙헬레스에서 한국인 남성이 필리핀 괴한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과 4월 앙헬레스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던 한국인 남성이 총격 피살된 사건, 한국인 여대생이 필리핀 괴한에게 납치돼 살해당한 사건 등을 전했다.

    ‘추적 60분’의 보도가 나오기 전에도 필리핀에서 은퇴 생활을 하려던 노년층이 현지 경찰이 꾸민 ‘셋업 범죄’에 걸려 패가망신을 당하거나, 한국인 범죄자와 조직을 구성한 필리핀 현지 조직이 한국인 여행객을 납치해 금품을 갈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2014년 9월 KBS '추적 60분'이 보도한 필리핀의 셋업 범죄 내막. 한국인을 주로 대상으로 한 악성범죄다. ⓒKBS2 '추적 60분' 방송화면 캡쳐
    ▲ 2014년 9월 KBS '추적 60분'이 보도한 필리핀의 셋업 범죄 내막. 한국인을 주로 대상으로 한 악성범죄다. ⓒKBS2 '추적 60분' 방송화면 캡쳐


    더 큰 문제는 이런 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필리핀 정부나 국민들은 한국인과 한국 정부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필리핀 출신 국회의원이 여당에서 상당한 입김을 발휘하고, 다문화 정책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조선일보’를 포함한 일부 언론이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에 매우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지 교민들은 필리핀 정부와 국민들에 대해 별로 좋은 평가를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특히 지난 10년 사이에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셋업 범죄’가 빈번하고, 필리핀으로 숨어든 한국인 강력 범죄자가 수백여 명이 넘음에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필리핀 정부에 대한 불신이 상당한 편이다.

    이번 ‘조선일보’의 단독보도는 이처럼 필리핀 현지 교민들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필리핀에 동정적인 논조를 지키려다 일어난 해프닝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