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네디도 감동시킨 5.16혁명

     이현표 논설위원 /전 워싱턴 문화원 원장

  •                                                   
                                              심연섭과 <술 맛 멋>

    세상에는 자기를 과시하며 떠들썩하게 살다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살다간 흔적을 돌아보노라면, 후자에서 보람 있고 알찬 삶의 자취를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대표적인 경우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1977년 7월 10일, 효문사(曉文社)라는 출판사가 발간한 <술. 멋. 맛>이라는 책이 있다.
     ‘주유만방기(酒遊萬邦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54년이라는 길지 않은 세월을 살다간
    심연섭(沈鍊燮, 1923~1977)이라는 분의 유고집이다. 

  •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의 외신부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과 1969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던 이색적인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가 1977년 3월 5일 설암(舌癌: tongue cancer)으로 타계한 것을 보면, “좋은 술을 그것도 건강을 해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취하는 것을 모토로 삼고 살아온 내가 아닌가?”라는 주장을 펴면서 인간과 신선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멋쟁이를 조물주가 퍽이나 시샘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잃은 동료들은 단순히 슬픔으로 그를 애도한 것이 아니었다.
    항상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너무도 인간적이고, 해학과 유머가 넘치며, 나라를 사랑했던 그를 위해 <술. 멋. 맛>이라는 책으로 친구를 기렸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해 그도, 1977년의 책도, 제목을 바꿔 2006년에 출간된 책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심연섭의 글에 나타난 나라사랑
    이 글에서는 <술. 멋. 맛>이라는 책의 내용 중에서 식생활과 관련된 부분이 아닌,
     나라사랑에 관한 부분을 몇 가지 인용해보고자 한다.

    심연섭 선생은 ‘역사의 기상’이란 제목의 글에서 우리 민족이 평화를 애호하고 안정 성향을 지녔지만, 일단 외침을 받았을 때는 일치단결해 물리치는 슬기를 가졌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북(北)의 아류배(亞流輩)들은 민족적 주체를 운위하지만,
    도대체 외세를 업은 그들이 민족 운운함이 가소롭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민족을 치지도외(置之度外: 도외시함)함이 특색이다.

    그들의 주체는 곧 한 개인에 대한 숭배를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외족(外族)의 세력을 업고 개인의 독재적인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그들에 비해,
    우리는 민족사적인 정통성을 갖고 민족적 명운을 계승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사적인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다.
    그 찬란했던 과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장래를 약속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발전의 함수’라는 글에서 소위 우리의 지성인조차도 우리 자신을 모르는 세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허드슨 연구소 소장이자, 미래학자인 허먼 칸(Herman Kahn, 1922-1983)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울산공업 센터 등 산업시찰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 옛 제자가 정부시책에 상당히 비판적인 투로 불평을 늘어놓자, 칸은 그 한국의 지식인더러 이렇게 묻더라는 것이다. 
  • ‘포항종합제철이나 현대조선소를 가보았나?’
    ‘준공된 이후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입을 닥치게나.’

    허먼 칸은 현대조선소를 나일강을 막은 아스완댐과 비교했다.
    한국의 근대화 작업에 있어서 현대조선소의 역할과 기능은 아스완댐을 훨씬 능가하리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그것을 제 눈으로 확인도 하지 않고, 왈가왈부하다니 무슨 잠꼬대냐는 칸 교수의 공박에 그 한국인 인텔리는 몸둘 곳을 모르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1969년 4월 28일, 충무공 424회 탄신일을 맞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고향 아산에 현충사가
    중건되고, 그 일대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성역으로 봉헌되자 그는 ‘성역’이라는 칼럼을 썼다.

    “박정희 대통령의 말마따나 ‘장군이 남긴 교훈을 받들어 조국의 현실을 타개하려는 우리의 결의와 노력을 다짐하기 위해서’ 민족단합의 구심점으로서 이 사당을 모시게 된 것이다. (중략) 충무공의 면모는 그 자신의 <난중일기>에서도 약여(躍如“ 눈앞에 생생함)하지만, 서애(西厓: 유성룡의 호)의 <징비록>에 더욱 소상하게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의 진린 제독이라는 자는 성격이 횡포해 타인과 협조가 안 되었다. 그가 남하할 때 선조 임금이 청파역까지 전송했다. 그때 나는 진린의 부하가 우리 수령의 목에 포승을 걸고 땅으로 끌고 다니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진린의 군대가 저 꼴이니 이순신이 패할 것은 뻔한 노릇이다.
    진린은 합류하면 지휘권을 빼앗으려고 할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명장이었다.
    그 횡포한 진린을 구슬려 심복(心腹: 마음속으로 순종함)케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진린이 도착하자 충무공은 큰 연회를 베풀어 명나라 장병들을 환대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40여개 적의 머리를 베어 진린의 공으로 보고했다.
    진린은 충무공이 전사한 것을 알고,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 끝으로 ‘한국의 마음’이라는 칼럼에서 심연섭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민족의 특성이란 개개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상반되는 두 가지 기질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영국 사람의 신사인 체하는 속물근성과 인도주의, 프랑스 사람의 합리주의와 센티멘탈리티, 일본사람의 실제성과 이상주의 등 상반된 양극의 요소들이 혼합돼 하나의 국민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마음’은? 허약 숭배의 소극성이 있지만, 때로는 3.1운동이나, 4.19, 5.16등에서처럼 격정폭발과 같은 적극성으로 보완되었기 때문에 민족의 운명이 오늘날까지 연면(連綿: 끊이지 않고 잇닿아 있음)하게 이어진 것이 아닐까?”
    5.16혁명이냐 5.16군사정변이냐?
  • 요즘을 사는 우리는 5.16에 대해 언어상의 혼란을 겪고 있다. 혁명, 쿠데타, 군사정변 등의 용어가 혼용되기 때문이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1961년부터 1994년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돼오던 용어다. 반면에 쿠데타는 주로 구미언론에서 사용돼 온 용어다. 

    그리고 쿠데타의 우리말 번역인 군사정변은 1996년부터 우리나라 중고교 국정교과서에서는 물론 일반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그것도 그해 어느 날 갑자기 혁명이 군사정변으로 된 것이 아니라, 1994년 교육부가 학계인사 31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 1종도서 편찬심의원회, 국가편찬위원회 등의 세 차례의 심의과정을 시안을 만든 것이다.

    과연 5.16은 혁명인가, 군사정변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매우 유익한 저술이 있다. 바로 심연섭 선생이 수행기자 신분으로 기록한 <朴議長訪美隨行記錄>(박 의장 방미수행기록, 1962년)이라는 책이다. 

  • 이 책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 성과를 담은 순방기록집이다.
    이 책이 흥미를 더하는 것은 박 의장이 심연섭 기자를 공식수행원에 포함시켜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술, 멋, 맛에 정통한 지성인이었던 심연섭 선생이 나라사랑하는 마음도 남달랐었음은 앞서 인용한 그의 글을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나라사랑 정신이 자기와 가족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소박하고 참된 지성인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1961년 5.16혁명 당시 동양통신 조사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그해 7월 친선사절단의 일원으로, 그리고 11월에는 박정희 의장을 수행해 미국을 방문했다. 

    심연섭 선생은 혁명 주체세력이 아니었지만, 혁명의 불가피성을 미국을 비롯한 우방에 설명하고, 지지를 얻어내 혁명정부의 국제적인 지위를 확립하고, 국내 혁명 과업의 완수를 기하려는데 팔을 걷어 부치고 발로 열심히 뛰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흔한 감투 한 번 쓰지 않고, 언론인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진정한 혁명 주체세력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영원한 혁명 동지며 친구였다. 

    <케네디도 반한 박정희>

    작년에 필자는 심연섭 선생이 집필한 <박 의장 방미수행기록>의 사진과 내용을 보완해서
     <케네디도 반한 박정희>라는 책을 엮어냈다.
     5.16혁명을 경험했든, 그러지 못했든 우리 현대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 역사적인 사건을 되새겨보기 위해서다. 아울러 박정희 대통령의 큰 영애가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케네디도 반한 박정희>라는 책을 새롭게 편집하면서 필자는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5.16혁명의 당위성을 설파했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책의 원저자인 심연섭 선생의 글을 중심으로 5.16혁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책의 머리말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우리 민족운동의 역사는 길다. 먼 옛날이야기는 그만두고라도 국운이 암담하여 나라와 민족이 일제에게 짓밟힌 이후 선열들의 눈부신 광복운동은 청사(靑史: 역사의 기록)에 빛나고 있다.
    그러나 5.16은 이전의 그러한 민족운동이 지니지 않았던 하나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로 사대주의 요소란 편린(片鱗: 한 조각의 비늘)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저 위대한 3.1운동조차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선언에 막연하나마 어떤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던가? 5.16은 달랐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맹방(盟邦)의 의사를 거역해가면서 이 군사혁명을 단행한 것이다.”

    대한민국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합중국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기로 결정된 것은 1961년 9월 12일이다. 이때부터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분주하게 출발준비가 진행됐다. 준비기간은 촉박했으나, 박 의장을 포함한 15명의 수행원은 11월 11일 방미 길에 올랐으며, 일본을 경유해 11월 13일 워싱턴에 도착해 존슨 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이튿날 아침 박정희 의장은 알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러스크 국무부장관과 회담한 다음, 오후 1시부터 케네디 대통령이 주최하는 오찬회에 참석했다. 케네디는 미국 관리들로부터 박 의장과 혁명정부 등 한국 정세에 대한 보고를 받았지만, 유럽의 동서독문제, 동남아의 라오스나 베트남 문제만큼 관심이 깊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는 물론 케네디 정부의 관심사에 대해서 철저히 연구를 했을 뿐 만 아니라, 방미 전에 친선사절단을 파견하고,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사령부를 통해서 부단히 혁명의 당위성과 혁명정부의 성과와 비전에 대한 홍보를 전개했다. 그 결과 방미 전에 케네디 정부가 혁명정부에 호감을 갖게 된 증거가 여럿 보인다. 

    그 중 하나가 박정희 의장의 방미 일주일전에 러스크 국무부장관 내외가 방한해서 박 의장 내외의 따뜻한 영접을 받은 것이다. 또 하나는 박 의장 방미 직전, 백악관과 국무무가 미국 측의 입장을 정리한 position paper에 당시 한국 군사정부를 ‘Revolutionary Government(혁명정부)’라고 공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결과 박정희 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은 첫 대면부터 화기애애했다. 오찬회에 들어가기 전에 케네디는 부인과 자식들에게 박 의장을 소개했으며, 오찬사에서도 “귀하가 이미 착수한 과업들은 인상적입니다. 귀하는 한국을 강력하고 민주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한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했습니다.”라고 박 의장에게 찬사를 보냈다.

  • 케네디를 감동시킨 박정희

    특히 케네디가 박정희 의장과 혁명정부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오찬회에 이어 진행된 제1차 정상회담에서다. 사실 박 의장은 이 회담에 모든 것을 걸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는 오찬회에서 자신을 수행한 외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케네디에게 베트남 사태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귀띔을 하게 했다. 오찬 후 정상회담이 시작되자마자, 케네디는 양측이 준비한 공식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던 베트남 사태부터 언급한다.

    “본인은 오늘 오찬을 함께 하면서 최 외무부장관과 베트남 상황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장관은 내게 어려운 베트남 위기를 해결하는데 나름대로 유익한 비망록을 작성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베트남의 붕괴를 막을 수 있을지 상당히 고심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조치는 미군 병력을 사용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해답은 베트남 국민이 외국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베트남 문제는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문제입니다. 박 의장께서는 베트남 사태에 관한 아이디어가 좀 있으십니까?”

    고대하던 질문이 나오자 박정희 의장은 치밀하게 준비해둔 답변을 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고 어려운 시기에 한국에 대해 지원을 해주시고 있는데 감사합니다. 이미 러스크 장관과 해밀턴 처장에게도 언급했듯이 본인은 미국이 지고 있는 무거운 부담을 잘 알고 있으며, 자유세계 국가들은 미국의 이런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세계 힘을 증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일 간의 화해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사태와 관련해서 한국은 단호한 반공국가로서 극동의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북베트남은 잘 훈련된 게릴라 병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런 형태의 게릴라전에 훌륭하게 대처할 10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규군으로 훈련받았으며, 지금은 각 부대에 분산·배치돼있습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한국은 이런 병력을 베트남에 파견하거나, 혹시 정규군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군을 모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치는 자유세계 국가들 사이의 단결을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오기 직전에 본인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과 이 문제를 토의했는데, 모두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군사보좌관들에게 본인의 이런 제의를 연구하도록 지시하고 본인에게 그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제일 가려운 곳의 하나를 긁어주는 박정희 의장의 답변에 케네디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좋은 제안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미국은 지금 동서독문제에서부터 지구촌 곳곳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본인은 맥나마라 장관과 얘기해 보겠습니다. 박 의장께서도 내일 맥나마라 장관, 렘니처 합참의장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필리핀 사람들과 이런 문제를 의논해 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겠네요. 프랑스인이 깨달은 것처럼 이 같은 상황에서 서양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 이후 정상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며, 케네디는 이튿날 예정에도 없던 제2차 정상회담을 하자고 즉석 제안했다. 제1차 박정희-케네디 정상회담은 박정희 의장 방미의 하일라이트이자 총론이었으며, 이후 일정은 각론이자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5.16 혁명의 당위성

    1961년 4월, 당시 우리나라의 행정수반이던 장면 총리는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미하기로 예정됐었다. 그런데 케네디는 그해 2월 말, 갑자기 장 총리의 방미 연기를 발표했다. 그리고 3개월 후 5.16 혁명이 일어났다. 케네디는 5.16혁명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까? 

    <케네디도 반한 박정희>는 박정희 의장이 케네디와의 제1차 정상회담 이틀 후, 미국 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 전문이 기록돼 있는데, 이 중에서 혁명의 당위성을 말한 부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본인은 혁명정부를 대표해서 군인으로서 야전에서 부대 장병들에게 하던 것과 같이 솔직담백하게 여러분과 같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여러분 미국인 못지않게 군정(軍政)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전우들과 본인은 군사혁명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입니다. 

    약 2년 전의 일입니다마는 우리 군인들 몇몇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정부 내의 주요 변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토의하기 시작했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군사혁명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인 작년 4월에 학생들이 이승만 폭정에 항거하여 영웅적으로 봉기함으로써 우리보다 먼저 거사했던 것입니다.

  • 우리 대신에 학생들이 혁명을 한 것을 다행히 생각하고 우리는 새로운 민간정부가 우리나라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등의 보람 없이 허정 과도정부의 몇 개월간이 지나갔으며, 또한 장면 정부의 허둥지둥하는 몇 달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이 급속히 악화돼갔습니다. 부패가 정부에 침투되고 심지어는 우리 군부까지도 좀먹어 들어갔다는 것을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사업가도 증회(贈賄: 뇌물을 줌) 없이 일을 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정부의 결정을 얻는데 있어서, 즉 관청 공문서에 서명을 받는 데까지 뇌물이 요구됐던 것입니다. 법정마저 공공연하게 매수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료주의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못할 정도로 비대해져 막심한 비능률성이 야기됐습니다.

    우리의 입법부는 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도외시하고 절망적으로 분열됐습니다. 경제 기타 입법이 시각을 다투어 요청되고 있을 때, 국회의원들은 합의를 보기는커녕 나라야 어찌 되든지 서로 헐뜯고만 있었습니다.

    국회, 노동단체, 신문 같은 공공기관이 민주주의의 방패로서 작용하는 대신에 우리의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동단체는 정치적인 악당(惡黨)으로 이용됐고 많은 신문이 매수되고 타락되고 또는 공산주의에 감염됐습니다. 경제는 극도로 쇠퇴하고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었습니다. 

    많지도 않은 우리의 생산 공장의 대부분이 생산능력의 몇 분지일밖에 가동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숫제 문을 닫았습니다. 빈곤은 나날이 심해지는 한편에 극소수의 특권자만이 거액의 재산을 축적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실업자 수는 무려 수백만에 달했습니다.

    계속적으로 풍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생활은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됐습니다. 본인도 농부의 아들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농민이 연간 100%에 달하는 이자를 물고 고리채업자의 마수에서 헤어날 희망도 없을 정도로 많은 부채를 지고 있는 궁경(窮境: 몹시 어려운 생활 형편)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망스럽고 위험천만한 것은 일부 층에서 주창한 북한 괴뢰와의 협상론이었습니다. ‘남북경제문화교류’ 또는 ‘남북연합국가론’ 이러한 등등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공산주의자의 농간이며 어떤 좌익분자들은 위법적으로 한미 경제협정이나 미국 기타 유엔군의 주둔을 반대하는 시위까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느낀 위협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직접적인 침략보다도 오히려 우리나라를 내부로부터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흉계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군부동지들은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달에 걸쳐 나는 10여 명의 혁명핵심세력을 확장시켜서 약 220명의 청렴하고 헌신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혁명의 기간세력(基幹勢力)을 확보했습니다. 5월 16일 미명(未明: 날이 밝지 않았을 때)을 기해서 우리는 서울로 진군해 요소를 장악했습니다. 저항은 극히 적었습니다. 유혈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약 30명의 고위 장교들로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여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긴급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정쟁을 일삼았던 입법부를 해산시켰지마는 내각은 그 형태와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긴급한 것은 우리 민족을 괴롭히던 부패와 부정을 뿌리 뽑는 일이었습니다. 신속하면서도 철저한 조사를 실시해서 우리는 부정축재와 매표행위를 하여 선거를 더럽힌 정치가와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내린 사법부에게 철퇴를 가했습니다.

    우리의 법정은 범법자들을 엄격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검찰은 주동자만을 기소했습니다. 기소됐어야 할 기타 사람들은 단지 견책을 당했을 뿐 그때그때 석방됐습니다. 결국 우리 국민은 우리가 놀라우리만큼 관대했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재빨리 모든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을 분쇄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학생들을 그릇 인도했던 좌익분자들이 공산주의 이념과 공산당의 제안에 영합함으로써 야기되는 위험성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학생들은 지금 그들의 본연의 임무가 가두시위가 아니고 미래의 참된 국민 또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 학업에 전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혁명외교 성공비결

    <케네디도 반한 박정희>에서 또 주목한 점은 박정희 의장과 혁명정부의 외교력이다.
     박정희 의장은 군인이었고 외교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와 혁명정부는 우리 외교사에서 빛나는 족적을 남겼다.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가 우리나라의 국력과 국격에 맞는 외교를 전개했다면, 박정희 혁명정부는 우리 국력과 국격 이상의 외교를 함으로써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대한민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나라가 되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외교란 주고받는 것이다. 그런데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나라의 경우, 흔히 일방적으로 많이 받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냉전 시대에 제3세계 국가들의 경우, 원조나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반대진영의 편이 되겠다는 협박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박정희 의장과 혁명정부는 달랐다. 1인당 국민 소득이 채 100불을 넘지 못하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의 대명사였던 우리였지만 당당했다. 우리가 미국을 도움을 받아 자유를 수호했듯이, 미국을 도와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1961년 11월 17일 뉴욕에서 외교협회가 주최한 오찬연성에서 박 의장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여러분, 미국 국민은 참으로 위대한 국민입니다. 혁명정부는 미국을 진실로 위대하게 만든 근면과 정직성에 대한 표본을 한국 국민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위대성은 땀과 투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국민에게 미국인처럼 국가적 관념을 충분히 흡수하고 국가이념을 성취하기 위해 국민이 강력한 의지를 행사할 때 신속하고 보람 있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 국민 여러분은 우리의 가장 친근하고 확고한 친우로서 한국이 열렬히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는데 큰 역할을 담당할 입장에 있다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 우리 양국이 전시와 평시에 맺어온 관계는 인류 역사에 아마도 유례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신임하고 신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신임과 신뢰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필요로 합니다.

    본인은 이 자리에서 혁명 이후 우리의 군기(軍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해졌고 사기는 더욱 왕성해졌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하고자 합니다. 공산군이 재차 침입해 오는 경우 우리는 자유세계 최전선의 한 보루로서 힘차게 싸울 것입니다.

    한미 양국 내에 여러분의 군사 및 경제원조의 운영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납세자의 돈이 조금이라도 낭비됐다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의 전우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한 협조자가 되기 위해 여러분의 원조를 정직하고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여러분 앞에 제시하려고 굳게 결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유 수호를 위해 남편과 아들, 그리고 동생을 우리의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주셨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오늘날 여러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피가 헛되지 않을 것임을 본인은 여러분 앞에 엄숙히 확언합니다. 여러분과 우리 국민 사이에 우호적인 이해와 협조가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꽃피어 만발할 것입니다.”

    ‘5.16은 정당성을 지닌 혁명’

    심연섭 선생은 <케네디도 반한 박정희>에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혁명초기에 맹방들로부터 나오던 ‘민주주의의 정상적인 궤도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비난을 점차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5.16군사혁명이 지닌 정당성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케네디의 박정희 의장 방미초청의 가장 커다란 의의는 혁명 초기에 있어서 자칫하면 양국 간에
    개재하기 쉬웠던 일절의 어두운 그림자와 회의(懷疑)를 불식하고 더 강력한 협조의 바탕을 세우는데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