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탈환, 감격의 연설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⑭

    李東馥   
  • "우리 자유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로 뭉치자"고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 "우리 자유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로 뭉치자"고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0년10월25일> 

일본방송에 의하면 유엔군 당국에서는 이미 민간행정관을 임명했으며
그는 다시 한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30명의 한국인을 임명했다는 발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관하여 전혀 아는 것이 없다.
이런 방향에서 최근 시도되고 있는 일은 내무장관 趙炳玉 박사를 민간행정관으로 임명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趙 박사는 내무장관 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사람들은 趙 박사가 그들이 해달라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
그를 좋아 하는 모양이다. 미국은 趙 박사가 軍政에도 참여했고 韓民黨이나 흥사단에도 관련된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하는 모양이다. 

무쵸 대사는 대통령이 유엔을 무시하겠다고 선언했음을 시사하는 미 국무성 전문(電文)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은 그 같은 성명을 발표한 일이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고 무쵸 대사에세 맥아더 장군이나 국무성으로부터 비밀로도 좋고 공개적으로도 좋으니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서 활약하는 데 간섭하지 않겠다는 어떠한 문서상의 보장을 받아달라고 요구했다.

대통령은 무쵸에게 대한민국의 통치권 행사를 남한 땅에 국한시키려는 유엔임시위원단의 결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는 이 같은 대통령의 요구에 가타부타 아무런 회답이 없다. 

대통령은 아무래도 우리 국민들에게 그가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할 이유를 밝혀야만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차라리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이라고 낙인찍힐지언정, 내부에 머무는 것보다는 정부 밖에서 싸우면서 다른 나라나 국제기구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나라를 팔아먹는 자가 되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대통령은 북한 주민은 심하게 외국 사람들을 의심하며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미국측에도 알려 주면서 대한민국이 만일 미국이나 유엔의 협력으로 북한에서 기능을 개시한다면 국민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게 될 것이지만, 미국이나 유엔이 단독으로 북한에서 행정을 실시하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오직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고 결코 용서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우리측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알고 있고 他 민족의 행정보다는 같은 민족의 행정을 훨씬 더 바라지 않겠느냐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다.

대통령은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생명을 바치면서 싸워서 없애려고 한 38선을 미국사람들이 부활시키려 한다면서 몹시 걱정하면서 유엔과 미국이 반한(反韓) 선동세력이 제의한 계획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일본 패망 이후 남한에서 미 軍政에 의하여 조성되었던 것과 비슷한 혼란상태를 북한에서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는 맥아더 장군과 워싱턴의 몇몇 고위층의 친지들이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시정되기를 기대했지만 국무성에서는 親日 및 親共 세력의 입김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맥아더 장군은 북한 처리 문제가 유엔에서 결정될 때까지 유엔군이 수복상태의
북한지역을 직접 통치하기로 한다는 作戰명령을 발표했다.

 대통령은 미국사람들이 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주민들을 관리해 나갈 것이고 그동안에 숨어있던 공산분자들이 곧 전원 돌아오게 되어서 북한 주민들이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고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면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마음속으로는 북한 동포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잠을 설치는 대통령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염치없게도 수마(睡魔)를 이겨내지 못하고 곤한 잠을 잤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담요 안으로 내 두 손을 밀어 넣는 바람에 나는 자다가 깜짝 놀라 깨었다.
평소에 대통령은 잠을 얌전하게 자야 한다면서 간혹 내 손이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주의를 줄 때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조심을 한다.
시집 온 후 남편이 잠 못 이루는 밤엔 비교적 자유롭게 자란 나로서는 이중으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워낙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남편이기에 나는 불만스러워도 늘 말없이 참고 지낸다.
부부가 살려면 누구나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해야
탈없이 지낼 수 있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시집오기 전에 특히 밖에서 활동하면서 괴롭고 아니꼬운 일을 참고 견디는
남편을 가정에서 아내가 감싸주지 않으면 자기 능령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이 단축된다고 단단히 일러주었었다.
  • 경무대(대툥령 관저)에서 바느칠 하는 이승만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 경무대(대툥령 관저)에서 바느칠 하는 이승만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전형적인 한국인 남편으로 나이 차이가 많은 대통령과 나는 사고방식이나 뜻이 맞지 않을 때가
    없지 않지만 어려운 생활여건 속에서도 늘 행복한 편이다.
    미국의 對韓 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강경한 자세가 우리나라 國益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모쪼록 맥아더 장군과는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란다.  

  • <10월26일> 

    참으로 고마운 우리의 이웃이며 우방인 타이완(臺灣)의 자유중국 정부가 우리에게 타이완쌀 1천톤과 석탄 8,500톤, 소금 3천톤, DDT 20톤 등 구호물자를 보내주어 부산항에 도착했다고 양성봉 경남 지사가 보고해 왔다. 양 지사가 타이완에서 온 쌀 한 말을 견본으로 경무대로 보내와서 저녁에 이 쌀로 밥을 지었는데 우리나라 쌀처럼 품질이 좋아서 밥맛이 좋다.
    대통령은 두부에 새우젓을 넣고 끌인 찌개와 함께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北進 중인 우리 국군이 곧 압록강에 도달할 것이라고 申 국방장관이 보고해 와서 대통령은 무척 기뻐하면서도 미 국무성의 석연치 않은 움직임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맥아더 장군의 낙하산 부대가 장군의 직접적인 작전지위 하에 숙천(肅川)과 순천(順川)에 낙하했는데 戰果가 신통치 않았다고 丁一權 참모총장이 보고했다.
     평양의 民政장교 아치볼드 멜콰이어 대령이 65세의 교육자인 임준덕 씨를 평양시장에 임명했다. 미군 당국은 또 해주시 행정관도 임명한다는 소식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동해안의 항구 도시 원산(元山)을 방문하려는 대통령이 미 제10군단을 지휘하는 앨먼드 장군에게 서면으로 원산방문 허가를 요청해야 한다고 한다. 동해안 쪽으로 北進했던 우리 국군이 미 제10군단보다 10여일 앞질러 원산을 점령하는 바람에 잔뜩 약이 오른 워커 장군의
    경쟁자 앨먼드 장군의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북한지역에 대한 우리의 행정권이 미치지 못하게 미 국무성과 유엔군이 방해를 하는 가운데
    지방주민들로 구성된 임시 치안대와 일부 주민들의 보복행위가 심해서 선량한 동포들까지 피해가 극심하다고 한다.

    대통령은 원산시민 환영대회에서 “통일을 목전에 둔 지금 과거에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 사상으로 저지른 죄과는 관용하고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돕고 사랑하며 일체 보복을 하지 말자”고 타이르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평양 쪽을 점령하고 있는 미 8군 장교들은 전투가 아직 진행 중인 동안은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삼가달라고 건의해 왔다. 그러나, 대통령은 평양방문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최단시일
    안에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다짐했다.  

    평양을 다녀온 김활란 공보처장의 보고에 의하면 소련대사관 근방에 집중된 평양시가지의 러시아 장교주택 창고에는 포도주와 보드카와 캐비어 같은 고급음식과 화장품이 값비싼 물건들과 함께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金日成)의 집무실도 스탈린(Joseph Stalin)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4개의 방을 거쳐 들어가야 하는데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양탄자와 값비싼 家具로 휘황찬란했고 거대하고 위압적이 마호가니 책상 앞쪽으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흉상이 놓여 있더라고 했다.
    김일성의 방공호 속에는 오르간이 있고 축음기가 갖추어진 음악실이 있으며 이발실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 이승만대통령 평양 입성 환영대회 현수막과 태극기를 건 평양시청에서 연설하는 이승만과 환영시민들들.
    ▲ 이승만대통령 평양 입성 환영대회 현수막과 태극기를 건 평양시청에서 연설하는 이승만과 환영시민들들.
    <10월30일> 

    대통령이 평양을 무사히 다녀와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반 경무대를 출발, 8시35분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신성모 국방장관, 김광섭 비서, 김장흥 총경, 이선근 대령 등이 수행했으며 공군의 김정렬(金貞烈) 장군이 경호비행을 했다. 동행하지 못한 나는 대통령이 돌아올 때까지 마음을 죄며 기다렸다.  
    바로 열흘 전까지 평양은 우리의 적인 공산당들의 아성(牙城)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통령의 안위(安危)가 몹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태극기를 손에 든 평양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시민들과 악수하며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바람에 수행했던 사람들과 丁一權 장군이 무척 애쓰고 혼이 난 모양이었다.
    신 국방장관은 물론 항상 느긋한 김광섭 비서도 대통령의 뜻하지 않았던 행동에 어찌나 놀랐던지 “목숨이 10년 이상 단축되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무기를 숨기고 있는 패잔병이나 적색 분자가 끼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 군중 속에서
     대통령에게 몰려 드는 군중 때문에 경호원들은 온 신경을 곤두 세우면서 식은 땀을 흘렸고
    김장흥 총경은 그저 무사하시기를 하나님께 빌었다고 했다.  
  • 국민을 사랑한 이승만대통령, 어디 가나 주민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경호팀이 진땀을 흘렸다.(사진은 거제도 방문).
    ▲ 국민을 사랑한 이승만대통령, 어디 가나 주민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경호팀이 진땀을 흘렸다.(사진은 거제도 방문).
    시청 발코니에 올라선 대통령에게 환영식장에 운집한 군중들이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환호를
    보내자 감격한 대통령은 긴 연설을 하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대통령이 연설했던 내용을 김광섭 비서가 적어서 가져왔다.  

    “우리는 단군의 후손으로 모두 형제요, 한 핏줄이나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

    한 덩어리로 굳게 뭉쳐서 공산당을 몰아내고 기어이 남북통일을 완수하여
    우리 삼천리강토에서 영원무궁토록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힘을 합쳐서 살아가자.
    우리는 고대로부터 독립된 나라이니 완전무결한 독립을 되찾아야 하며,
    죽을 수는 있어도 자유권을 포기할 수 없으며 더욱이 우리 민권의 자유만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피를 흘리며 싸워서 자유독립국을 세운 것이니
    어느 나라도 들어와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간섭 받을 이유도 없고 받지도 않을 것이다.
     남북 동포가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서 통일된 민족의 기상과 의지로
    내 나라를 만들어 새 생활을 하자. 모두 함께 生死를 함께 하며
    이 강토를 우리끼리 지켜야 할 것이니 과거의 잘못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
    이제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고 또 뭉쳐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4천년을 이어 내려온 한 혈족(血族)으로 아무리 어렵고 가난해도
    있는 것은 서로 나누어 쓰고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돕고 양보하여
    하나로 굳게 뭉치자.” 

    대통령은 모든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오후 1시35분 여의도 비행장에 안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대통령은 가슴에 넘치는 기쁨과 감격을 감추지 못한 채 순진한 소년처럼 흥분해 있었다. 대통령은 경무대 식구들에게 “이제 남북동포가 함께 모여 잘 살 수 있는 통일의 날이 머지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두루마기를 벗는 것을 도와주는 나에게 웃으면서 “평양에서 가져온 선물이 있다”고 했다. 나는 대통령이 손바닥에 슬며시 쥐어주는 작은 선물의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들여다보니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는 ‘이’였다.
    이 조그마한 손님은 대통령이 평양시민들과 함께 껴안고 반가워했을 때 대통령의 두루마기로
    올라 와서 옷깃에 숨어서 경무대까지 따라 온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