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욕의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까닭(?)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대해
    과연 한국인들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나 싶다.

    김필재   

    일본이 최근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 28곳의 세계문화유산을 등재했는데,
    이중 11곳이 일제시대 조선인들이 징용됐던 곳이라 한다.
  • 反日적인 한국언론은 일본이 등재 신청 과정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데 대해
    <일제 강제징용 현장이 세계문화유산?> 등의 제목을 붙여가며 열을 올리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일보>를 포함해 대다수 한국 언론은 지난 해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을 때 ‘쾌거’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모두 쌍수들어 환영을 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신해 장기 농성했던 곳이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과정에서 남한산성이 山城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왕궁이며, 이러한 왕궁이 丙子胡亂이라는 비상시국에서 경영된 사실을 내세웠다고 한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淸의 황제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면서 남한산성 왕궁 시대는 끝났지만
    바로 이 점이 세계유산으로서 가치를 평가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여기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를 얼마나 반겼을 지 눈에 선하다.

    한심한 김영삼 정부가 日帝의 잔재를 없앤답시고 중앙청을 헐어버린 것처럼 남한산성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인들이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뿐이다.
    중국은 왠지 무섭고 일본은 만만해 보여서라는 심리가 그 기저에 깔려 있는듯 하다.  

    치욕적 문화유산인 남한산성도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이런 마당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대해 과연 한국인들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나 싶다. 

    일본을 향해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말로 할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해야 할 것이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관련 글] 머리를 땅바닥에 9번 찧고도 '정신 못 차린 인조(仁祖)'
    '관념론'은 朝鮮사회 전반에 걸친 일종의 '정신질환'

    백성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朝鮮의 인조(仁祖)는 1637년 1월30일 淸나라에 항복하며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했다. 
     
    ‘三拜九敲頭禮’는 仁祖가 삼전도에서 淸나라 황제에게 했던 항복의 예(禮)로 '한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 것을 세 번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나야 하는데, 淸의 太宗(祖上은 新羅系)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 仁祖는 사실상 수십 번 머리를 부딪쳤다.
    결국 仁祖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됐다.

    仁祖는 淸나라 황제에게 ‘三拜九敲頭禮’를 하고서도 정신을 못 차렸다. 淸은 丙子胡亂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明나라 정벌에 필요한 지원군을 요청했다.

    일례로 1640년 淸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포사(砲士)가 징발됐는데, 당시 明나라와의 전투에 참전한 조선인 가운데 이사룡(李士龍)이란 인물이 있었다.

    李士龍은 지금의 요령성에 위치한 금주(錦州)에서 명장(明將) 조대수(祖大壽)와 對戰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明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공포(空砲)로 응전했다.

    그의 헛총질을 눈치 챈 淸軍은 이를 여러 차례에 걸쳐 충고했다. 그래도 고치지 않자 결국 李士龍을 죽여 버렸다. 첩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明軍은 ‘조선의사 이사룡’(朝鮮義士 李士龍)이라고 쓴 장대를 내걸어 軍의 사기를 돋우는데 이용했다.

    그러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던 인물은 淸軍도, 明軍도, 李士龍도 아닌 仁祖였다.

    仁祖는  李士龍의 죽음을 2년 뒤에 알게 되어 그를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제수하고, 후손을 찾아 벼슬을 주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속국(屬國)의 군졸로서 明나라 대장을 위해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세워 우뚝 동쪽 나라(朝鮮)의 빛이 되었으나 군졸이어서 포상의 은전을 내리지 못했다.》

    朝鮮의 ‘개혁군주’라는 正祖는 더 가관이었다.
    正祖는 1793년 ‘성주 포수 이사룡에게 증직하고 마을에 정표하는 교서(星州砲手李士龍贈職旌里敎 )’를 내렸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만약 이사룡의 행동이 없었다면 장차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예전에 당나라 위사(衛士)가 순절한 것을 주 부자(朱夫子, 주자)가 표창해 주었는데, 하물며 작은 나라(조선)의 군졸이 명나라를 위해 의리를 지키고 용맹함을 보여 우뚝하니 우리나라의 밝은 빛이 되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신분이 미천하여 아직까지 그를 표창하는 조치를 하지 못했으니, 어찌 풍속을 만들고 법도로 나아가게 하는 의리이겠는가? 성주의 포수 이사룡에게 특별히 성주목사를 증직하고, 지방관에게 그의 마을에 정표(旌表)하도록 하라. 그의 후손 가운데 벼슬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즉시 군문(軍門)에 등용하고 보고하도록 하라.》

    朝鮮의 왕들은 하나같이 中國이 원산지인 朱子學에 빠져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관념론은 朝鮮사회 전반에 걸친 일종의 ‘정신질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歷史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조선왕조실록》 仁祖 36권에 언급되어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내용.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 원년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