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의 반 역사성”총리 결재난 기획단장을 박원순으로 바꿔치기
  •  제주 4.3사건의 진실

               현길언 /제주대, 한양대 교수


  • 1. 1948년 4월 3일
     
     한국의 국토 남단에 자리잡은 따뜻한 땅, 사철 아름다운 풍광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자연의 평화로움을 몸으로 전해주는 제주도(濟州島). 그 섬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 기슭에 있는 여러 오름〔岳〕에서 봉화가 올랐다.

     이를 계기로 무장한 남로당 인민 유격대는 도내 12곳 경찰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였고, 5.10선거 관계자들을 비롯한 우익단체 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테러하는 피의 반란을 일으켰다. 38선 이남에서 남로당이 주도하여 조직적으로 일으킨 최초의 무장 반란이었다.

    이 후 계속되는 선거 방해로  북제주 2개 선거구가 투표자 미달로 선거 무효가 되었다.
    박헌영이 주도하는 남로당의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 투쟁은 제주에서만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사건이 한국의 주변지역 이 섬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가?
    지주와 소작인의 대립적인 관계나 노사 갈등도 상존하지 않는 이 땅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실험대가 되면서 주민들은 잔인한 피의 역사를 너무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2. 해방기의 제주 풍경

     전쟁은 끝났으나 제주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의 항복문 조인과 무장해제는 본토보다 늦어졌다.
     서울에서는 9월 9일 미군 중장 하지가 아베노부유키 조선 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그런데 제주 주둔군에 대한 항복 문서는 별도로 받게 되었다.

    9월28일에 미 제184보병연대 그린 대령은 일본군 사령부가 있는 제주농업학교에서 제58군단
     도야마 사령관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항복문서를 받은 그 시각에 무장 해제 팀이 도착해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패전 일본군 5만여 명은 10월 23일부터11월 12일까지 10차례에 걸쳐 미군 LST 편으로 송환되었다. 일본군에 배속되었던 1만 7천여 명의 한국 출신 병사와 노무자들은 이미 9월 초에 귀향했다. 일본군과 함께 일본 민간인 850여 명도 송환되었다.

     일본군 항복 이후 무장 해제가 될 때까지 일본군들의 행패가 심했다.
    군수 물자를 뒷거래했고, 주민들은 식량난에 허덕이는데, 군량미를 전량 소각해 버렸다.
    58군단은 약 4개월분의 군량미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이 수량은 제주도 주민 50일 동안의 식량이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제주는 평온하지 않았다. 

     전쟁을 피해 본토로 갔던 사람들과 돈벌이하러 일본으로 갔던 사람들이 귀향하기 시작했다.
     귀환 동포들은 귀국시 갖고 갈 물품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정작 고향에 돌아왔으나
    생활은 어려웠다. 일본에서 공장노동을 하면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노동 운동을 체험했고, 또한 보다 넓은 생활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다.
     
     징용에 나갔던 사람들과 징병으로 입대했던 청년들이 귀국했다.
    고향은 이들의 귀국은 반겨줄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경제사정은 열악했고 일터도 없었다.
    해방이 되었다는 그 감격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기대가 클수록 좌절감도 컸다.

    반면에 사회가 혼란된 기회를 이용하여 관리들과 결탁한 밀수꾼들이 늘었다.
    과도기인 군정 체제에서 무질서가 판을 쳤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횡포를 일삼았다.
    그 관리들 중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 체제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여전히 그들이 행정업무를 맡게 되면서, 일반 주민의 반일감정이 미군정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군정 당시 제주의 고급 관리들은 거의가 본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제주 실정에 어둡고 제주 문화나 관습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주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어서 주민들과의 관계도 원활하지 못했다. 

     마침 흉년이 들어서 식량난이 극심했고, 쌀 배급 과정에서 비리들이 드러나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또 전염병 호열자가 섬을 휩쓸면서 주민들은 더욱 불안했다.
    각 면사무소 마을에는 절간고무가 창고가 있었다.
    일제 때에 주정 원료로 쓰기 위해서 공출을 받았던 절간고무 저장창고인데,
    그 썩은 절간고구마를 배급받기 위해 창고 앞에 주민들이 늘어었다.  

      좌익계는 이러한 사회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에 지주계층이나 전통 양반 문벌이 형성되지 않은 제주사회에서 우익 세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층은 좌익 성향의 인사들과 일제 관료나 일제 산업 기관에서 종사했던 친 체제 사람들 그리고 각급 학교교원들이었다.
     그런데 교원들 중에는 좌익 세력에 치우친 사람이 많았다. 

     미군정 시기 제주지역의 정치 상황

     서울의 정치 상황은 하루가 지나면 다르게 변하는데, 제주는 섬이어서 그러한 변화에 빨리 대응하지 못했다. 일본군 송환이 본토보다 늦어짐에 따라 불안한 치안 상황이 길어졌다.
    그러한 와중에서 인민위원회가 치안을 안정시키는데 앞장섰다.

     건국준비위원회로 출발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각 읍면 마을까지 조직되었다.
    사람들은 이 기구가 해방 정국에서 실질적인 행정권한을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는 1946년 9월 10일에 각 읍 면 대표 100여 명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결성했다. 이 때 선출된 임원진들과 집행위원들은 제주 사회에서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이들의  성향은 민족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이었는데,
     그 중에 대부분이 후에 남로당의 주역이 되었다.

     중앙에서 건준은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극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온건 좌파와 우익 진영의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내분으로 좌익계열이 중심이 되어 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조직법안을 통과시킴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송남헌, 『해방3년사』, 까치,1985. pp,49-77.  

    . 이러한 중앙 정치 상황의 변화를 외면하고 제주에서는 자연스럽게 건준이 인공으로 개편되고
     인공 산하 인민위원회가 읍 면 마을까지 조직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당시에 좌우의 이념을 넘어 과도기 불안정한 치안을 안정시키고, 지역 행정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행정 권한을 그들이 임명한 읍 면장이 담당하도록 했다. 인민위원회는 치안과 교육 계몽 활동 등 주민을 통합하는 비 행정적이면서도 정치적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 그래서 지역의 현안은 읍 면장과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서로 협력하여 추진하기도 했다. 초기 인민위원회 읍 면 위원장 중에는 군정기 면장을 지낸 사람도 있었다. 

     인공은 중앙에서 공산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역 인민위원회의도 약화되었으나 제주에서는 여전히 지역 정치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각 지역 인민위원회 조직 대회에 경찰 지서장이 참석해서 축사를 했고, 군정에서도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제주의 정치 상황은 중앙과는 달랐다.  

     제주는 중앙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1946년 10월 사태에 제주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다. 1946년 10월 31일에 실시한 과도입법위원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좌익 세력은 거부했는데,
    제주에서는 인민위원회 간부 2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서울에 올라가서야 정국 사정을 파악하고 사퇴한다.( 입법위원에 당선된 문도배는 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의사인 김시탁은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당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주변부 지역의 정치 상황을 설명해주는 특징적인 사건이다.
     제주의 좌파가 중앙의 정세와는 달리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였다고 해석하지만, (4.3사건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2003. p,79.)
    (이후부터는 '위원회', '보고서'로 처리할 것임.)
     결국 이들도 중앙정치 상황에 따랐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주변지역의 특수한 정치 환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2. 3.1사건과 3.10총파업

     일제 강점기에 제주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주민을 계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 항일 운동가로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더구나 당시는 비록 군국주의시대라 할지라도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강했고,
    그것이 지식인의 양식처럼 생각하던 분위기였는데, 제주 지역도 다름이 없었다.

     해방이 되자, 이들은  공산주의자 또는 이상적인 사회주의자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귀환동포들 중에는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경험했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년들도 있었다.
    더구나 고향이 이들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 세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세력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들은 경험이나 지식으로 지역 사회의 중심  역할을 감당할 입장에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새로 설립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교원이 되었다. 

     해방 후에 1여 년 사이에 제주에는 각 면 단위로 중학교 과정인 고등공민학교나 중학원이 의식 있는 청년들이나 마을 주민이 주동이 되어 개교되었는데, 교원 자원이 필요했다.
    더구나 일본인 교원들이 송환됨으로 교원 자원은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중학교 과정을 졸업한 청년들은 초등학교 교원으로, 새로 설립된 중학교 교원이 되었다.
    이들은 정치적인 전환기를 맞아서 새로운 희망을 갖고 교육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 체제에 대한 동경으로 좌익세력에 동조했다.

      제주도에서 조선공산당이 조직된 것은 1945년 10월이었다.

    제주읍 한 민가에서 20 여명이 참석하여 결성했다.
    ( 결성 시기에 대해서는 이방운, 김봉현 등 여러 의견이 각각 다르다. 보고서,p,93.)
     당원 가입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모임에서  일제 강점기에 개별적으로 자기 사상을 유지해 왔던 사람들이 사상을 검증하는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지만, 그들의 세계관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 동안 조선 공산당원들과 그 조직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여러 번 전향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 검증은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제주도 위원회가 결성됨으로
    제주 공산당 핵심요원들의 실체를 서로 확인했고,
    이들이 합세하여 제주 좌파의 정치 활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제주도 공산당원은 1946년 말까지 1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보고서, p,93.)

     그런데 그 수에 관계없이 열정적인 당원 100명의 위력은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제주의 정치 환경에서는 대단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직체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중앙당이 좌파 3당을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면서, 그에 따라 1946년 12월에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로 개편하였다.
    위원장에 안세훈, 주요 당원으로서는 김유환 김은환 문도배 현호경 조몽구 오대진 김한정 이신호 이운방 김용해 김정노 김택수 문재진 부병훈 송태삼 이도백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제주사회에서는 지식인이면서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제주도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주요 임원들이었다.( 제주도 건준 출범 당시 도 위원장, 오대진, 부위원장 최남식. 총무부장 김정노, 치안부장 김한정, 산업주장 김용해.)
     이들 중에 부위원장을 제외한 모두는 공산당원이었다. 그리고 건준 집행위원인 김시택 김필원 김임길 이 원옥 조몽구 현호경 문도배 10명이었는데, 이 중에  조몽구 현호경 문도배가 공산당원이었고, 김시택도 입법위원에 선출되었다가 사퇴한 인민위원회 조천면 문예부장이었다.

    이렇게 초기 건준이나 그를 계승한 인민위원회는 공산당원이 중심 세력을 이루었다.

     남로당은 결성 이후부터 대중정당을 표방하여 당원 증원 운동을 전개하였고,
     제주읍 중심가에 간판을 내걸고 정치 세력화를 표면화했다.
    20명으로 시작한 남로당제주위원회(이후부터는 '당'으로)는 1947년 초에는 당원 수가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보고서, p,94)( 남로단 조직부원으로 활동하다가 전향한 김 생민의 증언(2001.7,13) 채록 당시 77세. 『보고서』각주,p,94 

     당은 당원의 확충을 위해 각 읍면 단위로 지역 사회에서 신망을 얻고 있는 청장년 지식 층, 주로 농회나 면사무소 서기, 초 중등학교의 교원들을 포섭 입당시켜 사상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당원 배가 운동을 통해서 당원을 충원하여 교육하고 선전함으로 남로당은 대중 정당이면서 제주사회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원들은 대부분 지역 사회와 직장에서 지도적 위치에서 일하는 인재들이었기 때문에 대중적 영향력도 컸다.

    그런데 이미 중앙에서는 남로당이 지하당으로만 활동하는 상황이었으나,
    제주에서는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세력을 확장한 남로당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정치 세력화하는데 성공한다. 좌익 세력은 1947년 벽두부터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조직을 마쳤고, 그 해 1월에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민청) 제주도 위원회를 창립했는데,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택수는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공산당원이었다.

    이 민청은 읍 면 단위까지 조직되었다. 중앙에서는 테러단체로 규정하여 그 활동이 제한되자 민애청으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제주도에서도 이에 따랐다.
    후에 제주 민애청은 4.3 사건의 인민 유격대의 중심 세력이 된다(보고서,p,95).
    이 외에도 부녀동맹이 결성되는 등, 남로당의 외곽조직들이 1947년 초에 이르러 전도적으로 확대 조직되었다.

      1947년에 1월 이후 읍면 단위로 민청과 부녀동맹, 농민위원회 등 좌익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 조직대회의 상황은 비슷했다. 임원 선출, 조직 강화, 계몽운동에 대한 토의가 있었고,
    박헌영 허헌 김일성 조희영 김택수 등 공산당과 남로당계 주요 인사들은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위원회,『제주 4.3사건 자료집 』(신문편) 1. (위원회, 2001) 1. pp,58-82.

     그런데 제주읍 민청 결성대회에서는 특별한 사항들을 처리했다.
    남조선 인민항쟁에 쓰러진 희생자에 대한 묵념, 박헌영을 비롯한 4인을 명예의장으로 추대,
    박헌영 체포령 철회 진정서 하지 중장에게 전달키로 하고, 목포 형무소에 수감 중인 강성렬에게 전서(傳書), 그리고 구금된 애국투사 즉시 석방 요구 메시지를 하지 중장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이어 강령을 채택하였고, 3.1절 기념행사 건이하여 주요 의제로 논의하였다.( 윗책, p,83.

     이어 2월 17일에 3.1절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 단체 등 각계 각층을 총망라한 인사 중에서 준비위원장을 비롯한 임원 위원 28명을 선정했다(자료집.2, p.83). 이 후에도 각 지역에서 민청 결성대회가 열렸다. 경찰에서는 3.1절 행사시 시위 금지를 공포하면서 3.1절기념준비위 해산을 명령했다.
      2월 23일에는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가 열렸는데,
    명예의장에 스탈린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 유영준 6씨를 추대했고,
     시국선언과 정세 보고가 있었다.
     그리고 3.1절 기념일을 앞두고 각 학교 대표자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1) 3.1절기념투쟁위원회와 보조를 같이한다.
     (2) 학교 별로 3.1투쟁 기념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3) 완전 독립을 위해서 투쟁을 계속하고 교원조합과 연대한다.

      3.1절 기념행사 준비위는 전도적으로 각 학교와 사회단체 각 지역 민청 민전 인민위원회 조직과 연대하여 치밀하게 주민 동원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 행사를 계기로 좌익계의 힘을 과시하면서 새로운 정치 국면을 시도했다. 
      행사 당일 제주도 각 지역에서 주민 3-4만 명이 제주읍내 중심지인 관덕정 광장 주위에 운집했다. 경찰은 이날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경찰 병력을 배치하고 기관총까지 설치했다. 행사를 마친 사람들이 시가행진을 하기 시작하자 경비경찰이 발포하게 되고, 이로 사람들이 죽고 여럿이 다치게 된다.  관련자 문책과 치안 책임자 퇴진 등 도민의 저항이 심해졌다.

    좌익 측에서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에 대한 책임을 따지면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 불상사가 도화선이 되어 3월 10일에 제주도청을 비롯한 전 관공서와 학교 기업체 공장 등 도내 166개 기관 (전체 기관의 95%)이 파업에 참여하였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렇게 3.1사건이 뒤를 이어 3.10총 파업 사태가 일어났다.
    경찰에서는 이 사건의 정치적 배후 세력을 주목하여 3.1절 기념행사와 3.10총파업 주동자들을 색출 체포 구금하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났다. 

     남로당은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대중의 저력을 응집하여 투쟁력을 강화하였다. 표면상으로는 3.1절 기념식 행사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야기된 도민의 순수한 저항이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러한 불상사가 아니었더라도 남로당은 3.1절을 계기로 그들의 정치 역량을 발휘하고 세력 확장을 도모하여 언젠가는 반란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1947년에 들어와서 각 지역 좌익단체를 조직하고 세력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3.1사건과 3.10 파업은 4.3사건의 전초전이 되었다.

      3.1사건이 단순한 기념행사에 따른 불상사에 그치지 않고 좌익이 의도한 정치 집회였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할 수 있다.
    3.10 총 파업 이후에 남로당이 각 면 마을 야체이카에 보낸 문건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건에 뒤따르는 여러 사태는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불상사에 대한 도민의 저항이 아니라,
     남로당의 투쟁 전략이었다.
     이 문건에는 그 당시 정세 분석과 3.1절 기념행사 시 투쟁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그것을 인민에게 교육, 선전 선동 강화하는 방법과 지시, 투쟁 실상, 총 파업에 대응한 농촌 및 가두 세포 활동에 대한 내용, 기타 파업 단합대회에 대한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는 3.1절 기념투쟁이 4.3사건의 전초전이었음을 확증시켜 준다.

    (이 자료는 제주대학 조성윤 교수가 현장 취재 시 입수한 것을 제주 4.3연구소에 기증한 것을
     제주4.3연구소에서 펴낸『제주항쟁』창간호(실천문학사,1991)에 게재하였다.(pp,161-211)

     도민의 소요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은 남로당의 전략이다.
    박헌영은 "1946.10의 민족적 저항을 모델로 삼아 그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노동당이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듯이(  존 메릴, p,175.
     제주 3.1사태와 3.10 파업은  당의 전략으로 이용가치가 충분했다.
    이렇게 당은 4.3 사건을 준비해 왔다. 

     남로당 중앙당은 28주년 3.1절 기념일을 계기로 무기 휴회로 들어간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 투쟁을 대대적으로 개최할 것을 각 지방 당에 지시했다.
    이 사실은 정부보고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보고서』, p103. 이 내용은  김남식, 『남로당 연구』,(돌베개 1984,pp,275-278)을 참고했다.

     이 지시에 의해 당은 전략대로 1947년 초부터 좌파 단체를 조직하고,
    이것은 다시 여러 조직과 연계해서 대규모 주민 동원에 성공하였고,
     예상치 않았던 불상사가 일어나면서 치안 담당자에 대한 도민의 저항이 완강하면서
    4.3의 전 단계 투쟁 전략은 성공하게 된다.
     더구나 3.10총파업에 성공함으로 더 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그에 따른 미군정과 경찰이 강력하게 대응하게 하는 계기가 되면서
    정국은 더욱 경직되고 혼란스러워졌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경찰은 '제주도 사람은 모두 좌익'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그것은 군정 산하의 모든 공공기관 특히 도청과 군청 면사무소 초등학교까지 파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고 마지막 사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민을 사상적으로 불신하게 된다.

    경찰에서는 막강한 남로당의 세력을 제압하고 치안의 안정을 위해서는 경찰력을 외부에서 충원할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일부 경찰관들도 파업에 동조했기 때문에 제주사람은 경찰관까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보고서, 122).
     군정당국과 치안 관계자들은 제주 파업은 남로당이 조직적으로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은 파업 관련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기 시작했고, 치안의 안정을 위해서 본토에서 경찰력을 차출하여 입도시킨다. 1947년 3월 말 경에 제주에 들어온 외부 경찰병력은 본도 경찰인원이 330명에 비해 90여 명이 많은 421명이나 되었다.(보고서, 122)
     외부에서 투입된 경찰관 중에서 파업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한 특별수사팀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물상사가 발생한다.
    응원경찰은 제주사람에 대하여 거의 ‘붉었다’는 편견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평소에 가졌던 주변지역 ‘섬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겹치면서 제주주민을 적대시하거나 하대하게 되면서 반 인권적인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사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경찰까지도 본도 출신자들을 배제했고, 도청 간부들까지도 파업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이 경직된 사태를 중재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남로당은 이 사태를 그들의 사상 투쟁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지령서를 각 지역 조직에 내보내었다. 

     이 파업 사태와 관련하여 검거된 자가 500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군정재판에 송치된 인원을 199명, 송치 예정자가 61명으로, 회부 건수는 260명이었다(보고서,p,127).( 제주신보, 1947.4.12.)  군정재판을 받은 자가 328명이었는데, 그 중 실형 선고가 52명, 집행유예 52명, 56명이 벌금형, 168명은 기소 유예 또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사태를 주도한 제주 민전 대표부에 대해서도 민전공동대표인 안세훈 만이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 벌금5,000원을 선고받았다(보고서, 128). 그 외 지도급 인사들은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나 경찰 당국에서는 단순히 파업 사태 관련자만 검거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에 좌익세력을 완전 제압하기 위해 검거를 계속했다. 3.1사건 이후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2,500명이 검거되었다(보고서,128).

     3.1 사건 이후도 경찰과 주민의 관계도 매우 경직되어 있어서 종종 서로 간에 불상사가 일어났다. 계속하여 좌익계 인사들을 색출하여 검거하는 과장에서 각 지역 주민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주모자로 의심받아 구속되기도 했다. 피검자가 가혹하게 취조받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이 남로당의 사주를 받고 연락책으로 활동하다가 검거되어 조사 과정에서 고문치사되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이러한 사태로 주민과 경찰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었는데,

    남로당에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좌익과 경찰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사회는 불안했고, 더구나 혼란기를 틈타 각종 비리와 부정이 늘어나면서 군정과 경찰에 대한 주민의 불신과 불만은 더해졌다.
     당은 지금까지 점조직으로 유지해왔던 당 조직이 당원들이 체포되고, 탈당자가 속출하면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남로당 탈당성명이 많이 발표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입당했다가 탈당하는 상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자료집.1.p,251)
     또한 중앙당은 소위 2.7투쟁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단선반대 투쟁에 정치적 사활을  걸고 있었다. 당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무장 반란을 일으킴으로 도민의 호응을 얻고 반란의 정당성도 확보하여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동안 조직하여 훈련해온 당원을 인민 유격대로 개편하고 무장시켜 반란을 준비했다.

     3.  무장 인민유격대의 반란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한 인민 유격대가 제주도 내 경찰관서 12곳을 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였고, 선거 관계자 및 우익 인사를 테러함으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날 유격대의 작전으로 양 측의 인명 피해는 지서 근무 중인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 인사와 그 가족 등 민간인 사망 8명, 부상 19명, 그리고 유격대원 사망2, 생포 1명이었다.

    이날 무장한 인민 유격대는 우익 인사를 매우 잔인하게 살해했고,
    지목했던 당사자가 없을 경우에 그 노모나 부인이나 어린 아이까지 대신 살해했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처음 있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유격대의 잔인성은 공산주의 혁명전사가 되기 위한 사상 교육의 결과였다.
    누구도 선거 관리 업무나 우익단체에서 활동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전술이었다. 

     이러한 테러는 계속되었다.
    유격대원들은 선거관리사무실을 습격하여 선거인명부를 탈취하거나, 선거 담당 요원과 공공기관 기관장들은 테러했다.(보고서,pp 206-210) 그래서 우익 인사들은 밤이면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피해 다녔다. 
    }
     남로당은 투표 당일에 주민의 투표권을 노골적으로 박탈했다.
    마을마다 조직적으로 투표를  방해했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마을에서는 선거 날 마을 행사를 구실로 주민들을 집단으로 마을 밖으로 내몰아 일체 투표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회유했다. 주민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껴 감히 투표할 수 없었다.

    이렇게 당은 마을에 따라 막강한 힘으로 주민을 압박했다.
    결국 북제주 갑.을 2개 선거구는 투표자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했던 미군정은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더구나 5.10선거 의해 새로 출범할 정부로서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정국 사정이 재선거할 분위기가 안 되어서 시행하지 못했다. 당으로서는 그들이 내세웠던 단선 단정 반대 명분이 도민으로부터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민으로서는 새 정부 탄생을 거부했다는 역사적인 멍에를 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인 변란이 왜 제주에서 일어났는가? 

     무장 반란의 목적은 반란의 주체인 당이 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 의해 밝힐 수 있다.

    첫째 무장 반란세력의 문서가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문서 자료는 2종이 있는데, 그 하나는 노획 문서( 문창송,『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 p,17. 이 책은 “濟州道人民遊擊隊 鬪爭報告書”라는 이름으로 인민유격대가 무장 반란에 대한 계획과 반란 이후의 활동 상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는 유격대장 이덕구가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가 토벌 과정에서 사살되자, 당시 경찰 간부였던 문 창송이 입수 보관하였다가 소책자로 발간했다. 영인된 원문은, 인민유격대의 활동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는 제1대 유격대장인 김달삼이 소지하였다가 그가 해주대회에 참가하면서 이 덕구에게 인계한 것 같다. 내용은 인민유격대의 조직 상황과 4차에 걸린 그 변모 상황과, 작전 투쟁 상황을 각  읍면 단위로 7월 말까지 기록했다. 내용 중에  9연대와의 관계는 4.3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인용시「노획문서」로 함.)로서『濟州道人民遊擊隊鬪爭報告書』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반란군이 제주도민에게 살포한 삐라이다.

     투쟁보고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록 내용들은 반란 주체의 입장에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 투쟁보고서에 반란의 목적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당은 1948년 3월 15일 경, 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에서 당 상임위원회를 개최하고
    무장 반란에 대한 문제를 장 시간 논의한 후에 13:7로 가결했다.  

      --기후(其後) 사태가 거익(去益) 악화됨을 간취(看取)한 도상위(島常委)는 3월 15일 도(道) 파견 “을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
     둘째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 구국투쟁(救國鬪爭)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도민(全島民)을 총궐기(總蹶起) 시키는 무장 반격전(反擊戰)을 기획 결정--

     이 문서는 4.3무장 반란의 목적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구국투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투쟁이고,
    이 반란을 계기로 전도민이 총 궐기시켜 무장 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즉 무장 반란으로 제주도 전역을 완전 장악할 것을 계획했다.
    당 중진들은 신중론을 폈으나 김달삼을 비롯한 청년당원들이 무장반란을 주장하여 결국 13:7로 가결되었다고 한다(보고서 158-159).
    당시 제주도 분위기와 국내 정세를 보아 당은 반란의 승산을 예측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이러한 남로당의 주장을 확대 해석해서 논의자의 입장에 대입시키고 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남로당원이었으나 반란 사건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의 글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 때 표면적인 예는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 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라는 것”(金奉鉉 金民柱,『 濟州島人民의武裝鬪爭史 』文友社, 1963. pp,84-85. 이 책의 필자인 김봉현은 제주읍 오현중학교 역사 교사로 재직하면서 제주민전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가 4.3이 일어나기 전 도일하였다.
     필자는 1993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그를 만나, 4.3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저서의 내용은 객과적 사실이기보다는 4.3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소 주관적으로 기술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김민주는 4.3당시에 조천 중학원 학생이었는데, 입산하여 소년 유격대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로당의 당론으로 결정한 반란 목적을 숙지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민족적 이념 지향적인 슬로건은 남로당이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언어에 불과하다.)이다.

    그런데 반란군의 공격 대상을 보더라도 그 목적은 5.10선거 반대에 치중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지서와 선거관리위원회 습격, 선거인명부를 탈취, 우익 인사 중에도 선거관련자와 그 가족 등이 유격대의 공격 대상이었다. 

     다음으로 유격대가 도민들에게 반란의 입장을 밝히고 적극 참여를 권유하는 삐라에서도
    그 반란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삐라는 2종인데, 하나는 경찰관과 우익청년단체 공무원들에게 주는 내용이다.
    “우리는 인민과 함께 있으니 경찰과 공무원과 우익 단체원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 배족도들을 물리치는데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도민들에게는 “우리가 오늘 일어난 것은 매국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1)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2)미제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해서
    (3)여러분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갚기 위해서 싸우고 있으니 함께 참여해 달라”는 것이다.( (1) (2)--는 필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것임.)

     이들의 주장은 민족 통일정부 수립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싸우자는 것이고,
    이 일을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미군과 그 앞잡이는 제거하자는 것이다.

     이 삐라에서 반란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국통일과 완전독립”에 있다.(보고서 168 수록 내용 재인용) 이 내용은 투쟁보고서의 목적과 일치한다.

     노획 문서에서 제시한 조직 수호와 “적당한 시간에 전도민(全島民)을 총궐기(總蹶起) 시키는 무장 반격전(反擊戰)을 기획 결정”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결국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 구국투쟁(救國鬪爭)을 위한 다는 것이다.

    노획문서나 삐라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국투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둘째로, 남로당 중앙위원회가 보낸 격려문과 이에 대한 당의 화답문에서도 반란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반란은 중앙당으로서는 정국 전환을 위해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보고서는 4.3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결정하여 실행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근거가 되는 자료로서 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서, 9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 문상길을 만났는데, 그가 중앙당이 지시가 없어서 참가할 수 없다고 한 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인민유격대 보고서는 서로 다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주 (13)에서는 프락치가 군 동원이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데, 문상길은 그것이 불가를 말했다면 그것은 두 세포간의 생각의 차이이다. 그러나 경비대 9연대가 이 반란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설사 4월 3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실행해야 할 투쟁 과제임에 틀림없다.
     남로당 중앙당의 입장에서 육지에서 일어난 투쟁이 거의 실패했음을 감안하면,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위해서 제주의 반란의 성공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공한다면 이 반란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으로 투쟁의 열기가 확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제주 투쟁에 대한 격려문
     친애하는 제주도 인민대중들이여! 조국해방의 전사들이여! 우리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조국의 통일과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미제국주의와 침략자 그 주구들이 음모하는 단선단정을 쳐부수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항쟁하는 여러분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끓는 형제적인 인사를 드립니다.--당신들은 오늘 위대한 조국해방의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장에는 구국의 뜨거운 피가 끓고 있으며, 여러분의 팔뚝은 영웅적 항행의 공격정신에 뛰고 있습니다.--우리는 반드시 숭리할 것이며, 또 승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승리를 확신하고 돌진합시다! 우리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여러분과 함께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용감하게 싸울 것입니다. 
     1.위대한 구국항쟁에 돌진하는 제주도 인민에게 승리와 영광을 드리자!
     2. 단선분쇄투쟁에 육탄돌격을 감행한 인민영웅들의 뒤를 따르자!
     3. 망국민족 침략으로부터 조국주권방어를 위한 구국인민항쟁만세!
     4. 통일적 민주주의 조선 완전자주독립만세!
       1948년 6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 黨 中央委員會 메시지에 答함

    --우리는 이 고귀한 메시지를 방방곡곡 모든 항쟁대열에 전하였으며, 또한 이미 원수들의 총칼에 쓰러진 존귀한 동지들과 인민영웅들의 무덤에 이 영광의 꽃다발을 드렸습니다. ----제주도 항쟁이 “조선인민의 모범적 항쟁이며”"우리조선민족의 영예와 불굴의 애국심을 전 세계에 선양하였으며, 따라서 “조선인민은 제국주의적 폭압과 학살로도 멸할 수 없는 것을 천하에 公示”하는 역할을 놓았다고 평가하여 주신 것은 과분의 명예로 생각함과 동시에 존귀한 지하의 영웅들과 항쟁하는 전사들의 의사를 대표하여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조국해방 투쟁사상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루는 영예를 실지에 관철할 것을 지표로 하여 망국멸족의 단선분쇄의 가열한 초소를 죽엄으로써 지킬 것이며, 통일독립을 우리의 손으로 전취할 때까지 과감히 투쟁할 것을 확언하고 맹세합니다..
     1.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만세!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노력인민」 제 113호(1948.11.7).  아라리연구회편,『제주민중항쟁』,(소나무,1988, pp,408-413에 재수록 된 것을 부분적으로 인용했음. 원문 한자를 한글로 표기했음.)
        

     이 메시지에서 중앙당이 추구하는 투쟁 목적과 방법은 당의 반란 목적과 일치한다.

     또한 중앙당이 38이남에 수립하려는 “통일적 민주주의 조선 완전 자주 독립국가”가 남로당제주도당이 추구하는 “통일독립국가”도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을 분명하다.
    그래서 중앙당은 제주 반란이 조선인민의 모범적 항쟁이기에, 육지 여러 지역에 일으킨 반란이 큰 성과를 얻지 못 한 당시 실정에 비추어 매우 성공적이고 고무적인 사례로 평가하였다. 

      셋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대의원 선출 지하 선거에서 제주도민 85%가 투표에 참가한 사실에서 반란의 목적이 분명하다.
    유엔 감시 하에 자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5.10선거를 온갖 회유와 협박과 조직적인 방해 공작으로 거부한 의도도 분명하다. 지하선거에서 도민들은 (당이 획책한 부정과 불법 선거였지만) 사정도 잘 모르고 소위 도장 찍기 투표를 했지만, 이렇게 도민을 동원하여 불법 선거를 치른 당의 의도는 반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미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남한 농촌의 4분지 1이 투표에 참가했으나, 이 중에 5%만이 남쪽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정부 수립을 위하여 선거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투표에 참가하였다. -- 제주도에서는 85%주민이 투표하였다.” 존 R 메릴/신성환옮김,『침략인가, 해방인가』(과학사상사, 1988),P,178.

      그들은 5.10 선거가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가로막는 단독 선거라고 선전하여 투표를 거부하였는데, 이 지하선거에 적극 참여함으로 그 통일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이들은 그러한 정치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포섭하여 세뇌 교육을 시켜 남로당의 동조자로 만들어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남로당 측이 원하는 통일정부가 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은 당시 정세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38이북에서는 소련의 의도대로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김일성은 전략적으로 남한의 정치 세력을 분란시키기 위해서 성사가 안 될 남북협상을 꾸준히 제의했다. 이것이 남로당으로 하여금 단선정부 수립 반대 명분을 세워준 것이다.
    38이남에서 남로당은 인민의 투쟁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외세인 미국의 내정 간섭 거부, 혼란기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 친일세력 청산 등 조선 인민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전략을 썼다. 제주 반란의 주역은 그들의 폭력적 반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러한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무장 반란은 중앙당의 지시에 의해서였는가. 당 자체인 결단이었던가? 

     4. 반란의 결정과 유격대의 병력 규모 

     이 발란은 중앙당의 지시에 의해서 반란 날자만 당에서 결정했는지 여부가 4.3 사건을 논의하는 입장에서는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보고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자체적으로 결정했다고 주장한다(보고서,pp,162-165).  
     4.3 사건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입장에서는 당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미를 둔다. 이 반란의 정치적 의도를 뒤로 미뤄두고 통일정부에 대한 도민의 열망과 외세와 불의와 부정에 대한 저항에서 민족적 민주시민으로서 정당한 투쟁이므로 당이 제주도민의 뜻에 부응하여 독자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한 대로, 반란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더구나 이 반란 목적이 중앙당의 투쟁 노선과 일치하며, 제주도에서 이러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중앙당에서도 기대했던 것이다. 중앙당은 2·7폭동을 준비하면서 당에서도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켜 총선거와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주한 미 971방첩대 격주간보고서, 1948. 2. 15, 주한 미 제6사단 일일정보보고서, 1948. 2. 12~13. 보고서에서 재 인용.

     중앙당은 2·7폭동이 별 성과 없이 끝나자 조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당에 사람(이재복, 조경순)을 보내어 ‘폭동을 일으켜서 단선·단정을 강력히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렸는데, 이 지령은 위원장 안세훈이 경찰에 피검중이어서 조직부장 김달삼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당시 당원으로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가 전향한 자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남로당원이었던 이운방 김생진에 의하면, 반란 지도부에서는 반란의 승산을 전략적으로 예측했다고 증언했다.『4.3보고서』,pp,159-160. 

     또한 유격대원으로 참가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한국인도, 반란이 일어나 6개월이면 제주도가 해방구가 될 것이고, 본토 군대가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재일 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증언.(보고서, 159)
     사태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전망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도 상임위회에서 충분히 논의하는 과정에서 얻은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전 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 반격전을 기획결정”했다는 점에서 이 반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전초적인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반란의 주체인 당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해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거부한 반란임이 분명하다. 중앙당의 지시와 관계없이 남조선 혁명의 단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보고서는 이 반란이 중앙당의 지시 없이 남로당제주도당 자체의 결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4.3사건은 민족적 자주적 사회적 도민 저항 운동으로 의미를 부여하려고 의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건을 단순화함으로 당시 제주의 정치 사회 상황에 대한 도민의 정의로운 ‘저항적 운동’ 차원으로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인 인민유격대의 규모는 어떠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반란의 주체 측과 이를 진압하는 측에서 입장이 다르다. 양측의 의도는 사실의 해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이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보고서는 약 500명 내외로 추산하였다. 이 중에 200은 정식 무장대원이고, 나머지는 칼과 창으로 무장한 보조대원이라고 추측했다(보고서, 175). 그런데 노획문서에서 유격대의 조직상황과 규모(세력)를 파악할 수 있다.

      1차로 조직은 유격대 100명, 이를 돕는 자위대 200명, 특수 목적을 수행하는 특경대 20명 등 합계 320명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무기는 99식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 전부였다. 이후에 5차에 걸쳐서 조직을 정비하였다. 5차 조직 정비는 6월 18일에 착수하여 7월 15일에 완료했는데, 병력은 각급 지도부 35명, 통신대 34명, 유격대 120명, 특무대 312으로 모두 501명이었다. 특무대원이 15배 정도로 증가했고, 병기도 많아졌다. M1 소총 6정, 칼빙소총 19정, 99식소총(일본식) 117정, 44식(일본식) 4정, 30년식(일본식) 2정 모두 147정으로 1차 때에 권총을 합하여 30정에 불과했던 것에 비교하면, 5배 정도 많이 확보했다. 소총탄환으로는 M1탄환이 1,396발, 칼빙 1912발, 99식 3711발, 44식(30식) 721발 등 모두 7,740발, 경기관총 1정, 척탄통 2문, 수류탄 43발, 다이너마이트 69발, 신호탄 2개, 군도(軍刀) 16정, 권총 (6연발) 1, 권총(8연발) 6정, 권총 10연발(1정) 모두 8정, 이러한 무기 소지 상황을 보면, 1차 때보다는 병력이 강화되었다.

     인민유격대의 조직이 튼튼해지고, 무기와 탄환을 많이 확보한 것은 반란을 일으킨 후에 진압군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장기전에 대비해서 조직을 계속 정비하면서 전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직에서 통신대와 특무대 인원이 증원된 것은 작전의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특무대의 임무는 정부 수집, 개인 테러, 작전 활동에 필요한 보급 원조 등이다. 특무대는 각 면에 특무대장 1명과 연락원 수명을 두며, 그 외 3인이 1분대, 10명으로 1소대를 편성하고, 부락마다 1-2인인 정도로 조직하되, 특무대원은 세포로부터 제외한다고 했다. 이 특무대는 각 면 각 부락에 주둔하되 지대 지도부 통신대 각 유격대 소대는 지대 지도부 중심으로 밀집 생활하다고 규정하고 있다.(노획문서, 28-29) 이렇듯이 유격대의 활동에 있어서 정보 수집, 개인 테러, 보급품 조달이 중요했으며, 이를 원활하게 살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한 것이다.

      또한 병기 확보 량이 증가한 것은 국방경비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노획문서에 따르면 군부대로부터 지원을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군부대를 탈주하여 유격대에 합류한 병력이 48명(이 중에 피검자와 도주자와 피살자는 제외), 무기 99식이 56정, 칼빈 3정, M1이 8정, 모두  67정이고, 이에 탄환도 많은 수량을 지원받았다(노획문서 pp,80-83). 
     이들 유격대의 병력과 무기 보유 상황은 진압군에 비해서는 열악하였지만, 그들의 조직망이 전도로 확장되고 있어서 철저히 진압군에 대한 사전 정보를 파악해서 기습작전으로 선제 공격하기 때문에 진압군과 대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압군의 입장에서도 어려운 상대였다.
    이들은 중산간 부락 주민과 각 지역 각 마을, 각 직장에 주둔해 있거나 침투해 있어서 전술적인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유격대원 중 정보원 레포 연락원 지대원(支隊員)들과 사령부 간부들까지도 진압군에 피검되었다가 석방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노획문서 86-87). 이것은 특무대원들이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반 민간인으로 생활하면서 무장 유격대의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이들의 조직을 전도적으로 그 조직망을 확보하여 활동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진압군 병력과 맞설 수 있었다.
     진압군의 전과 보고에서 유격대원의 수가 많은 것은, 그 중에는 일반 주민으로 입산한 자들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유격대원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입산한 ‘산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도 상황에 따라 작전 투입되어 식량보급품을 운반하는 일을 담당하기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작전 중에 진압군에 의해 생포되었다면, 유격대원으로 파악되었다. 

    5. 인민유격대와 국방경비대 9연대 

     당이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국방경비대 9연대와의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이 문제는 4.3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것은 외부로 나타날 수 없는, 당 지도부와 그들이 침투시킨 세포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문서나 외부에 나타난 사항을 근거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런데 노획문서에서 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 거사 대상과 책임 분담
     반동의 아성인 제주읍 성내 특히 감찰철(경찰청)과 제1구서(현제주경찰서) 국경이 담당분쇄하고, 
     (1) 도내 14개 경찰지서는 유격대 및 자위대 400명을 배치 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2) 한국 국경 프락치에게 무장 반격에 동원 가능한 병력 수를 사전에 문의한 결과 800명 중 400명 확실성이 있고 200명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반동은 주로 장교 급으로서 하사관까지 합쳐도 18명이므로 이들만 숙청하면 문제없으니, 병력 동원에 필요한 차량 5대만 보내달라는 요청과 함께 만약 배차가 안 될 때에는 도보로라도 습격에 가담하겠다는 연락이 있었으므로
     (3) 즉시 국경 공작원인 도상위정책(島常委靑責)을 파견 감찰청(監察廳) 및 제1구서(第一區署) 습격 지령과 함께 차량 5대를 보내는 외에, 거점 분쇄 연락병으로 학생특무원(學生特務員) 20명을 성내(제주읍)에 침투시켰다. (노획문서, pp, 12-13)

     이 기록은 반란 당일 작전 계획이다.
     이 후에 이어지는 ‘4.3 당일 상황’에 의하면 “감찰청 및 제1구서 등 거점 분쇄는 국경이 투쟁 불참으로 실패했다”로 한다. 실패는 했으나 애초부터 이 반란을 계획할 때에 경비대 9연대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로 되어있다.

    계획은 제주도의 경찰력을 완전히 장악하는 수준이었다.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반란 세력은 경비대 9연대와 경찰력을 모두 장악했고, 제주에는 미군 병력이 유격대와 반란군에 동조하는 군 병력이 합세하여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당은 계획을 수립하면서 반란의 성공을 충분히 예상하였다.

     이렇다면 9연대는 당의 반란의 동인을 제공한 것이다.
     즉 9연대가 제주도에 주둔해 있었기에 반란을 도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과 9연대의 관계는 반란의 성패를 가름하게 된다.
     그래서 노획 문서에는 독립된 장(章)으로 국경(國警)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그런데 의외에도 4.3 당일에 국경이 동원되지 않음으로 이것을 이상한 일로 생각하고 있든바 4월 5일에 상도(上島)한 도(島) 파견 국경공작원(島常委靑責 동무)의 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진상이 판명되었음. (노획문서, p,76)

     그 내용은 이렇다. 파견원이 지시를 갖고 9연대로 가서 군 프락치를 마났는데, 프락치 중 2명이 영창에 수감되어 있어서 문상길 소위를 만났다. 경비대에는  2중으로 세포 조직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중앙에서 파견한 문상길 소위 세포와 제주도 출신으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파견한 세포 고승옥 하사관이다. 문 소위는 "아직 중앙의 지시가 없어서 거사 지시를 이행할 수 없다"고 반란 당시에 경비대가 참여하지 못한 내력을 기술하고 있다. 이 후에 계속해서 두 세포 조직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을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그 후 5월 7일에 내도한 중앙 을구는 국경 프락치에 대한 지도는 도당에서 할  수 있다고 언명하였기에 국경과 도당과의 관계는 복잡화하여지고 투쟁의 결정적인 약점을 가져오게 되었음.
    그 후로부터 국경으로부터 아무런 공격도 없어 우리의 활동에는 크나큰 이익을 가져왔다.
     5.10 제주읍에서 도당 대표로서 군책(軍責) 조책(組責) 2명과 국경 측에서 오일균 대대장 및 부관 9연대 정보관 이 소위 등 3명과 계 5명이 회담하여
     (1) 국경 프락치에 대한 지도 문제
     (2) 제주도 투쟁에 있어서 국경이 취할 바 태도
     (3) 정보 교환과 무기 공급 등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한 결과 다음의 결론에 의견이 일치를 보게 되었음.                (노획문서,p,79)  

      이 회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앙당과 도당에서 파견한 프락치를 지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을 얻지 못하지만 서로가 최대한 협조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제주 반란군 진압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미군정과 통위부에서는 전면적 포위 토벌작전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렇게 된다면 제주 투쟁은 실패할 가능성이 많음으로 되도록 국경에서는 사보타주 전술로 이 작전에 대해서 중앙에 건의하기로 한다. 그리고 유격대 토벌에 적극적인 반동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들을 숙청해야 한다. 앞으로 최대한 힘을 모아 상호간의 정보 교환과 무기 공급, 가능하면 탈출병을 적극 추진시키기도 한다. (노획문서 pp,79-80 내용 요약.)

     당이 국방경비대 담당 책임자와 연대 대대장과 부관, 정보담당 장교가 만나, 9연대가 인민유격대를 돕기 위한 문제를 의논하고 위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오일균 소령과 그 부관 그리고 연대 정보담당 장교라면, 실질적으로 9연대의 지휘부의 중심인물들인데, 이들이 반란군 인민유격대와  내통하면서 연대장 숙청에 대한 문제까지 의논하였다. 더구나 앞으로 무기와 탄환을 공급할 것임은 물론 병사들이 부대를 탈주하여 인민 유격대에 합류하도록 하는 일까지 돕게다고 했다. 이것이 당시 9연대와 당의 관계이다. 이 회담 이전에도 9연대 프락치는 중앙당 을구가 수시로 만나 정보를 교환했다는 것이다.

    * --4월 중순에 이르러 돌연히 부산 제5연대 1대대가 내도하여 산부대를 포위 공격하게 되었음으로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된다는 긴급 연락이 있어 군책(軍責)이 직접 파견되어 문제를 수습하기로 되었음.
     군책과 문 소위가 만난 결과 국경의 세포는 중앙 직속이므로 도당의 지시에 복종할 수는 없으나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밀접한 정보 교환, 최대한의 무기 공급, 인민군 원조 부대로서의 탈출병 추진, 교양 자료의 배포 등의 문제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더욱이 최후의 단계에는 총궐기하여 인민과 더불어 싸우겠다고 약속했음.
     또 9연대장 김익렬(金益烈)이가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대표와 회담하여야 하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니,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다면 국경의 산 토벌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전부 2회에 걸쳐 군책과 김 연대장과 면담하여 금반 구국항쟁의 정당성과 불법성을 특히 인민과 국경을 이간시키려는 경찰의 모략 등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김 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음(1차 회담에는 5연대 대대장 오일균씨도 참가 열성적으로 사건 수습에 노력했음)
                                              (노획문서,p,77-78)

     이 문서는 국방경비대 9연대는 반란군 유격대 군책과 수시로 회합하여 반란군 토벌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여 그 대책을 강구했음을 밝히고 있다.
    4.3사건의 해결에 분수령이 되었다는 소위 “김달삼과 김익렬 회담”도 사실은 9연대 프락치에 의해서 조종되었음을 이 자료가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 달삼과 김익렬 연대장과의 평화 협상을 하게 된 것이다.  

      4.3사건이 일어나자 처음 미군정은 이 사태를  치안상황으로 인식해서 경찰력과 반공 청년단으로 진압하려 했다. 응원경찰 병력을 입도시켰고, 서북청년단원도 증원했다. 미군정으로서는 5.10 선거를 무사히 치르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장 유격대는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습격과 테러를 계속했다. 이렇게 사태가 점점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미군정은 경비대에게 반란군 진압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익렬 9연대장은 미군정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서, 경찰과 합동으로 진압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반란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란군의 처지를 생각한 9연대 측에서는 항복하면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고 홍보하면서 평화협상을 제안했던 것이다.  반란군 측에서도 회담에 응할 뜻을 전해왔다. 그래서 양 측은 1948년 4월 28일, 대정면 소재 구억초등학교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각자는 서로가 전권을 위임받아 이 협상에 응하였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믿고 회담에 들어갔다. 4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다음과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1)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인 충돌은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2)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3)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또한 합의된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 성산포 등지에도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여 경찰의 개입 없이 군이 관리한다.

     회담 후에 김 연대장은 이 합의 사항을 미군정 당국에 보고했다.
    미군정 측은 회담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경찰에 진압 활동을 중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보고서.197-198).

     그런데 이 협상은 소위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파기된다.
    협상 3일 만인 5월1일에 제주읍부근 오라리 연미부락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전날(4월 30일) 대한청년단원 부인 2명이 반란군에 납치되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한 사람은 탈출에 성공한다. 청년단원들이 모여 피살당한 동료의 부인을 장사지내고는  돌아오다가 그 마을에서 좌익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 집에 방화를 하였다. 소식을 들은 유격대원 20여 명이 출동하여 방화한 우익 청년을 추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이 마을 출신 경찰관 어머니가 유격대원에게 피살당한다. 경찰이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하였으나 이미 유격대원들은 퇴각한 후였다. 경찰의 출동 소식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도피했고, 경찰은 마을 가옥들을 방화했다. 이 사태로 협상이 파기되고 말았다(보고서,p,199). 보고서는 경찰에서 의도적으로 협상을 파기하여 강경진압 정책을 쓰기 위해서 방화사건을 일으켰고, 이 사건에 대해서 미군정의 일정 부분 작용했다고 했다. ( "이 방화사건 현장을 미군이 공중 촬영하여 이것을 자료로 "제주도 반란"이라는 다큐를 제작했다. 영화에서 이 방화사건이 무장대 측에서 저지른 것처럼 편집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미군정은 강경진압 정책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보고서,p200) 이와같이 보고서는 평화회담의의미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파기한 것이 반란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 노획문서에 의하면,
    반란군과 9연대장의 평화회담 자체가 군에 침투한 프락치의 공작이 많이 작용했으며,
    이 협상의 의도는 9연대가 진압작전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거나, 참여하더라도 그 시기를 늦추려는 데서 시작되었음도 밝혀주고 있다.
     김익렬 연대장이 프락치의 건의를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회담에 임하면서 연대 참모 급인 오일균 대대장, 문상길 중위, 그리고 정보 참모 등이 의견을 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 이 회담은 결국 당과 9연대 프락치들의 공동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9연대 프락치와 당의 뜻대로 회담이 성공했던 것이다.
    경찰과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회담을 파기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김익렬 연대장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의 제거 공작도 당의 군책과 9연대 프락치 간에 의논한 대로 실현되었다.   

      김 익렬 연대장을 박진경으로 교체되었다.  
    후임 박 진경 연대장은 부임하자 전임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반란군 진압에 임하였다.
    그런데 그가 부임한 후 5월 20일에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 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 대부분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이 군 탈영사건도 당의 군책과 9연대 프락치 사이에 합의된 내용이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사건 이후로 제주출신 장병들이 진압 작전에 소외시켰다고 한다(보고서, p,218). 박 연대장은 해안지대 진압은 경찰에 맡기고 산간 고지대를 수색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작전으로 중산간 부락 주민들은 산으로 도피하였는데, 이들이 결국 ‘산사람’ 이 된다. 경비대는 한라산 기슭은 샅샅이 수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들 중에는 무장 유격대원이 아닌 입산한 일반 주민들도 많았다. 

      반란군을 강경 진압하던 박 진경 연대장은 6월 18일 남로당 프락치인 부하 대원에 의해 살해당한다.( 남로당 세포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이정우 하사(미체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9명이었는데, 이정우는 탈영 입산했고,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은 총살형, 양휘찬에게는 무기, 강승규에게는 징역 5년 황주복 김정도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보고서, p,219, 

     범인은 모두 체포되어 군사 재판을 받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재판정에서 박진경 연대장의 진압작전으로 ‘폭도들을 양산하게 되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성을 주장했다.( 박잔경 연대장을 직접 사살했던 손선호 하사의 법정 진술과 재판 과정과 변호인 변론 내용의 일부, 그리고 문상길 중위의 총살 집행전의 최후 유언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들의 주장의 정당함을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보고서. pp,225-229)
     
    이런 상황에서 반란군 진압 작전은 더욱 강경해졌다. 육지에서 응원경찰이 계속 증파되었다.
    그들이 반란군을 색출 채포 조사하는 과정에서 반 인권적인 사태가 벌어졌고, 유격대원과 그 동조자들을 정당한 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하는 사례도 자주 일어났다. 응원경찰 중에는 경찰관으로 특채된 서북청년단원들이 있어서 부작용은 더욱 많았다(보고서. p,304). 

      6. 반란군의 선거 방해와 선거 무효 

     유격대는 5.10선거 방해 공작과 테러는 계속했다.
    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선거관련 업무 담당자나 우익 인사와 그 가족을 테러하고, 선거사무실을 습격하여 선거 관련 서류를 탈취하는 등 선거를 방해 사건이 계속되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는, 남로당원들이 주동이 되어 마을 행사를 마련하고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특정 지역에 모아놓고 투표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그러한 방해 공작으로 북제주군 갑.을 2개 선거구는 투표자 미달로 선거 무효가 되었다. 군정 당국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반란군 진압에 소극적이었던 김 익렬 연대장을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했다.
    또 9연대 병력을 보강하여 11연대로 개편하였다.  
     4.3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그 7월 말일까지 유격대의 전과, 경찰과 민간인의 피해 상황을 날자, 지역, 전과 유형 별로 자세히 기록했다. 그 내용을 집계하면 다음과 같다.

     (1) 경찰에 대한 전과 사항
     지서 습격 31회, 지서 건물 파괴 3 동(棟), 지서 소각 6동, 경찰관 살해 74명 부상 35명, 경찰관 가족 살해 7명, 투항 경찰관 4명 등.
     (2) 관공서 습격 및 우익 인사 숙청 상황
     관공서 습격 2회, 관공서 소각과 파괴 각각 1개소, 반동 살해 223명, 부상 28명, 반동 가족 살해 12명, 반동 가옥 소각 120채, 파괴  7채, 경찰관 가옥 소각 2채 , 반동 포로 20명, 그 가족 포로 2명 등.
     (3) 공공 재산 파괴 및 기타 무기 노획 상항
     전선 절단 (전봇대 절단) 940 개, 도로 파괴 170곳, 교량 파괴 3곳, 기타 무기 노획 수량.
       (노획문서, pp, 73-74)
     
     이처럼 반란군은 쉬지 않고, 5.10선거 방해 책동을 벌였고, 선거가 끝난 후에도 작전을 계속했다. 8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의원 선출을 위한 지하선거가 38 이남에서 실시되었는데, 제주에서는 소위 “손도장 찍기” 선거로 주민의 85%가 참가했다.
     5,10선거를 거부한 도민이 이 선거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은, 당이 조직적으로 주민을 협박 선동하여 강제로 투표하였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강요하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렇게 당은 제주 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을 위한 대의원(국회의원) 선출에 투표하도록 하였다. 이렇다면 남로당제주도당이 내걸었던 단선 단정 반대의 명분도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9월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4.3반란을 국가 보위의 차원에서 국군이 중심이 되어 경찰 병력이 도움을 받아 진압하도록 방침을 세웠다. 그래서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키면서 강경 진압을 펼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증파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내부 공산 프락치 김진희의 주동으로 제주 파견을 거부하는 반군 사태가 일어났다.
     
     7.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와 중산간(中山間) 부락
     
      4.3 반란은 수습되지 않고 오래 지속되면서 제주의 중산간 부락은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치안의 부재 지역이 되었다. 당은 중산간 마을들을 전략지역으로 이용했다. 식량 보급 지이면서 활동의 주요 지역이 되었다. 유격대가 본부로 이용할 수 있는 한라산 기슭의 특별 지대는 이 중산부락과 인접해 있다. 그리고 이 부락에는 반란 세력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친족들이 있어서 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부는 사태가 조속히 수습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새로운 진압 전략을 강구한다. 그런데 군은 연대장이 부하에게 사살당하고, 출동 명령을 받은 부대가 공산 세포에 의해 출동을 거부당하는 등 군부 요원이 사상을 검증할 상황이었다. 군 내부의 사상 분열로 지휘하는 부대를 이끌고 월북하기도 했고, 군 내부의 프락치 사건으로 군 기강이 문란해졌고, 더구나 38선 이남 태백산 지리산 등 깊은 산악지대에는 공산 빨치산이 치안을 어지럽히고 주민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주에는 반란군 진압에 적극성을 갖고 있는 지휘관을 배치했다. 

     정부는 사태를 강경책으로 진압하려고 했다. 1948면 10월 11일 자로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중산간 부락을 작전 지역으로 설정한다. 해안으로부터 5킬로미터를 너머 지역 및 산악 지역에서 민간인이 무허가 출입을 금하였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는 모두 ‘폭도배’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한 지역에는 중산간 부락이 해당되었다. 이 작전을 “초토작전”이라고 하는데, 진압군의 반 인권적 토벌 행위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을 기해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22)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서는 두 가지 문제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나는 미군이 개입했는지, 두 번째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 두 문제에 대해서 미군이 개입했고, 불법이라는 입장이다. 
     
      정부 측에서는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우선 중산간 부락 주민을 해안부락으로 이주시키고, 그 다음에 부락의 주거 공간을 불태워 버려서 사람이 생활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기본 전략은 지역 치안 책임자나 진압 부대 책임자에 따라 다르게 실시되었다. 이 작전은  (1)부락민을 모두 이주 시킨 다음에 마을 가옥을 전소시키는 경우가 있었고,
     (2) 주민을 해안부락으로 소개시키지도 않고 진압군이 마을에 진입해서 가옥을 전소시키면서, 주민들을 채포하거나 사살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입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작전으로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으로 남원면 의귀 수망 한남 3개 부락이다. 토벌대는 중산간 부락 주민을 해안부락으로 소개시키지도 않고 마을에 들어와서 가옥부터 불태우기 시작했다. 겁먹고 도망치는 주민을 사살 체포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날이 새면 마을 외곽지대로 피했다. 토벌대는 3-4회에 걸쳐 마을 전 가옥은 전소시켜 버렸다.
    토벌 횟수가 늘어갈수록 주민들은 진압군을 피해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토벌대가 주민의 도피처를 알게 되면서 초원과 목장지대와 산악 기슭까지 누비면서 수색했다. 주민들은 점점 한라산 쪽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들은 모두 입산자가 되었다.

      중산간 부락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해안부락으로 피신하기도 어려웠다.
    밤이면 중산간 부락은 유격대의 해방구가 되어서, 해안부락으로 주민이 소개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 더구나 유격대 측에서는 주민들이 해안부락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한편, “조금만 기다리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회유하고 공작했다,
     이와는 달리 진압군은 일정 기간을 정하고 작전지역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소개시킨 후에 마을에서 생활할 수 없도록 주택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대부분은 (2)와 같은 경우여서, 중산간 부락 주민들의 피해가 너무 컸다.
     진압군을 피해서 입산자가 된 그들은 토벌대에게 체포되어나 또는 자진 귀순하여 일정한 심사를 받고 석방되기도 했고, 재판 절차를 거쳐 실형을 받거나,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일부 과격분자나 서북청년단원들에 의해서 탈법 행위가 나타나기도 했다. 진압군 지휘관이나 대원들이 제주 실정에 낯설었기 때문에 문화 충돌도 일어났고, 제주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편견이 귀순자나 유격대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이고 반 인권적인 일들을 저질렀다. 

     한 겨울로 접어들면서 입산자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자 귀순하는 형식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진압군 측에서 귀순을 적극 종용했다. 귀순자들은 막대기에 흰 헝겊을 매달아 귀순의사를 밝히고 가까운 진압군 부대나 지서가 있는 마을로 내려갔다. 이들은 심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석방 기준도 지역 경찰관서의 책임자나 실무자, 진압부대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났다. 그래서 어느 곳으로 귀순하느냐는 것도 입산자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그런데 유격대에서 활동했거나 동조했던 무리들은 선뜻 귀순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들도 진압군에게 체포되어 제주읍의 공공건물에 집단 수용되었고, 정황에 따라 재판을 받거나, 또는 그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했다. 군사재판을 받고 형 언도가 확정된 사람들은 육지 여러 지역 형무소에 수감되어 수형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인천 지역 형무소 수감자들은 북한군이 진주하여 형무소를 개방하자 북한군에 입대했거나, 월북을 했거나,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예비검속으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방 지역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전쟁 상황에서 정부의 위기관리 차원에서 처형되기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형기를 마치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  

     중산간 부락 진압작전에는 지역 민보단원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이들은 직접 토벌작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해안부락에 정착한 중산간 부락 주민들이 고향에 비축해 둔 식량과 일용품들을 가져오는 일을 도왔다. 이것은 중산간 부락 주민들의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기 위해, 또는 입산자들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중산간 부락의 진압작전으로 심하게 피해를 입은 경우에 무장 유격대가 그 관할 부락에 대해 보복적인 습격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 예가 남원면 관내의 상황이다. 남원면 중산간 부락은 유격대의 세력이 강한 마을도 아니었는데 진압군에게 물적 인적 피해를 많이 당했다. 그런데 11월 30일에 남원과 위미리가 유격대로부터 대규모 습격을 당했다. 경찰은 대응을 포기하고 고립된 상태가 되었다. 지서 주변에 10 여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가옥이 유격대에 의해 전소되었다. 진압군 증원부대는 유격대의 방화와 식량 탈취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도착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 위미리도 대규모 습격을 당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식량과 생필품을 탈취해 갔을 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살해했다. 이날 남원리에서는 유격대에 의해 40여 명이 살해당했다. 4.3사건 기간 동안에 해안마을이 유격대의 습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건이었다.   

     12월 말 진압 군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되었다.
     신임 함병선 2연대장도 강경진압작전을 유지하면서 입산자의 귀순 작전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런데 무장 유격대 측에서는 새로운 부대가 본격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초기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1월 1일에 제주읍의 한 마을에 주둔해 있는 3대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진압군 장병 10명이 희생되었다.
    군이 진압작전에 참여한 후에 처음 있는 큰 사건이었다.

    이어 1월 12일 새벽에 유격대는 남원면 의귀리 초등학교에 주둔해 있는 중대본부를 총공격했다. 무장 유격대가 약 2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의귀리 전투’라고 할 만큼 진압군과 유격대 사이에서 벌어진 큰 접전이었다. 당시 한라산 유격대 주력 병력이 모두 참가했다고 한다(보고서 p,313). 2시간 접전 끝에 유격대원이 51명이 사살되었고, 진압군도 4명이 전사했다. 이 사건을 고비로 무장 유격대의 전력을 급격하게 약화되었다(보고서,p,313). 또한 유격대가 퇴각한 후에 그곳에 수용되고 있던 많은 귀순자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들은 그 전날 오후 늦게 석방이 결정되었는데도, 해안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하루 밤 지나서 내려가려던 입산자들이었다. 

      조천면 북촌리에서 주민 사살 사건이 발생했다. 아침에 세화리에 주둔해 있는 3대대 중대 병력 일부가 대대본부가 있는 조천면 함덕리로 가던 도중에 북촌 마음 어구 고갯길에 잠복해 있던 무장 유격대의 기습을 받고 진압군 병사 2명 전사했다. 흥분한 진압군이 이웃에 있는 북촌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모아 놓고, 경찰관과 우익인사 가족들을 제외하고 총살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대대 본부에서 사실을 늦게 알고 중지 명령을 내려 일부가 살아남기는 했으나, 진압군이 주민을 불법으로 집단 사살한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다. 의귀리 집단 처형은 체포된 입산자들이었다면, 북촌의 경우는 마을 주민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두 사건은  4.3사건 진압 과정에서 진압군이 주민이나 입산자들을 집단으로 처형한 대표적인 두 유형이다. 

      해안 부락 주민들도, 경찰관 지서가 있는 마을(면소재지 마을)을 제외하고는 당이 주도하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반란군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래서 진압군의 공격 목표가 되기도 했다.
    의귀리와 북촌리 사건에서 보듯이, 어떤 큰 사건은 작은 사건이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의귀 초등학교에 수용되어 있었던 입산 귀순자들이 집단 처형 사건은 이미 그들이 석방 대상자였기 때문에 처형하지 않아야 했지만, 진압군의 입장에서는 자기네를 공격해온 유격대에 대한 분노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들도 유격대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료를 잃은 그들은 인권이나 생명의 소중함은 별 의미가 없었다. 북촌리 사건도 그렇다. 적의 기습으로 동료를 잃은 상황에서 병사들은 이성을 잃고 반 인륜적인 처사를 범하였다. 이렇게 4.3사건에서는 인간의 악마성이 숨김없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기간에도 유격대는 여전히 해안 마을을 습격하여 우익인사와 그 가족을 테러하였고 경찰관서를 공격했고, 일반 주택에서 보급품을 탈취하기도 했다.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또한 교통을 방해하기 위해 열악한 교량을 파괴했고, 특히 유선 통신 시설인 전신주를 절단했다. 북촌 사건의 빌미가 된 사건처럼 일주도로변 기습에 적절한 곳에 은신했다가 진압군을 급습하는 등 일종의 게릴라 전술을 펼쳤다. 무장 반란군의 전력은 약화되었으나,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후로 다양한 방법으로 도발해서 진압군을 위협했다. 그래서해안부락도안전지대가될수없었다
    .
      1949년부터 유격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해안 부락에도 돌성을 쌓아 주민들은 그 안에 거주하도록 했다. 성 밖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은 가옥을 폐쇄하고 성안으로 들어와 살아야 했다.
    축성(築城)이 완성되자 교육을 받은 주민들이 밤낮으로 성을 지켰다. 낮에도 성 밖으로 나갈 때에는 허가를 받아야 했다. 자연히 주민들의 생업을 위한 생산 활동이 위축되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어서 밤이면 성 밖 출입은 물론 성안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조치는 무장 유겨대의 공격이 다양해졌고, 되도록 그들이 주민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한조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고 반란군과 입산자에 대해서 진압과 선무 병용작전을 펼쳤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사면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자 입산자들이 많이 하산했다. 1949년 5월 10일, 투표자 미달도 선거무효가 되었던 북제주 갑.을 두 선거구에서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그해 6월 무장 유격대의 총책인 이덕구가 진압군과의 교전 중에 사살되면서 유격대의 전의가 크게 상실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났다. 제주도 상황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한라산에 잔존해 있던  유격대원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 고무되어 해안 마을과 공공 시절과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민간인을 살해하고 식량과 보급품을 탈취하고 사람을 납치하였다. 그들은 곧 38이남이 공산화될 것을 믿고 공세를 취했다. 그 동안 진압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체포 또는 귀순자가 많았는 데도 유격대의 세력은 감소하지 않았다. 또한 전쟁 상황이 위급해지자 전향자 단체인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당의 주요 인사의 가족들이 예비 검속을 받고 경찰에 수감되었다가 불법으로 처형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관련 수형자들도 형무소의 형편에 따라 즉결처분을 받았다. 

     국군이 전선에 투입됨에 따라 한라산 유격대의 진압은 전적으로 경찰이 맡게 되었다.
     제주도경찰당국은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경찰국 직속으로 의용경찰대를 조직하여 진압 작전에 투입하였고, 각 경찰서 산하에 향토방위대를 편성하여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다.
    이들 두 단체가 해산되자 이번에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경찰의 진압 작전을 도왔다. 
     경찰은 한라산 잔비들이 주민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그들은 완전 고립시켜 진압하기 위하여 한라산 기슭이 요소요소에 경찰관 주둔소를 설치했다. 이 주둔소는 6.25 직전부터 설치하기 시작해서 1952년에는 전도에 32개소가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소수의 상주 병력이 주둔해 있고, 잔비 소탕 작전을 수행하던 경찰 진압군이 일정 기간 숙식을 하면서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8. 100전투사령부 설치 및 잔비(殘匪) 토벌 

      1952년에 이 진경 경찰국장이 부임하자, 적극적으로 잔비를 소탕하기 위해서 “100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사령부 산하에 101부대, 102부대, 103부대, 105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부대에는 단위부대인 중대와 소대가 있어 전투부대로서 잔비 토벌만을 담당했다. 이 부대 대원들은 육군훈련소에서 일정 교육을 받고 주둔소에 주둔하면서 잔비 소탕 작전에 투입되었다. 경찰은 또 100사령부와는 별도로 사찰유격대를 조직 운영했다. 이들은 주로 유격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토벌 임무도 수행했다. 또한 제주도에 신병훈련소가 설치되고 많은 피난민들을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제주 경비를 위해 해병대가 파견되었는데, 이들이 경찰과 합동으로 잔비 토벌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00사령부 예하 부대는 한라산 500고지 이상 지역을 맡았고, 그 아래 지역은 각 경찰서 사찰유격대가 담당하여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한편 특수 훈련을 받은 육군으로 편성된 무지개 부대가 한라산 잔비 소탕을 위해 투입되었다. 이들은 100사령부 예하 부대와 합동으로 주로 대민 심리전을 담당했고, 잔비가 은거할 수 있는 지역에 잠복해 있다가 적을 공격하는 특수 임무를 맡았다. 1952년 당시 잔비는 70여 명이었다. 이들 중에는 무장 유격대에 의해 납치된 후에 유격대 간부로부터 사상 교육을 받고 유격대원이 된 경우도 있었다. "앞으로 몇 달만 참으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고 교육을 받았다.

     겨울이 가까워지자 잔비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100사령부 산하 진압군이 잔비와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래도 잔류 유격대원들은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과 말과 소를 탈취하여 갔다. 여러 차례에 결처 100사령부 예하 부대와의 교전으로 잔비 전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잔비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주민들의 생산 활동을 위해서 폐촌이 되었던 중산간 부락을 재건하여 주민들은 집단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주민들은 산에서 송진이 흐르는 소나무를 배어다가 집의 얼개를 짓고 띠를 배어다가 지붕을 이어 임시 숙소인 소위 함바를 지었다. 마을 주민들은 돌로 쌓은 성곽 안 일정 지역에 집단으로 살면서 밭을 갈아 농사를 지었다. 중산간 재건부락에는 경찰관 출장소나 파견소를 설치하고 주민과 함께 잔비의 공격에 대비하여 마을을 지켰다. 전쟁 중이었기에 한라산 잔비들은 기세가 꺾이지는 않았다. 주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을을 습격하였고 들에서 일하는 주민들은 납치하는 사건이 종종 벌어졌다.

     경찰은 1954년 4월 1일을 기해 한라산 잔비가 소수이므로 주민의 생업에 위협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산간부락 입주 및 복귀를 허용함으로써 한라산 일부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해 9월 21일을 기해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어 전면 개방하였고, 주민들의 성곽 경비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1955년 9월 21일에 한라산 백록담 북측에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뒷해 4월 3일 구좌면 송당리 채오름에서 무장 유격대 부책인 정권수가 토벌대와 교전 중에 사살되었다. 1957년 3월, 여자 유격대원 한 순애가 사찰유격대에 의해 생포되었고,  일주일 뒤에 총책 김성규 등 2명이 사살되었다. 마지막 유격대원 오원권이 성산포 사찰유격대에 의해 생포된 것이 4월 2일이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피의 반란을 일으킨 지 꼭 만 9년만이었다. 

     9.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의 반 역사성”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잘못된 역사바로잡기"의 사업으로 ”과거사 청산“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 후부터 ‘4.3위원회’로)에서 만든『제주4.3사건 진상 보고서』(이후부터『4.3보고서』는 역사의 진실을 정치 논리에 의해 왜곡시킨 반 역사적인 행위이면서, 정치권력으로 역사를 바꾸려 했던 폭력의 극치였다. .
     
     (1) 위원회 조직부터가 반 역사적이었다. 

     4.3위원회 인적 구성은 당연직과 위촉 직으로 구분된다.
    위원장인 국무총리를 비롯해서 당시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법무부 국방부 보건사회복지부 장관과 법제처장 제주도지사가 당연직이 되었다. 이들은 개각 때마다 바꿔지기 때문에 사업 추진에 대한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집권당의 각료여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일에 감당할 수 없다. 

      국무총리가 지명한 위원들도 편파적이었다.
    박재승 (대한변협회장) 김삼웅(독립기념관장) 박창욱(전 제주4.3유족회장) 배찬복 (명지대교수) 서중석 (성대교수) 임문철 (제주중앙성당 주임신부) 한용원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강만길(전 상지대 총장) 신용하(당시 한양대 석좌교수) 김정기(제주대 부총장) 유재갑(전 경기대 교수) 이돈명(변호사), 김점곤(군사전문가) 한광덕(군사전문가), 김점곤과 한광덕은 중도에 사퇴했다.

      위원회는 제주4.3보고서 작성기획단을 위촉했다. 단장에 박원순(당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당연직으로는 행정자치부 자치행정국장, 법무부 서울고검사무국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법제처 행정법제국장 제주도 행정부지사이다. 위촉직으로는 강종호(재경제주4.3민간인희생자유족 공동대표) 강창일(제주4.3연구소장. 현재 민주당국회의원) 고창후(변호사) 김순태 (방송통신대학교충남지역학장) 도진순(창원대학교 교수) 오문균(경찰대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유재갑 (경기대 교수) 이경우(변호사) 이상근(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사실장) 그리고 전문위원으로 박찬식 김종민이다. 진상조사팀으로 수석전문위원 양조훈, 전문위원 나종삼 장준갑 김종민 박찬식이고 여기에 조사요원 15명이 위촉되었다. 

     4.3사태의 진상규명의 열쇠를 갖고 있는 것은 이 보고서 작성 기획단과 진상조사위원들이다.
    이러한 인선에서 비전문가가 많으며 학자보다는 정치적인 인사들이 많다.
    더구나 단장은 원래 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사 실장이 내정되어 국무총리 결재까지 났었는데,
    박원순으로 교재 임명되었다.

    이러한 위원회와 보고서 작성 기획단의 인선에서부터 4.3을 공정하고 정직하게 규명될 수 없었다. 
      
    (2) 정치권력과 역사 왜곡의 실상
     
     위원회의 의도한 보고서의 중심 논점은 다음과 같다.
     (가) 4,3사건은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5.10 선거를 거부하고 외세인 미군정과 과 부정부패 세력에 저항한 정당한 민중저항운동이다.
     (나)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이승만 정권은 불법적으로 비상계엄을 발표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
     (다) 미군정하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처음부터 미군정이 개입하였고, 그 진압 과정에서 미국이 작용하였으므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라) 그래서 4.3은 정의로운 민중운동이기에 이를 국가권력으로 제압한 대한민국 정부는 과오르 저질렀으므로 도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이러한 논점의 궁극적인 의도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주적 결정권을 억압하는 외세를 배격하여 반미사상을 강조하는데 있었다. 희생당한 주민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애초의 주요 목적까지도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보고서는 4.3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 정치적인 의도로 역사를 왜곡시켰다. 
      
      이 보고서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내용 중에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가) 3.1사건과 3.10파업 사건은 남로당이 정치세력을 확대하여 제주에서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인데도, 경찰관 발포 사건만을 부각시켜 도민의 정당한 저항처럼 기술하면서 4.3을 제주 민중 저항운동으로 왜곡하였다.

     (나) 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가 없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결정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 외세에 대한 저항, 부정과 부패에 대한 도민의 정의로운 저항의식을 남로당이 대신하여 일으킨 것처럼 미화시켰다.

     (다)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도민의 희생 중에 남로당 반란세력의 비인도적인 행위는 외면하고, 정부의 과잉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반 인권적인 사례만을 문제 삼았다.

     (라) 제주4.3은 그 준비 단계에서부터 군 프락치의 활동에 의해 국방경비대 9연대와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갖고 있었다. 프락치는 반란 당일 경찰을 제압할 계획을 세웠고, 이것이 실행되지 않자, 반란 후에는 무기와 실탄 공급, 군 탈영 입산자를 조장하는 등으로 적극 협력했는데도,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반란군과 김익렬 연대장의 평화회담이 미군정과 경찰의 방해로 파기되었다는 점을 억지 논리를 내세워 강조했다.
    노획문서에 의하면, 반란군이 평화회담에 참여하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미 9연대의 대대장과 부관, 정보장교, 그리고 프락치가 반란군의 군책(軍責)과 자주 회합을 가졌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대의원 선거에 남로당제주위원회가 주민들을 협박 회유하여 85%가 참여하도록 한 일과, 반란군 사령관 김달삼이 해주대회에 참여하여 제주 사태에 대해서 남로당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사건에 대해서는 억지로 의미를 축소하여 처리했다.

    (바) 이러한 왜곡된 논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료를 편향되게 선택했다. 특히 진압군과 경찰에 의해 피해를 당한 자의 증언은 자료로 채택하면서, 반란군에 의해서 고통 받은 자의 증언은 자료에서 제외했다. 집단적 피해도 군경 진압군에 의한 것은 강조했으나. 반란군에 의해 당한 집단적 피해는 논외로 했다. 

    (사) 사건을 인과 관계에 의해서 해석하지 않고, 어떤 사태를 단순화하여 이해함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현상을 보지 않았다. 이것은 보고서의 의도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있지 않고, 정치적 정략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래서 보고서는 4.3의 실체를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입장에서 밝히려는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고, 정치세력화를 강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반 역사적인 문서에 불과하다. 그래서 4.3으로 인한 도민의 갈등과 고통이  치유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이 모든 문제는 4.3의 진상 규명이 인간과 역사의 진실이 소중하다는 인간주의를 외면하고  정치적 이해와 그 목적을 이루려는 반역사적인 동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