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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존스턴 기자 “원폭 투하한다면 그 폭격기 태워달라”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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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췌) 계속]
<1950년12월22일자>
“뮬랜 씨에 대한 말씀인데요. 우리는 해외홍보를 담당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공보처장직을 맡았던 김활란 박사가 사임했습니다. 적임자가 없어서 대통령은 이철원 씨에게 다시 공보처장직을 맡겼습니다. 전쟁만 터지지 않았으면 이철원 씨는 그런대로 잘 해냈을 사람인데 워낙 좌절감을 느낀 탓인지 침울하고 비관적인 서울 주재 기자들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신기자들은 8군이 무료로 제공해준 호텔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서 무슨 기사를 써 보낼까 궁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군 당국은 그들을 통하여 하도 여러 번 군 기밀이 새 나가는 보안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무런 뉴스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외신기자들은 민간인이건, 누구건, 무슨 이야기를 해 주기 무섭게 받아서 기사를 쓰지요.
특히 경솔한 신문기자들일수록 그런 이야기를 잘 듣고 함부로 글을 쓰곤 합니다.
물론 그 외신기자들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딱하기도 하지요. 이 추운 나라에서 갈 곳도 없고,
그저 방에 들어앉아서 나쁜 소식이건, 좋은 소식이건,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니까요. 매일매일 그 같은 생활이 반복되고 있으니 무슨 좋은 결과가 있겠습니까?
연합군사령부는 그들이 한국에 오는 것을 막지는 않지만 그들을 지치게 하려고 은근히 골탕을 먹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철원 공보처장은 이러한 형편에서 ‘뉴스 사냥개’들의 표적 노릇을 해야 하니 딱합니다. 바로 그저께 무쵸 대사가 말하기를 뉴욕타임스의 존스턴 기자는 처음에는 한국에 우호적이었는데 이제는 정반대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경이 퍽 좋은 기자인데 형편이 나빠지자 아군에게는 해로운 존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결국 대구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군 당국에서는 존스턴 기자의 입국을 거부해 버렸다고 합니다.
한미협회(韓美協會)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미국의 여론을 우리 편에 서게 하려면 당연히 특별한 홍보 활동이 필요하겠지요.
한국은 더 많은 유력한 친구들을 가져야만 미국 국회의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귀하는 브랙 씨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 분이 한미협회를 시작하면 어떨는지요? 우리는 영어로 된 보고서나 성명서들을 읽고 수정하는 일을 도와줄 사람이 너무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12월23일>
“오전 11시30분 무쵸 대사가 대통령을 방문하여 국회의원들과 그 가족들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1주일 전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대통령은 20일에 있었던 국회 개회식 축사를 통하여 정부는 여기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서 어째서 정부의 요인들인 국회의원들이 서울을 떠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은 대한민국이 결사적인 각오로 싸우자는 요지였습니다.
그러나, 무쵸 대사는 정부의 대부분을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조언했습니다.
정오 쯤 무쵸 대사가 다시 와서 방금 전화 연락을 받았는데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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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과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 6.25전쟁중 전선을 시찰하며 대화하고 있는 모습.(1950년12월)
[일기는 12월23일부터 다시 일기체(日記体)로 복귀했다.]
대통령은 오후 3시반 미 8군사령부로 가서 특별실에 안치되어 있는 고 월튼 S. 워커 장군의 영전(靈前)에 조의(弔意)를 표하고 장군의 외아들 샘 심스 워커 대위를 위로했다.
대통령은 용감한 장군을 잃고 슬퍼하는 우리 국민을 대신하여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고
“한국과 자유세계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장군의 업적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찬양했다.
장군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영국군 27연대를 표창하러 가는 도중이었다고 한다.
의정부 근처에서 반대편으로부터 달려오던 트럭을 피하려다 장군이 탄 지프차가 전주(電柱)에
충돌했다. 지프차가 세 바퀴나 구르는 바람에 장군은 중상을 입고 곧 근처 야전병원으로 옮겼는데 애석하게도 아들 워커 대위가 도착하기 직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워커 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 대위는 최전방에서 싸우는 미 24사단에 배속되어 있다.
워커 장군은 24사단에도 들려서 표창장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자랑스런 아들과 사령관인 아버지가 같은 전장(戰場)에서 상봉하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비보(悲報)를 전해 들은 도쿄의 워커 장군 미망인이 얼마나
애통해 할까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워커 장군의 유해는 아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일 오전 10시 간단한 고별식을 가진 후 특별기편으로 김포 공항을 출발하여 도쿄를 거쳐서 미국으로 운구(運柩)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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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워커 장군과 아들 샘 워커(아래). 이 부자는 6.25전쟁에 함께 참전하여 싸우다가 아버지 먼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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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최고사령부는 워커 장군의 후임 미 8군사령관으로 매튜 B.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중장을 급히 임명했다. 은밀한 정보에 의하면 미국이 리지웨이 장군을 8군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맥아더 장군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어서 대통령이 은근히 염려하고 있다.
<12월24일>
내일이 크리스마스여서 우리는 예배를 보러 오전 11시 정동교회로 갔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예배당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난로 하나도 없이 너무 쓸쓸하고 황량했다. 손발이 꽁꽁 얼어서 감각이 없어질 만큼 추운 넓은 예배당 안에는 손가락으로 헤아려서 약 20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었다.
목회를 인도할 목사가 없어서 평신도 한 사람이 예배 순서를 진행했다.
그 신도의 설교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성경의 마태복은 10장29절을 봉독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참석했던 예배 중 가장 감명 깊게 기억에 새겨질 만큼 감동적인 예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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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청년시절부터 다니던 정동감리교회.
우리는 예배가 끝나기 전인 12시에 교회를 나와서 신성모 국방장관의 차로 의정부 방면의 전선 방문 길에 나섰다. 우리는 하루 전날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지점을 지나서 완전히 파괴된 의정부 외곽의 콜터 장군 사령부로 갔다. 트레일러 안에 마련된 콜더 장군의 사령부를 방문한 뒤 우리는 거기서 6마일 떨어진 한국군 6사단으로 갔다. 파출소 건물이었던 장도영(張都暎) 장군의 6사단장실에는 사단 장교들과 미 군사고문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콜터 장군은 젊고 유능한 장도영 장군을 많이 칭찬했다. 사단의 수석 군사고문관 피어슨 대령은 한국군과 잘 협력하고 있었으나 다른 3명의 하급 고문관들은 별로였다.
그들은 위스키가 왔느냐의 여부에 더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만약 위스키가 오지 않았으면 우선 그것부터 가서 가져와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 그 동안 진행된 전쟁에 참가했던 다른 미 군사고문관들처럼 자신들도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게 될 것인지를 물었다.
나는 워커 장군이 이미 표창장들을 준비하고 있었고 우선 처치 장군의 표창장을 전달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만일 워커 장군의 참변을 당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아마도 장군이 이 곳 군사고문단에게 표창장을 수여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더니 그들은 그들이 표창장을 받게 되리라는 소식에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6사단을 떠나 다시 의정부를 거쳐서 처치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는 미 24사단으로 갔다. 처치 장군은 6.25 전쟁 초기 임병직 장관에게 “우리가 1주일 안에 당신들을 서울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이다. 오늘 만난 처치 장군은 그때보다는 훨씬 전쟁에 익숙해 져 있었다.
저녁에 나는 친정 언니가 몇 가지 크리스마스 선물과 함께 보내준 작은 촛불 6개를 켜 놓았다.
언니의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참으로 어려운 고난을 이겨내고 있는 내 동생 페니(프란체스카 여사의 애칭)야, 하나님께서 하루속히 한국에 평화를 내려주시어 전쟁의 공포와 괴로움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구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태워서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는 촛불처럼 주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고 기쁜 성탄을 맞이하기 바란다. 새해에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대통령의 서재에 크리스마스 식탁을 꾸미고 대통령이 좋아 하는 동치미와 한국음식으로
오붓한 식사를 차렸다. 쟁반 위에 켜진 촛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고 미리 준비해 둔 대통령에게 필요할 선물(털장갑과 털양말)과 두 언니가 보내준 선물을 식탁 한 편에 쌓아 놓았다.
나는 대통령이 오늘 저녁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비극적인 전쟁을 잊어주기를 바랐다.
변변한 준비도 없이 이 추위를 견디어 내야 하는 우리 아이들과 부상병, 객지에서 떨고 있을 전재민들과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 그리고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남북의 동포들과 감옥 안에 있는 죄수들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을 당하는 애절한 모습들이 이 크리스마스 전야(前夜)에 잠시만이라도 대통령의 뇌리(腦裏)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대통령은 뉴욕에서 최용진 씨가 보내온 크리스마스 선물인 따뜻한 모포(毛布)로 감옥에 있는
병자들을 덮어주라고 의무실로 보냈다. 대통령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당신은 모를 것”이라면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은 젊어서 오랜 기간 감옥생활을 할 때 옥문(獄門)이 활짝 열려서 함께 있던 수감자(收監者)들이 한꺼번에 자유의 몸이 되어 나간 후 빈 감방에 홀로 외롭게 남아서 몇 달 동안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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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커 장군 후임 리지웨이 장군.
<12월25일>
우리는 <뉴욕타임스>의 존스턴 기자와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존스턴 기자는 상사(上司)에게 “한국 전쟁에서 원자탄을 사용하게 될 경우 첫 원자탄을 투하할 폭격기에 탑승하는 기자가 되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오후에 대통령의 종가 댁 종손이며 서당 친구였던 이병주 씨가 성탄절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찾아 왔다. 어려운 전시(戰時)인데도 대통령이 좋아 하는 약과와 인삼 세 뿌리였다. 대통령은 인삼은 다시 종이에 싸서 이병주 씨에게 돌려주면서 “이 인삼은 덕재를 주세”라고 말했다. 나는 혹시 병주 씨가 대통령의 말에 서운해 할 것이 걱정되어서 얼른 “의사가 대통령 체질에 우유와 인삼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대통령의 어린 시절 서당친구로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병주 씨와 덕재 씨 등 두 사람뿐이다.
건국 초기 덕재 씨가 대통령을 찾아 와서 두 분이 오랜 시간 회포(懷抱)를 푼 일이 있었다.
그때 덕재 씨가 “늘그막에 산삼이나 캐 먹게 고성군수를 시켜 달라”고 청을 했지만
대통령은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뒤 대통령은 덕재 씨의 아들을 경찰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시킨 뒤 경찰관으로 채용했었지만 서당친구의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못한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병주 씨가 가져온 인삼을 본 대통령이 그 미안한 생각으로 그 인삼을 덕재 씨에게 줄 생각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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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커 장군을 기념하여 이름 붙인 워커힐에 세워진 추모비.
<12월26일>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될 고 워커 장군은 죽기 전에 맥아더 장군에 의하여 대장 진급이 내신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성모 장관의 말에 의하면 사고 당시 워커 장군의 지프차는 미군 트럭이 아닌 우리 6사단 소속 스리쿼터와 충돌했으며 지프차는 장군이 직접 운전했다고 한다.
워커 장군도 대통령처럼 항상 과속 운전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자동차의 핸들을 잡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했다.
작전상 후퇴라고 하지만 대통령은 미국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으로부터 빠져 나갈 궁리만 하는 것 같다고 우려하고 있다. 리지웨이 장군이 어떠한 복안을 가지고 8군사령관에 부임하는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나는 리지웨이 장군이 어딘지 남다른 데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와는 반대로 대통령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도 별로 탐탁해 하지 않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