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⑲

    食水難 부산서의 李承晩,
    “나도 양치질은 매일, 세수는 이틀마다”

    서울 떠나며 남은 식량은 피난 못가는 시민들에게 나눠주라 지시.
    경무대 짐 대신 피난민을 태워 온 경호헌병의 용기를 치하.


    李東馥  
  • ▲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1951년 1월3일>  

    오전 9시에 서울비행장 활주로를 이륙할 비행기를 타려면 8시30분에는 경무대에서 출발해야 했다. 대통령은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시간을 지연시켜 보려고 공연히 이 일 저 일을 하려고 했다. 나는 슬픈 감정을 억제하면서 눈물을 감추노라고 애썼다.
    대통령과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서 경무대를 떠났다.   

    평양에서 철수할 때 군대에서 수송해 오기 어려운 양식을 소각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모든 쌀과 양식을 한 톨도 태워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 대신 남아 있는 양식을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주라고 지시했다. 서울에는 대략 10만에서 15만 명의 시민들이 남아 있게 될 것으로 추산되었다.
    대부분은 피난대열에 끼어들었다가는 도중에 세상을 뜰 것이 예상되는 고령의 노인들과
    차마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서울시가 비축하고 있는 곡식은 약 2만 섬이었다.   

    비행장의 활주로가 어찌나 번잡했던지 우리가 탄 비행기는 한 시간이나 지연된 끝에 이륙할 수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정오에 경남지사 관저에 도착했다. 또 다시 이곳을 대통령의 임시관저로 쓰게 되었다. 나는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라디오 방송은 적군이 서울 외곽지대에 들어 왔으며 적의 선봉은 이미 서울시내에 진입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 ▲ 서울 중앙청에 밀려 들어온 중공군.
    ▲ 서울 중앙청에 밀려 들어온 중공군.
    <1월4일>  

    무쵸 대사가 미국으로 귀국한 노블 박사 후임인 위더비 씨와 함께 대통령을 예방했다.
    무쵸 대사는 대통령에게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맹공격을 퍼부어 많은 병력을 살상(殺傷)하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무쵸 대사에게 “적에게 맹타(猛打)를 가하여 큰 손실을 강요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2천 명의 중공군을 죽였다는 것은 압록강을 건너서 끝없이 밀려들어 오는 중공군을 근원적으로 막지 않는 한 새발의 피일 뿐”이라고 말했다.   

    양성봉 경남지사는 이번에 경상남도로 내려온 피난민이 45만 명쯤 되는데 그 가운데 부산으로 들어온 피난민이 대략 25만 명쯤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양 지사는 특히 시급한 것이 피난민들의 용수(用水)와 식수난(食水難)이기 때문에 수도와 우물을 가진 부산시민들에게 동포애를 발휘하여 이웃은 물론 피난민들과 물을 나누어 쓰도록 호소하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나에게도 특별히 물을 더 절약하라고 당부하면서
     “나도 당장 내일 아침부터 양치질은 매일 하지만 세수는 이틀 걸러 한 번씩 하겠다”고 했다.   

    <1월5일>  

    오전 11시 부산시내 충무동시장 앞에서 양성봉 경남지사와 김 부산시장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토사수(國土死守)를 위해 100만 명을 무장시킬 것을 요구하는 부산시민 총궐기대회가 열려서 이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지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채택하여 유엔총회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기로 결의했다.   

    신 국방장관이 오전 11시 손원일 제독과 함께 와서 새로운 방위선을 구축하고자 애쓰는데 병력이 부족하다는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이제는 타이완(臺灣)의 국부군(國府軍)을 받아들여야 하겠다고 말하고 신 국방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무쵸 대사에게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무쵸 대사가 이에 대해 찬의(贊意)를 표명했기 때문에 대통령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지원해 줄 5만 명 또는 그 이상의 국부군을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무쵸 대사를 통하여 맥아더 장군에게 보냈다.   

    오후 늦게 민정시찰을 나간 대통령이 부산역 근방에서 얼굴과 코는 거무스름하게 그을었지만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피난민 부부가 8명이나 되는 그들의 자녀들 가운데 어린 것들을 들쳐 업은 위에 보따리를 둘러메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이 어디로 가느냐고 그 아버지에게 묻자 그는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도 별로 걱정하는 기색도 없이 경상북도 구미에 사는 사촌형네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 ▲ 1.4후퇴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들.
    ▲ 1.4후퇴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민들.
    올망졸망 따라가는 8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아무리 사촌형이라도 저 많은 아이들을 환영하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코끼리는 자기의 코가 아무리 길어도 짐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소개하면서 “이 친구는 참으로 행운아(幸運兒)야!”라고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젊은 날 옥중(獄中)에서 ‘빈대’라는 제목의 시를 지은 일이 있는 대통령은 남달리 자녀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다음은 대통령이 지은 ‘빈대’라는 제목의 시다.   

    <따뜻하면 기운을 펴고 추워지면 오무려서
    천장으로 바닥으로 오르내리는구나/
    하양 벽을 돌고 돌아 아롱을 찍고
    마루 틈을 헐어 보면 거기에 몰려 있네/
    모기와는 인연이 멀어 혼인을 하지 못하지만
    벼룩이나 이와는 곁방살이일세/
    너의 집은 어쩌다 복을 많이 받아
    백(百) 아들 천(千) 손자가 대(代)를 잇는구나>
  • ▲ 중공군의 대규모 침략으로 남한에 피난하려는 북한주민들이 흥남부두에 몰려들었다.
    ▲ 중공군의 대규모 침략으로 남한에 피난하려는 북한주민들이 흥남부두에 몰려들었다.
    우리가 떠나 온 뒤 신 국방장관이 미군으로부터 빌려 경무대 짐을 실어서 보낸 수송 트럭이
    저녁 때 부산 임시관저에 도착했는데 들어보니 도중에 사연(事緣)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제 오후 의자와 카펫 등 집기와 함께 창고에 있던 보리쌀 가마니들을 싣고 서울을 떠난 트럭은 도중 날이 저물어서 조치원의 어느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고 한다.
    배가 고프니까 여관에 부탁하여 식사도 하고 잠도 잤는데 일행 중에 돈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아침에 여관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밥값과 여관비로 싣고 오던 보리쌀을 몽땅 주었더니
    여관주인은 자신들도 피난을 가야 하는 처지여서 보리쌀은 받으나마나라고 영 달가워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조치원을 출발한 트럭에는 짐만 싣도록 되어 있었지만 경호실의 이선영 경사와 경호헌병은 짐 일부를 버리고 그 공간(空間)에 형편이 딱한 피난민들을 태운 뒤 카펫으로 덮어씌운 채 남행(南行)을 계속했던 모양이다. 이 트럭이 청도에서 미군헌병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경무대 짐과 함께 민간인을 태운 것은 지시 위반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곤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문하는 미군헌병이, 이 추운 겨울에, 웬 뱀 한 마리를 팔에 감고 있었다고 한다.   

    차에 타고 있던 경호헌병이 영어로 “이 차에는 우리나라 대통령 관저의 짐이 실려 있다”고 말했는데 미군헌병은 트럭의 짐이 워낙 볼품이 없어서 그랬던지 “누구를 놀리느냐”면서 팔에 감은 뱀을 우리 헌병에게 들이댔다는 것이다. 화가 난 우리 헌병이 카빈총 개머리판으로 그 미군헌병을 보기 좋게 후려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옥신각신이 벌어지자 미군 헌병장교가 달려 왔는데 우리 헌병은 체구는 자그마했지만 영어가 유창한데다가 어찌나 다부지고 조리있게 따졌던지 그 미군 헌병장교가 마침내 자기측 헌병의 과실이라고 인정하고 사과했다는 것이다. 트럭 속의 피난민은 발각되지 않은 채 무사히 경무대 짐과 함께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이 이야기를 보고받고 무척 기뻐했다. 경무대 짐 대신 피난민을 태워 오고 미군측의 사과를 받으면서 한국인의 체면을 세운 이 경호헌병의 용기를 치하하면서 통쾌해 마지않았다.   
  • ▲ 지방 주민들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 지방 주민들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1월7일>  

    대통령이 청년지도자들을 불러서 무장이 되든 안 되든 약 10만 명의 장정들을 원주로 보내서
    후방으로 침투하는 적군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들이 각자의 옷차림대로 원주로 간다면 우리 비행기들이 아군임을 식별하지 못하고 적군으로 오인(誤認)하여 폭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군부에서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약 7만5000명 분의 옷을 찾아냈는데 그래도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들이 신을 신발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군부에서는 시장에서 천으로 만든 작업화를 구입하여 신키기로 했다. 미군 쪽에서는 처음에는 이 방법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찬성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날씨는 추운데 땔감이 부족하여 피난민들이 고생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 역시 손가락에 동상(凍傷)이 생겨서 여러 곳이 부어올라 타이프를 치는데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보기는 평생에 이번이 처음이다. 대통령이 이것을 보고 마늘 껍질과 대를 삶은 물을 차게 해서 손발을 담그라고 했다. 나는 이같은 치료법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다.   

    <1월8일>  

    대통령은 애국적인 재정가(財政家)들의 총궐기와 특히 부녀자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은 서울을 떠나기 전에 받은 부산의 어느 애국동포의 편지 내용을 공개하면서
    모두 그와 같은 애국충정으로 어려운 국난을 타개하는 데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 애국동포는 편지 속에 500만 원짜리 수표를 동봉하여 보내면서 “정부가 가난한 이때에 1만 분의 1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적은 금액을 드립니다”라고 적어 보냈다. 이 동포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은 답장도 하지 못한 채 부산으로 내려 왔다.   

    나는 이 무명(無名)의 독지가(篤志家)가 남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은 아마도 여성일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대통령은 이 나라가 역사적으로 국난(國難)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겪을 때면, 여권(女權)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시기에도, 부녀자들의 협력과 활약이 컸었다면서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아서 왜적(倭賊)들을 격파한 ‘행주(幸州) 치마’의 고사(故事)와 국가재정이 도탄에 빠졌던 조선시대 말에 나라 빚을 갚기 위하여 남성들이 담배를 끊으며 모금운동을 벌이자 부녀자들이 손가락에 끼었던 가락지와 패물들을 내놓았던 일들을 실례(實例)로 들어주었다.   
  • ▲ 서울에 진입한 중공군 선전대.
    ▲ 서울에 진입한 중공군 선전대.
    미군들은 만약 이틀 동안의 여유만 있었으면 서울을 지켜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리지웨이 장군이 전선 전체를 재정비하려고 애썼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정일권 장군이 우리에게 보여준 지도를 아직 기억한다. 그 지도는 동부와 중부 전선 사이에 북쪽으로 뻥 뚫린 넓은 간격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원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기억한다.   

    미군고문관은 대통령에게 미군이 어떻게 적을 함정에 몰아넣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중부전선의 동쪽 끝을 가리키며 “만약 적이 이쪽으로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고문관들은 “그쪽으로 쳐들어 올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대통령은 그들에게 “만약 내가 당신들의 입장에 있다면 그런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후 적의 선봉부대는 실제로 대통령이 지적했던 대로 오대산(五臺山)의 높은 산줄기를 타고 중부전선 중심부를 향해 침투하여 유엔군 부대들을 양분(兩分)시켰다.   

    <1월9일>  

    오늘 아침 우리는 원주를 포기했다. 대통령은 즉시 대구로 가서 청년들을 만나보고 전국민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항하도록 해야 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국민 모두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각오로 다 함께 싸우자면서 “게릴라는 게릴라로 대항하고 인해전술은 인해전술로 막아내자”고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 ▲ 서울에 진입한 중공군 선전대.
    <1월10일>  

    오늘 오후 여성단체 대표들이 대통령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이들에게 “과자나 양말 등 군인들에게 당장 필요한 물품들을 만들어 지원해 주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후방에서 장병들을 적극 후원해 주어야 장병들의 사기가 진작되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쌀값이 계속 올라서 어려운 국민들의 생활고가 한층 심해지고 있다고 대통령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1·4 후퇴 이전 서울에서는 쌀값이 오르면 그것은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일종의 예보(豫報)로 받아들여졌었는데 이제 부산에서는 이와 반대로 쌀값이 오르면 그것은 쌀이 부족해지거나 돈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나쁜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통령은 우리와 이해를 달리 하는 외국 정치인들이 한국을 헐뜯는 발언을 할 때마다 입김으로 손가락 끝을 후후 불면서 “나는 국민이 떳떳하게 기를 펴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무슨 욕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1월11일>  

    “나라를 구하려고 온 나라가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고 있는 지금 일본으로 밀항(密航)하여 해외도피를 꾀하는 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다짐하고 “제주도 피난을 금지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외무부에는 일본행 여권(旅券) 신청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권력층과 부유층 인사들로 모두 그럴듯한 여행 이유를 만들어 온다고 한다. 외무부 류태하(柳泰夏) 정보국장은 대통령에게 외무부는 “공무 이외의 해외여행은 일체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단단히 고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유 국장에게 “서애(西厓) 선생 후예(後裔)답게 소신대로 하라”고 격려해주었다.
    대통령은 나에게 임진왜란 때의 훌륭한 재상(宰相)이었던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직계 자손인
    류태하 씨는 비록 일제 하에서 학교는 많이 다니지 못했지만 애국심과 긍지가 있는 젊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 ▲ 임진왜란때 거의 혼자서 국정을 운영했던 영의정 서애 류성룡.
    ▲ 임진왜란때 거의 혼자서 국정을 운영했던 영의정 서애 류성룡.
    쌀값 오르는 것을 걱정하는 대통령에게 김석관 교통장관이 “화차 900량이 확보되어 경북 지역의 양곡을 조속한 시일 안에 부산으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보고해 와서 우리는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묘령의 처녀 2명이 부산역에서 화차에 숨어 들어가서 전선으로 보낼 물자를 훔치다가 철도 경비원에 발각되어 경찰의 문초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두 처녀는 작년 12월29일부터 이같은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가 지난 2일 처음으로 경비원들에게 잡혔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생활고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비를 호소해서 일단 용서해 주었는데 같은 장소에서 또다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국민도의의 타락이야 말로 중공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라고 우려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대통령은 소년 시절 끼니를 굶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봉황(鳳凰)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죽순(竹筍)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굶을 줄 알아야 훌륭한 선비가 된다”·“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가정교육을 받았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그토록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 오는 동안에도 “조선 사람 특유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굽힘없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거듭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었다. 예부터 내려오는 이같은 극기(克己)의 정신을 슬기로운 한국의 부모들이 가정교육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심어줌으로써 건전한 국민도의가 지켜지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