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거인' 鄧小平 사망 17주년이 되는 날

    70대의 골수 공산주의자가 개혁 개방 노선으로 전환한 데는

  • 박정희의 성공 모델도 기여했다.

    趙甲濟    
      
    李光耀가 鄧小平에게 한 충고
      
      오늘은 不倒翁(부도옹) 鄧小平이 사망한 지 17년이 되는 날이다.
    1997년 2월19일에 93세로 타계한 그는 중국을 개혁 개방의 길로 引導,
    역사상 유례 없는 年 10% 경제성장률 30년을 달성,
    천지개혁의 변화를 몰고 온 위대한 정치가였다.
      
      몇년 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싱가포르의 지도자 李光耀(이광요)와 다섯 시간 인터뷰한
    내용을 6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싱가포르를 세계 일류의 도시국가로 만든 그는 타임 기자가
    “지금까지 公的(공적)생활을 통해서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李씨는 “鄧小平(등소평)이다”고 말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1978년 11월 그가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 앞에 재떨이와 가래통을 갖다놓았으나 그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鄧小平은 ‘당신은 싱가포르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했군요, 축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뜻인가요’라고 하니 鄧小平은 ‘1920년에 내가 마르세이유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렀는데 그때는 형편없는 도시였지요. 이제 와서 보니 완전히 달라졌어요’라고 했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하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 남쪽에서 온 땅 없는 농민 출신이지만, 귀하는 관료와 작가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그 많은 명석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1992년 등소평은 南巡講話(남순강화)라는 걸 했는데 이때 ‘싱가포르에서 배우자.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때 내가 한 말을 이 분이 잊지 않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1978년에 방콕,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를 방문한 것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 나라가 3류 도시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2류 도시였고 북경이나 상해보다도 나았거든요.
    그가 탄 비행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는 참모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부하들이 혼나고 있을 거야. 보고를 잘못 올렸거든.’. 그가 돌아간 뒤 數週(수주)가 지나지 않아 인민일보는 더 이상 싱가포르를 미국의 走狗(주구)라고 비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싱가포르가 깨끗하고 정원도시이며 주택사정이 좋다고 보도하기 시작했어요. 노선을 바꾼 거지요.
    곧 鄧小平은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74세의 평생 공산주의자가 대장정의 동지들을 설득하여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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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毛澤東도 살고 鄧小平도 살게 한 역사결의
       1981년 중국공산당의 '건국 이래 黨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決議'
      
    鄭淳台
     
      1981년 6월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1期6中全會)는 「建國 이래 黨의 약간의 歷史문제에 관한 決議」(이하 歷史決議로 표기함)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歷史決議는 毛澤東(모택동)이 주도한 「文化大革命」(문화대혁명)의 極左路線(극좌노선)을 부정하고, 鄧小平(등소평) 체제를 확실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 놓으면서 오늘의 중국을 經濟 제일주의의 길로 이끈 역사적 文獻(문헌)이다.
      
       8개 부문, 38개 항, 약 3만 字로 구성되어 있는 歷史決議의 실무적 작업은 中共黨 최고 이론가 胡喬木(호교목) 그룹이 맡았지만, 그 全文에는 20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鄧小平의 의지, 즉 그의 實用主義 정신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鄧小平은 1980년 3월부터 1981년 6월 사이에 아홉 차례에 걸쳐 「역사결의 基礎小組」에 문건의 기초와 수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간여했다.
      
       문제는 毛澤東이었다. 中國은 毛澤東의 呪術(주술)에서 깨어나 그의 神性(신성)과 극좌 이데올로기의 과잉상태를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歷史決議가 작성되던 무렵만 하더라도 毛澤東을 비판하는 데는 아직도 勇斷(용단)이 필요했다.
      
       毛澤東은 이미 1976년에 사망했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偶像化(우상화) 작업에 의해 여전히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특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한 「創業皇帝」(창업황제)였다. 鄧小平은 그의 「歷史決議의 基礎에 대한 意見」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毛澤東 동지의 오류에 대해 度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됩니다. 度를 넘게 되면 毛澤東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黨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鄧小平은 毛澤東을 부정하거나 기왕의 黨결의를 全面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를 보는 그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毛澤東 동지의 功過(공과)에 대해 적절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고참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토지개혁 시기의 빈농, 중·하층 농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毛澤東 사상이란 깃발을 내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깃발을 내던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 黨의 빛나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鄧小平은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밑자락을 깔고 『毛澤東 동지가 만년에 이르러 사상에 일관성이 없고 어떤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못박았다.
      
       『대체로 1957년(전반기)까지 毛澤東 동지의 領導(영도)가 옳았으나 1957년 (여름의) 反右派(반우파) 투쟁 이후부터 誤謬(오류)가 점점 늘어났다.』
      
       그 오류의 핵심인 文革에 대해 鄧小平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문화대혁명」이 한 세대의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세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으로 無政府主義와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범람하게 되었고, 사회기풍에 심각한 害(해)를 끼쳤습니다.』
      
       鄧小平은 「문화대혁명」 시기 중 「毛澤東 동지의 오류」와 「4인방의 도전」과 홍위병의 난동을 극복한 데 대해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힘을 합쳐 「逆轉勝(역전승)한 기록」으로 평가했다.
     
       조선일보 북경특파원을 지낸 朴勝俊 기자가 오늘 쓴 칼럼에 나오는 대목이다.
      
       <93세에 세상을 뜬 덩샤오핑(鄧小平)은 1997년 2월19일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에 부인 줘린(卓琳)을 통해 유언을 남겼다. 줘린은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실로 편지를 보내 “이것이 덩샤오핑 동지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전했다. 부인이 전한 덩샤오핑의 유언은 이런 것이었다.
      
       “유체(遺體·시신) 고별의식 같은 것은 거행하지 마라, 영당(靈堂·빈소)도 차리지 마라, 유체는 의학연구를 위해 해부용으로 제공하고, 각막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라, 화장한 뼛가루는 바다에 뿌려라.”
      
       중국은 전통적으로 매장(埋葬)이었으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화장(火葬)으로 통일됐다. “사고행위가 끝난 육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회주의 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베이징(北京)에서 세상을 떠나면 권력자이건 보통 인민들이건 예외없이 베이징 장안가 서쪽에 있는 팔보산(八寶山)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거기에 있는 공묘(公廟)에 안장된다. 덩샤오핑의 유골은 유언에 따라 비행기에 실려 동중국해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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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鄧小平의 先富論과 胡錦濤의 均富論
     
      低賃金에 기대한 對中진출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趙甲濟 
        
      포스코는 1985년부터 중국에 진출하여 현재 38개 철강관련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持株(지주)회사인 浦項中國投資有限公司(포항중국투자유한공사)의 총경리(사장)로서 중국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金東震씨는 사업설명을 끝내면서 “아무리 기업환경이 어려워져도 도망갈 데가 없습니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합니다”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중국법인으로 되어 있는 38개 포스코 계열사에 고용된 인원은 4094명인데, 이중 한국인이 152명이다. 포스코는 그동안 27억 달러를 중국에 투자했다. 38개 회사가 연간 약7조원의 매출액을 올린다고 한다. 이 회사들이 한국의 포스코 본사로부터 수입하는 중간재는 연간 1조원을 넘는다. 한국이 득을 보는 것은, 152명의 고용과 연간 1조원의 수출효과인 셈이다. 주식배당을 받아 본국으로 과실송금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을 중국에 재투자하고 있다. 중국에 자금을 투자하고, 기술을 넘겨주고, 인력을 양성해주는 代價로선 너무 작은 利得(이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은 결국 그 기업이 있는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게 된다.
      
       중국은 놀라운 흡인력을 가진 나라이다. 중국의 漢族은 여러 차례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만주족이 세운 淸, 몽골족이 만든 元, 거란족의 遼, 여진족의 金, 다섯 胡族이 세운 16개 나라 등이다. 이들 정복민족은 소수로써 다수를 지배하다가 다수에 同化되거나 밀려났다. 漢族(한족)의 지혜로운 전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거대한 존재의 속성일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외국자본을 씨앗으로 삼아 경제발전을 시작하여 실력을 키운 다음 이젠 외국자본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외국회사에 대한 특혜도 폐지하고 있다. 低賃金에 기대한 對中진출은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苦戰(고전)하고 있는 이유이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중국 요인들은 친환경적 기업의 중요성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동시에 에너지를 적게 쓰는 기업을 選好(선호)한다.
      
       鄧小平(등소평)-江澤民(강택민) 시대 중국은 우선 富(부)를 축적하자는 先富論(선부론)에 근거한 量的(양적) 성장 정책을 폈으나 胡錦濤(호금도) 시절에 와선 均富論(균부론)에 입각한 질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동부해안 지방 우선 개발 정책에서 중부, 서부, 동북 3성 균형개발정책으로, 무차별적 외자도입에서 선별적 도입으로, 에너지 다소비 산업에서 에너지 절감 산업으로, 외자도입에서 해외투자로 방향이 크게 선회중이다.
      
       올해부터 外資(외자)기업의 소득세율이 15%에서 25%로 오르고, 內資(내자)기업의 소득세율은 33%에서 25%로 줄어 內外(내외)가 같아졌다. 경제특구와 沿海(연해)개방구 기업에 대한 특혜도 철폐되었다. 노동법도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강화되었다. 저임금-공해유발-後進(후진)기술 산업을 서서히 퇴출시키겠다는 중국의 선택에 수많은 한국의 중소기업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중국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돈을 벌어 나가도록 내버려두는 나라가 아니란 한 국제법학자의 16년 전 경고가 생각났다.    
      [ 2008-10-10,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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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개혁가 管仲의 실용정신(2)
       管仲과 鄧小平, 그리고 「7대3」의 秘密
      
       管仲은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전제하에 경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실용주의자였다. 농업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상공업을 장려했다. 상공업의 육성이야말로 富國强兵(부국강병)의 지름길임을 잘 알았다. 그 대표적인 제도가 「7대3」.
       지금의 山東省(산동성)에 있었던 齊나라는 해안가를 끼고 있는 만큼,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 등 상공업 발전에 유리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소금과 鐵(철)이 많이 생산됐다.
       管仲은 鹽鐵官(염철관)을 두어 소금과 철의 생산, 판매를 국가가 전담토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에게 소금을 만들도록 하여 이를 국가가 收買(수매)해줬으며, 철광 채취는 정부와 상인이 협동하는 官商(관상)협력방식을 택하여 그 이익의 7할을 상인에게 주고, 3할은 정부가 가졌다. 그러자, 국가의 수입이 대폭 늘어났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됐던 것이다. 많이 생산할수록 내 몫이 많아지는데 얼마나 열심히 일하겠는가. 처음엔 국가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같지만 총생산량이 많아지니까 결과적으로 국가의 수입이 더 늘어나는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개념,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鄧小平(등소평)이 管仲에게서 정치철학과 실용경제를 배운 것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毛澤東정권은 인민공사라는 협동농장 통해 농사를 지으면서 7할은 정부가 갖고, 농민에게 3할을 주었다. 중국은 毛澤東 시대엔 내내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흉년이라도 들라치면 캐나다, 호주처럼 인구는 적고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에 손을 벌여야 했다.
       그것을 鄧小平은 집권한 후, 반대로 농민에게 7할을 주고, 정부가 3할을 갖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제도개혁 하나만으로 중국은 대번에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생산성이 향상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鄧小平이 배운 것은 이것만이 아닌 것같다. 무역과 개방정책의 중요성도 배우지 않았나 싶다.
       管仲은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비축해 두고, 소금가격이 올라가는 雨期(우기)를 기다렸다가 내륙지방에 소금을 풀어 큰 이윤을 남겼다. 그것을 財源(재원)으로 써서 곡식을 시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들였다. 훗날, 가뭄이나 홍수 등 天災(천재)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管仲은 사들였던 곡식을 되팔아 훨씬 더 많은 이문을 남겼다.
       이렇듯, 管仲은 무역을 통해 齊나라의 식량문제도 해결하고 경제적 이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식량과 소금의 무기화로 내륙국가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鄧小平이 개방정책을 써서 對外무역을 확대하고 외국기업을 끌어들여 오늘날의 중국으로 발전시킨 것을 보면 마치 管仲이 무대 뒤에 앉아 코치를 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管仲의 위대함은 주인에 대한 작은 의리와 충성을 위해 죽지 않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大義를 위해 살았다는 점이다. 管仲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어쩌면 그러한 管仲의 재주를 알아보고 천거한 친구 鮑叔牙(포숙아)와 그 천거를 받아들여 「과거의 원수」에게 국가경영을 맡긴 桓公인지 모른다.
       3000년 가까운 시간을 격한 지금도 管仲같은 유능한 인물, 이해관계를 떠나 천거하는 鮑叔牙의 우정, 그를 重用한 桓公의 도량과 혜안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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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점심 식사 시간에 재미있는 토론이 있었다. 한 기업인이 리더십의 모범 사례가 될 만한 세계적 인물들을 12명 골라 그들의 사진을 싣는 달력을 만들어 나눠줄 계획이라고 하였다. 예술가, 군인에 이어 내년 달력은 정치인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20, 21세기에 한정하여 세계사의 발전에 기여한 12명의 지도자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同席(동석)한 4명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갔다. 정리하면 이렇다.
      
       1. 선정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共同善(공동선)에 기여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히틀러, 레닌, 스탈린, 체 게바라, 毛澤東(모택동) 같은 독재자나 혁명가들은 탈락된다. 이들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기준으론 그 지도자가 통치했던 나라가 큰 나라이거나 선진국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3. 세 번째 기준으로는 그 지도자가 물러나거나 죽은 뒤 그의 정치적 유산(이념, 제도, 노선 등)이 계승되어 그로 해서 나라가 발전했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고슬라비아를 공산국가중 가장 먼저 개방시켰고, 스탈린과 맞서 독자노선을 걸었던 티토는 이 기준에 걸려 탈락했다. 그의 死後(사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內戰(내전)과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티토의 노선이 후계자들에 의하여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후계자의 成敗(성패)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
       4. 네 번째 기준으론 建國(건국), 獨立(독립), 中興(중흥)의 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결론적으로 결과물을 먼저 보고 그 결과물을 만든 인물을 선정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선 動機(동기)보단 결과이다. 문학이나 사회운동에선 動機가 중요할지 모르나 정치는 어디까지나 결과로 평가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서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먼저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는 4選을 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2차 大戰 승리를 주도했다. 해리 트루먼. 그는 東西 냉전에서 자유세계가 이길 수 있는 기초를 놓았고 전략의 기본 방향을 잘 잡았다. 원폭 투하, NATO 창설, 마셜플랜 추진, 트루먼 닥트린, 한국전 참전 등 큼직한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로널드 레이건. 그는 소련 공산제국을 해체로 몰고간 인물이다. 총 한 방 안 쏘고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영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2차 대전 초기에 홀로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맞서 자유세계의 보루를 지켜냈던 윈스턴 처칠, 그리고 신자유주의 개혁을 성공시킨 마가렛 대처 여사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
       프랑스에선? 두 말할 것도 없이 드골 대통령이다. 독일군의 전격작전으로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하자 망명정부를 세워 저항을 계속했고, 그 덕분에 2차 대전이 끝날 땐 프랑스가 戰勝國(승전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10년간 은퇴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위기에 처하여 그를 다시 불러내자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여 5공화국을 10년간 통치하면서 고질적인 정치불안을 제도적으로 종식시켰다. 오늘의 프랑스는 드골이 중흥시킨 나라이다.
       독일에선? 戰後(전후) 독일의 부흥을 주도했던 아데나워, 또는 독일통일의 기관차 콜 수상 중 한 명이면 오케이!
       일본에선? 戰後 일본을 親서방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시킨 일본 중흥의 기수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이외의 인물이 있을 수 없다.
       중국에선? 모택동은 魔王(마왕)이니 젖혀놓는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혁 개방의 흐름을 만든 鄧小平(등소평)일 수밖에 없다.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급성장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주의적 정치와 자본주의적 경제를 혼합한 鄧小平 노선의 승리이다.
      
       머지않아 세계최대 인구국이 될 인도는? 간디는 정치 지도자로 볼 수 없으므로 제외한다면 인도 독립과 建國의 지도자 네루이다. 가난하고 복잡한 인도를 그래도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나라로 만들어 끌고 간 공로는 대단하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 여사 암살, 그의 아들 암살, 종교분쟁 등등 소란스럽기는 해도 민주주의식으로 굴러간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이다.
      
       동남아에선? 월남의 지도자 胡志明(호지명)을 거론한 이도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가였다는 점에서 失格(실격)되었다. 더구나 통일된 월남은 지금 사회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자본주의를 향해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수하르토를 꼽을 순 없다. 부패한 독재자였고 지금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모범적이지 않다.
      
       南美에선? 달력에 넣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 세계 5대 富國 중 하나였던 아르헨티나를 포퓰리즘으로 망친 페론을 넣을 수도 없다. 칠레가 가장 잘 나가는 나라이지만 수천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는 곤란하다. 공산 혁명가 카스트로나 선동가 차베스를 모범으로 삼을 순 없다.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앞으로 잘 하면 몰라도.
       아프리카에선? 한 사람이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언급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어 중동의 불씨 하나를 껐다. 그 代價(대가)는 암살이었다. 그런 점에선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지금 이집트의 상황이 말이 아니다. 사다트를 이은 무바라크가 30년을 지배하였지만, 이집트는 민주화도, 산업화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독재를 오래 했으면 경제라도 발전시켜야 할 것 아닌가?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있다. 남아프리카는 흑인 통치로 넘어간 후 살인사건이 너무 많이 난다. 이 부분에서 세계1등이다. 그럼에도 만델라의 도덕적 지도력이 백인 지배를 큰 유혈사태 없이 끝장 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스라엘? 단연 건국의 아버지 밴 구리온이다. 문제는 아랍 세력과 저렇게 싸우는 이스라엘 지도자를 영원히 기려야 할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가이다.
       대만? 본토에서 쫓겨나 이 섬으로 건너온 장개석과 그 후계자들이 모범적인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일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래도 모택동에게 져서 본토를 빼앗긴 인물을 師表(사표)로 내 세울 순 없다.
       이슬람圈(권)의 대표 선수는 누구인가. 터키공화국을 거의 혼자서 세운 케말 파샤를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오스만 터키 제국은 해체되고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케말 파샤 장군이 군대를 모으고 그리스를 밀어내고 오늘의 터키를 세웠다. 그는 이슬람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개혁을 했다. 政敎(정교)분리, 여성 참정권 허용, 문자개혁 등. 지금의 터키 군부는 이런 케말 파샤의 노선을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유럽식 선진민주국가는 아니지만 오늘의 터키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력을 제어하면서 민주주의를 가꾸어 나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나라이다.
      
       한국에서도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 물론이다. 한국의 국력이 세계 10위권이므로 당연히 대표인물을 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20세기에 국민국가로 출범한 여러 나라들 중 한국이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점에선 이론이 없다. 그렇다면 이 한국의 기적적 발전을 만든 지도자가 12명 안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더구나 한국의 발전모델은 후진국과 開途國(개도국)의 교과서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독립과 건국의 이승만인가,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인가? 두 사람은 거의 同級(동급)이다.
       싱가포르의 李光耀(이광요)는? 한 분이 추천했다. 토론을 해보니 탈락으로 결론이 났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싱가포르의 규모가 작다. 민주화도 안 되어 있다. 한국처럼 후진국과 개도국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 보편성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누가 대표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레닌, 스탈린은 자격 박탈이니 고르바초프가 남았다. 그는 소련을 개혁하는 데 실패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惡(악)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니 인류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다고 달력에 넣어 지도력의 모범으로 기려야 할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니 말이다. 고르바초프에게 상을 줄 사람은 하나님뿐일 것이다.
       내가 멋대로 달력에 넣을 세계적 지도자 12명을 결정한다면 이렇다. 李承晩, 레이건, 대처, 드골, 아데나워, 케말 파샤, 등소평, 네루, 요시다, 만델라. 두 명이 모자란다. 아무래도 이 달력을 보는 사람은 한국인이다. 한 명을 더한다. 朴正熙! 그래도 한 명이 모자란다. 미국에 한 자리를 더 주기로 한다. 한국을 두 번 살린 트루먼! 내가 너무 情(정)에 약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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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정말 實用主義를 아는가?
     
      管仲型 지도자-등소평, 이광요, 이승만, 박정희, 명치유신 주력들이
    동양적 실용주의 정치의 主流이다.
     
      趙甲濟 
        
      敵將을 재상으로 중용한 桓公
      
       기원 전 7세기 春秋戰國시대의 중국에 齊 나라가 있었다. 지금의 山東지방에 있던 나라이다. 이 나라에 管仲(관중)과 鮑叔(포숙)이란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은 同業을 했는데 돈을 벌면 管仲이 가져가는 일이 많았다.
       管仲은 鮑叔보다도 가난하였다. 그때마다 鮑叔은 「管仲은 나보다 못사니까」 하면서 참았다. 鮑叔이 돈을 대고 管仲이 장사를 해서 큰 손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鮑叔은 『돈이란 것은 벌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는 것이니까』라고 이해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齊 나라 왕은 襄公(양공)이란 사람인데 惡政으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두 동생 糾(규)와 小白(소백)을 추방하였다. 양공이 암살되자 齊 나라의 왕 자리를 놓고 두 동생인 규와 소백이 대결하게 되었다. 管仲은 규의 참모였고 鮑叔은 소백의 참모로서 서로 싸우는 입장이 되었다.
       管仲이 처음에는 유리하였다. 管仲이 이끄는 군대가 소백을 향해서 활을 쏘았는데 그의 허리띠에 맞았다. 소백은 일부러 죽은 척하였다. 管仲의 군대는 이제는 이겼다면서 마음을 놓고 천천히 규를 모시고 제 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백은 영구차 같은 데 숨어서 齊 나라로 급히 돌아가 먼저 王座를 차지해버리고는 군대를 끌고 와서 管仲의 군대를 격멸해버렸다.
       管仲은 포로가 되었다. 齊 나라의 왕이 된 소백은 桓公이라 불리게 되었다. 桓公은 敵將이던 管仲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고 했다. 이때 管仲의 친구 鮑叔이 나섰다. 鮑叔은 桓公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公께서 齊 나라만 다스리시려면 이 鮑叔의 보좌만 받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公께서 이 천하의 覇王이 되시려면 저의 실력으로써는 감당할 수가 없고 管仲의 보필을 받으셔야 합니다』
       鮑叔은 이렇게 해서 친구 管仲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천거하여 주었다. 管仲은 桓公을 극진히 받들어 곧 齊 나라를 중흥시켰다. 齊 나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 35개국을 병합하여 中原, 즉 中國 중심부의 챔피언이 되었다. 春秋戰國시대에 중국에선 여러 나라들이 覇權을 다투었지만 최초의 覇者가 된 것이 管仲이 보좌한 桓公이었다.
      
       실용적인 富國强兵策
      
       管仲의 정책은 요사이 말로 하면 富國强兵 정책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万乘, 즉 万臺의 戰車를 가진 나라에는 萬金의 상인이 있고, 千乘, 즉 天臺의 전차를 가진 나라에는 千金의 상인이 있으며 百乘, 즉 百臺의 戰車를 가진 나라에는 百金의 商人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군사력은 그 나라의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즉, 富國이 되어야 强兵을 육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管仲은 이런 말도 했다.
       『나라는 원래 財貨가 많으면 먼 데서도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어 있다. 땅을 개간하고 개발하면 몰려온 사람들은 머문다. 곡식창고가 차 있으면 사람들은 예절을 안다. 입고 먹는 것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榮辱을 안다. 법을 지키면 육친(六親)이 화합한다. 禮儀廉恥(예의염치), 즉 예절과 의리와 조심함과 부끄러움이 있는 나라에서는 임금의 명령도 통한다』
       管仲의 이 말은 정치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관중을 모델로 하여 소설을 썼던 일본작가는 이 말이야말로 춘추전국 시대 최고의 名言이라고 했다.
       관중은 인간이란 것은 물질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어야 도덕도 지킬 수 있고 예절도 알게 된다고 했다. 사람이 예절을 아는 나라에서 비로소 法治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金泳三 전 대통령 식으로 개혁이니 정통성이니 민족정기니 하는 좋은 말만 쓴다고 해서 도덕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잘 돌아가면 자연히 범죄자도 줄고 도덕은 정립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恒産이 있어야 恒心
      
       管仲은 관념적인 도덕론이 아니라 아주 실용적인 정치를 말하고 있다. 朴正熙式 실용주의인 것이다. 管仲의 이 말과 비슷한 말이 孟子가 한「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는 말이다.
       <안정된 생업(恒産)이 없으면서도 안정된 마음(恒心)을 품는 것은 오직 선비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백성으로 말하자면 안정된 생업이 없으면 안정된 마음도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안정된 마음이 없으면 방탕하고(放), 편벽되고(僻), 사악하고(邪), 사치한(侈)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죄를 저지르게 한 다음 좇아서 처벌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로 긁어서 투옥시키는 짓[罔(=網)民]입니다. 어찌 어진 사람이 군주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그물질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밝은 군주는 백성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족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건사하기에 족하게 하여, 풍년에는 1년 내내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사망을 면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백성들을 선하게 만들엇으니, 그런 까닭에 백성들이 따르기 쉬웠던 것입니다.>
       (孟子: 안외순 옮김>

       管仲은 위대한 개혁자였다. 당시 齊나라엔 公田法이란 토지제도가 있었다. 田畓(전답)을 9등분하여 그 가운데 8등분은 여덟 집에 나누어주고 나머지 한 등분의 농토는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여 거기서 나는 수입을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게 하였다. 추수하고 남은 이삭은 과부들이 줍도록 하여 일종의 불우이웃돕기로 쓰도록 하였다. 만22세가 되면 밭을 받아 경작을 하기 시작하고 만66세가 되면 이 땅을 국가에 돌려주도록 한 제도였다.
       이 公田制는 문제가 있었다. 세금을 내기 위하여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토는 아무래도 자기 것이 아니라고 등한히 하게 되었다. 세금이 적게 걷혔다. 북한에서 집단농장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개인 텃밭의 생산성이 몇 배나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인간이란 이기적인 동물이므로 자기 몫은 열심히 돌보지만 公共의 것은 적당히 한다.
       管仲은 이런 인간의 약점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公田制를 폐지하고 징세제를 만들었다. 즉, 농사를 지어서 일정한 비율의 수확을 세금으로 낸 나머지는 개인 몫으로 했다. 개인은 열심히 일한 만큼 자신이 갖게 되는 몫이 많아지니 모두가 倍前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齊 나라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군사력의 증강으로 나타나 齊 나라가 中原의 覇權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개혁은 북한의 집단농장을 개혁하여 私有化를 허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북한에 만약 管仲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집단농장을 과감히 철폐하고 그 땅을 중국처럼 개인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할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식량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다. 러시아의 개혁이 실패하고 중국의 개혁이 성공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러시아에서는 집단농장의 私有化를 하지 못했던 데 대해 중국은 鄧小平의 지도력에 힘입어 이것을 해냈던 것이다.
      
       상공업자들에겐 兵役면제
      
       管仲의 개혁이 또 있다. 관중은 齊 나라를 21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들 중 6개 지역은 상공업자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管仲은 이 상공업자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兵役의무를 면제해주었다. 管仲이 보기에는 상공업이 농업보다는 생산성이 높으므로 상공업자들을 군대로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이들로 하여금 열심히 돈을 벌고 물건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데 있어서도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것도 管仲의 아주 유연한 발상을 보여준다. 경직된 도덕론이나 기계적 평등론으로 보면 말이 안 될지 모르지만 管仲은 富國强兵이란 大命題를 위해서 實利와 國益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管仲의 이런 실용적 개혁정책으로 해서 齊나라에는 많은 상인과 기술자들이 몰려와서 장사도 하고 물건도 많이 만들게 되었다. 특히 해안지방에서는 소금을 만드는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 소금은 곡식만큼이나 중요한 물자였다.
       요사이 말로 하면 管仲은 외국인들이 많이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상공업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병역면제와 같은 특혜를 주었던 것이므로 기술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齊나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일종의 자유무역지대 구상이라 할까. 나라의 富가 증가하니 자연히 세금도 많이 걷히게 되었다. 세금이 많이 걷히니 군대도 강력하게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管仲의 개혁정책은 기원 전 7세기의 일이다. 로마가 겨우 생겨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런 시대에 벌써 管仲과 같은 실용주의 정치인이 중국에 나타났으니 人間事의 원리라는 것은 결국 그 본질은 변함이 없고 시대에 따라서 형식만 조금씩 바뀔 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戰國시대 최고 인물로 꼽히는 管仲은 또 관리들의 임무를 전문화한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齊나라의 공무원들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들을 총람하는 식이었다. 관중의 건의에 따라 桓公은 전문영역을 설정하여 업무를 세분하였다. 사회가 발전하여 복잡하게 되는 데 따른 정부기능의 조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管仲의 사상을 담은 책이 「管子」 24권이다.
      
       “백이 숙제가 먹은 고사리는 어느 나라 것이었나”
      
       司馬遷은 史記의 列傳부분을 쓸 때 맨 먼저 義理의 인간으로서 백이와 숙제를 소개하고 그 다음에 管仲을 소개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周 나라 사람이었다. 백이 숙제는 지금으로부터 한 3000년 전의 殷나라 고죽국이란 나라의 왕자형제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서로 왕이 안 되겠다고 양보하는 경쟁을 벌리다가 두 사람이 함께 나라를 떠버렸다. 이 무렵 殷의 주왕이 실정을 거듭하자 은 나라에 복속하고 있던 周 나라의 무왕이 혁명을 일으켜 殷나라를 뒤엎고 周 나라를 중국의 정통왕조로 세웠다.
       백이 숙제는 이런 혁명은 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주장하여 周 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는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만 먹다가 餓死했다. 백이 숙제가 먹었던 고사리도 따지고 보면 周 나라 땅에서 난 것이 아닌가.
       管仲은 齊 나라의 재상이 되어 40년간 桓公을 보필하여 이 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들고 죽었다. 그는 生前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나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鮑叔이었다』
       鮑叔이 그를 桓公에게 천거해주지 않았더라면 管仲은 桓公의 명령에 의해 사지가 찢기는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포숙과 관중의 이런 우정을 우리는 管鮑之交라고 부른다.
       중국에 管鮑之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돈을 벌어서 논을 사는 것은 괜찮은데 자신과 친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두고 못 본다는 뜻이다. 왜 이런 생각이 생기는 것일까.
       첫째는 한국인의 지나친 오기. 한국인들은 유달리 남에게 지기를 싫어한다. 특히 친구나 친척들 사이에서 그러하다. 그러다가 보니 멀리 있는 진짜 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가까이 있는 友軍을 敵으로 돌리는 나쁜 전통이 생겼다. 이런 성격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생존전략으로서 견지해온 事大主義와 관련이 있다.
      
       敵을 내부에서 찾는 한국인들
      
       사대주의는 우리의 국방을 중국이나 미국에 맡겨버리려는 자세이다. 국민과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국방을 외국에 맡겨놓고 우리 정치인들은 바로 자신의 주변에서 내부의 敵을 만들어내어 제 살을 뜯어먹는 자해적인 싸움박질만 벌였다. 조선조 시대에는 당파싸움에 눈이 멀어버린 관리들이 우리를 치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倭敵보다도 상대 당파를 더 적대시했다. 상대방이 하자는 데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었고 倭敵의 침략 의도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문제에까지 그런 당파적 이해관계를 개입시키는 바람에 우리 朝廷은 倭敵이 침략할 의도가 없다는 誤判을 하게 되었다.
       1979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중동의 어느 나라에 나가 있던 우리 정보부 요원들 사이에 內紛이 있었다. 불만을 품은 요원이 자신이 미워하는 상관을 제거해달라는 편지를 북한 대사관측에 보냈다. 그 상관의 人的 사항뿐만 아니라 그 상관이 다니는 루트와 시간표까지 가르쳐주어 테러를 할 수 있도록 안내까지 해주었다. 이 편지가 잘못 배달되어 우리 대사관에 전달되었다. 정보부 수사팀에서는 이 편지의 筆跡을 추적하여 범인을 체포하였다. 이 범인은 현역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예컨대 金玉均은 守舊派를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守舊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가 실패하였다. 많은 민주투사들은 북한에 이득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朴正熙 대통령을 골려주기 위해서 김일성의 염원이던 주한미군철수에 찬성하고, 한국 정부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고 미국에 요구하였다. 요즘도 與野 정치인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이들이 主敵을 북한정권으로 삼고 있는지 상대당으로 삼고 있는지 혼돈이 생길 정도이다.
      
       인간본성을 간파한 사람
          
       管仲의 위대성은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정확하게 간파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미화하지도 않고 인간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富國强兵 정책을 폈지만 전쟁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管仲은 그러나 백성의 약점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凡人은 남에게서 혜택받기만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미움의 시작이고 德은 원망의 바탕이 된다>
       인간심리의 통찰자인 管仲의 현대성은 그가 法治를 德治 위에 놓은 점이다.
       <聖君은 나라를 통치할 때 法에 의존할 뿐 良識에 의존하는 일이 없다. 근거 있는 계수에 의존할 뿐 막연한 이론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공적인 기준에 의존할 뿐 개인적인 사정에 의존하는 법이 없다. 당당한 태도에 의존할 뿐 임시변통의 책략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聖君은 몸을 편하게 하여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도 헛된 이름을 얻으려고 헛된 언변을 일삼지 않게 된다>
       管仲은 '법은 변하지 않아야 변란이 생기지 않는다. 법을 자주 바꿔서 백성을 지배하는 나라는 불행을 당한다'고 말했다. 管仲은 富國强兵을 통해서 백성이 ‘배 부르고 등이 따뜻하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君主의 권력이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 근대 정치학의 개척자인 16세기 프로렌스 사람 마키아벨리의 ‘君主論’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만큼 기원 전 7세기 사람 管仲의 선견지명에 놀란다. 한편으로는 정치의 본질이 時空을 초월하여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管仲은 말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지나치게 미워해서도, 지나치게 사랑해서도 안 된다. 지나치게 사랑하면 失德, 지나치게 미워하면 失威가 된다. 총명한 군주가 쥐고 있는 여섯 가지 권한이 있다. 그것은 살리고 죽이고 부유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하는 것이다. 군주가 처해 있는 자리가 네 가지이다. 文과 武, 威와 德이다. 그럼에도 군주가 쥐고 있는 권한을 신하에게 넘겨주는 수가 있는데 이를 脫柄이라고 한다. 군주가 처해 있어야 할 자리를 신하에게 넘겨주는 것을 失位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군주의 명령은 먹히지 않는다>
      
       非戰論 비판
      
       중국의 戰國시대에 齊나라를 패권국가로 만들었던 桓公의 명재상 管仲은 인물을 평가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을 놓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도 알아낼 수 있다. 그 사람이 교제하는 상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이 현명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다>
       管仲은 또 이렇게 경고했다.
       <군주된 사람이 늘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신하가 그 지위에 어울리는 德을 갖추고 있는가. 둘째, 신하가 봉록에 어울리는 공적을 세우고 있는가. 셋째, 신하가 그 관직에 어울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管仲은 요사이 한국에서 판을 치고 있는 평화지상주의를 예감한 듯 이를 兼愛사상이라고 부르면서 비판했다.
       <非戰論이 판을 치면 아무리 견고한 요새가 있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兼愛사상(남이나 자신을 똑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묵자의 사상)이 판을 치면 병사들은 戰意를 상실한다. 無爲長生 사상이 판을 치면 염치심이 없어진다. 민본사상이 판을 치면 군주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는다. 다수결주의가 판을 치면 賢者와 愚者의 구별이 없어진다. 拜金사상이 판을 치면 작위와 家門의 가치는 떨어진다. 정실만능 사상이 판을 치면 법률은 제 구실을 못한다. 아첨과 거짓이 판을 치면 간교한 인간이 득세한다>
       管仲은 위정자가 명심해야 할 國政운영의 다섯 가지 원리를 이렇게 제시했다.
      
       1. 토지는 정치의 기본이다.
       2. 朝廷은 사회질서의 중추이다.
       3. 市況은 물자의 수급상황을 보여주는 기본이다.
       4. 화폐가치는 경제 동태의 척도이다.
       5. 軍備는 國力에 맞추어야 한다.
      
       너무나 명확한 뜻이므로 달리 해설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오늘날 한국의 위정자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말이 있다면 '조정은 사회질서의 중추이다'라는 대목이다. 좌파정권 시절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에 기초한 法治주의를 우습게 보는 듯한 언동이 朝廷, 즉 청와대發로 매일같이 나왔다. 사회질서의 중추가 이 모양인데 治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부안군수가 집단린치당해도 경찰이 눈치만 보고 방관했으니 위정자로선 이 이상의 타락이 없는 것이다.
      
       管仲의 제자들: 鄧小平, 명치유신 主力들, 李承晩, 朴正熙, 李光耀
          
       管仲의 동양적 실용정치의 泰斗이다. 주자학적 관념론과 명분론, 그리고 科擧制로 뽑힌 文民 출신 관료집단이 지배해온 동양(일본은 예외)에서도 富國强兵과 생산적 정치의 전통을 이어온 이들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명분론이 퇴색하자 管仲型의 실용론자들이 東洋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이것이 東北亞와 東南亞 발전의 리더십이 되었다.
       일본의 明治維新 주도세력, 중국의 鄧小平, 싱가포르의 李光耀, 한국의 李承晩 朴正熙가 성공한 동양적 실용정치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렇다.
       1. 富國强兵을 국가목표로 했다.
       2. 이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對外的으로는 개방정책을 썼고, 對內的으로는 시장주의에 따른 경쟁과 자율을 촉진시켰다.
       3. 애국적 국가엘리트 집단을 만들어 이들이 민중지향적인 정책을 펴도록 했다.
       4. 이들은 自主的이었으나 닫힌 自主가 아니라 열린 자주를 지향했다.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국가주의자였고, 배타성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애국자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5. 이들의 행태는 합리성, 과학성, 愛國愛族心에 바탕을 두었다. 朱子學的 명분론의 결정적 결함은 명분을 실천할 방법론이 없었다는 점인데 管仲型 지도자들은 효율적인 공조직을 건설하여 생산성을 확보했다.
       6. 이들 실용정치인들이야말로 동양의 先進세력이다. 毛澤東과 金日成으로 상징되는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은 주자학적 명분론의 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守舊세력이다.
      
       李明博 대통령이 말하는 실용주의가 ‘장돌뱅이의 타산’을 벗어난 역사적 맥락을 갖추려면 自主, 愛國, 富國强兵, 反共이란 단어를 낡은 이념으로 경멸하고픈 유혹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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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꾼 1980년대의 여섯 巨人
     
      대처, 요한바오로2세, 바웬사, 레이건, 등소평, 고르바초프가 공산세력을 무너뜨렸다.
     
      趙甲濟
     
      1970년대는 이른바 데탕트(Détente)의 시대였다. 데탕트라는 佛語는 긴장완화라는 의미이다. 1970년대초 키신저가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시작한 데탕트 시기에 美蘇 냉전의 부분적인 완화가 이뤄졌다. 核전쟁을 피하기 위한 군축협상이 추진되고, 상호간 체제를 인정한다는 합의가 이뤄졌으며, 공산권과 자유진영 사이의 교류와 무역이 확대되었다. 소련도 自國民들에게 부분적인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72년의 전략무기감축협정, 1975년의 헬싱키 선언 같은 구체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美蘇 사이엔 핵무기에 의한 파괴 능력이 균형점에 도달했다. 이를 정책화한 것이 '상호파괴확인(mutually assured destruction:MAD)'이란 개념이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과 소련이 다 멸망하도록 하는 구조였다.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를 실어나르는 상대의 미사일에 대한 방어망을 고의로 만들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래야 共滅의 공포로 해서 핵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 데탕트 기간중에도 공산권과 자유진영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월남전쟁, 제4차 중동전쟁, 그리고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美蘇는 편을 들어야 했다. 자연히 대리전 양상이 되었다. 1979년 중동에서 미국의 맹방 역할을 하던 이란이 호메이니 혁명으로 反美국가가 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은 정권을 잡은 뒤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여 직원들을 인질로 삼았으나 미국은 속수무책이었다. 1980년 봄 미국의 무모한 구출작전은 이륙도 하기 전에 실패했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1980년 카터 미국 대통령이 對蘇 경제제재를 개시하고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그해 11월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는 데탕트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여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데탕트 시대는 끝났다.
      
       1980년대에 미국은 레이건의 지도하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對蘇 군비경쟁을 강화했다. 레이건은 데탕트가 평화공존이란 美名下에서 악의 제국인 소련 공산세력을 존속시켜주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소련과의 공존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 공산 체제의 존속으로 소련과 동구권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유를 속박당하고 제3 세계에서 공산주의가 팽창했다. 레이건은 소련 공산 세력은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확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한 공산세력 붕괴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자유세계가 가진 장점, 즉 경제력과 자유, 개방과 자율의 힘으로, 평화적으로 惡의 제국을 해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레이건과 미국만의 힘으로 공산권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레이건의 등장을 전후한 시기에 공산주의를 변화시키고 냉전을 끝장낼 만한 경륜과 용기를 가진 巨人들이 역사의 무대에 한꺼번에 등장했다. 영국의 대처 수상, 중국의 鄧小平,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폴란드의 자유노조 지도자 바웬사, 그리고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레이건과 함께 공산주의를 해체하는 데 협력했다.
      
       鄧小平은 '쥐를 잡기만 한다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교조적 공산주의를 실용적 공산주의로 재해석했다.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끌고간 그는 공산주의도 국민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데, 다만 시장경제를 수용해야만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중국은 시장경제를 부정한 소련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대처는 유럽식 좌파 사회주의에 볼모가 되어 경쟁력을 잃어가던 영국을 개혁하여 생동하는 경제대국으로 회생시켰다. 그는 규제완화, 작은 정부, 민영화 정책이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소련 공산주의에도 큰 타격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의지하는 대중이 대처 같은 보수파의 개혁에 찬동한다면 마르크스 이론은 설 데가 없어지는 것이다. 대처 역시 데탕트에 비판적이었다. 스스로 하이에크의 제자였다고 부른 그는 침략적인 소련을 '짐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대처, 레이건, 요한 바오로 2세, 바웬사는 모두 신념에 찬 언어의 힘을 아는 지도자였다. 그들은 신념과 진실이 담긴 말의 힘으로 惡의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2차세계대전 때 영어의 힘을 동원하여 히틀러를 무너뜨린 처칠 이후 처음으로 名言과 名文들이 많이 나온 시기였다.
      
       폴란드 출신의 두 사람, 요한 바오로 2세와 바웬사가 소련 공산제국의 붕괴의 주역이 된 점은 흥미롭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인구의 20%가 사망한 곳이 폴란드였다(이 사망률은 독일이나 소련보다 더 높다). 나치 독일이 망했음에도 폴란드는 자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소련 전체주의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폴란드 사람들의 해방이야말로 공산권이 붕괴해야 할 이유고 상징이었다. 서구의 지도자들은 폴란드의 자유화를 유럽문명의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978년 10월16일 바티칸에 모인 추기경들은 58세의 폴란드 출신 한 추기경을 교황으로 뽑았다. 요한 바오로 2세로 불리게 된 이 사람은 132년만에 가장 젊은 교황, 455년만에 첫 非이탈리아인 교황, 그리고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었다. 폴란드의 비극을 체현한 그는 자유노조 운동의 기수 바웬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폴란드에서 카톨릭은 공산당 이상의 정신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레이건은 일종의 '反共신성동맹'을 맺은 듯이 소련을 압박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암살기도의 표적이 되나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교황암살기도의 배후엔 불가리아 정보기관과 소련이 있었고, 레이건 암살기도는 한 젊은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여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었다.
      
       폴란드의 자유노조는 공산당의 권력독점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1981년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폴란드에 소련군대를 보내 자유노조 운동을 탄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린다. 폴란드의 强者 자루젤스키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소련의 개입을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펴고 자유노조를 탄압하는 척했다. 1989년 6월 자루젤스키는 자유노조가 의회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했다. 자유노조는 압승하고 폴란드의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공산세계 최초의 이 평화적 정권교체를 막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89년 8월24일 공산권 최초의 민주정권이 선거를 통해 들어섰다. 이것이 냉전 종식의 선언이었다. 학자들은 이날을 공산권 붕괴의 신호탄이 오른 날, 냉전종식이 시작된 날로 규정한다. 연말까지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동독에서 공산당 세력이 밀려난다.
      
       자유혁명이 유럽을 휩쓸고 있던 1989년 10월8일 오전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을 방문하여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했다. 이 대화록은 공산권의 민주화를 주도한 인물과 한국의 민주화를 주도한 인물과의 대화란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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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우 대통령 :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시차도 많은데 잘 쉬셨습니까?
      
       요한바오로2세 : 8시간 시차가 있는데 잘 쉬어서 괜찮습니다.
      
       대통령 : 지난 1981년 겨울에 바티칸에서 저의 내외가 뵈온 적이 있는데, 그런 지 8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전과 똑같이 건강하신 모습을 뵈오니 기쁩니다.
      
       교 황 : 바티칸에서 뵌 기억이 납니다. 저는 서울을 두 번째 방문합니다. 작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이번 성체대회도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대통령 : 성하께서 이렇게 방한하신 것 저와 우리 국민 모두가 감사합니다. 1981년 뵈었을 때는 제가 올림픽준비 책임자 자격이었는데, 그때 성하께서 한국을 위해서 축복하고 기도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북한과 김일성에게도 한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시어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원동력이 되어 올림픽도 성공하였고, 저도 나라의 책임을 맡은 대통령의 직에 오르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교 황 : 1984년도에 방한한 후 이번 성체대회로 오게 되니 5년이 지났는데,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분단되어 같은 민족의 아들, 딸들이 나뉘어 있어 가슴아픕니다. 그러나 변화가 시작되고 있고, 어느 의미에서는 가능한 변화의 첫 징후가 보이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 제도적 차이가 깊기 때문에 어렵겠지만, 하여간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중심지의 로마에서 극동의 끝에 있는 한국을 애정과 희망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로 한국에서도 동구에서와 같은 변화가 이룩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상황은 동구와는 다릅니다.
      
       대통령 : 말씀 감사합니다. 성하의 기구로 우리 세대내에 바람직한 변화가 꼭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작년 서울올림픽의 구호가󰡒조화와 전진󰡓이었습니다. 분단된 한국에서 세계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을 성공시키자는 우리의 호소가 전세계의 공감과 지지를 받아 훌륭한 대회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성하의 기도의 뜻을 새겨서 우리는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저는 유엔에 가서 연설하면서 앞으로는 한반도의 긴장과 적대감을 불식하고, 화해와 이해를 이룩하겠다는 결의를 다짐했는데, 북한을 고립상태로부터 국제사회로 개방토록 유도하겠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하여 동구권을 포함한 모든 나라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세계 여러 나라들이 환영하고 있는데 반하여 북한만은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두드리라,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말과 같이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북한도 이에 응해 오리라 믿습니다. 성하께서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 황 : 폴란드, 헝가리 등 동구권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공산체제가 붕괴하고, 특히 경제파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국인 폴랜드에서는 특히 솔리다리티라는 강력한 자유노조의 압력도 작용했습니다. 그에 따라 공산당은 그 절대다수의 결정으로 원탁 정치협상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고, 그 결정에 따라 완전한 것은 못되지만, 처음으로 자유선거가 이루어져 자유노조가 절대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새 정부의 수상도 비공산당원인 천주교도가 되었고, 각료의 다수도 공산당원이 아닌 비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한 민주정치라 할 수는 없지만, 큰 진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전의 공산정권의 실책으로 인한 경제파탄을 어떻게 수습할지 큰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만, 서방의 협조와 전 국민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헝가리도 비슷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고, 최근 동독에서도 체제 자체에는 변화가 없지만, 국민간에는 큰 동요가 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체제자체는 경제적 낙후로 바꾸어지겠지만, 그 동안 그 체제 밑에서 살아온 국민의 사고방식(mentality of people)을 바꾸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북한이 동족이라지만, 40년 이상 비민주적이고, 부자유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방식이 그에 젖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젊은이들에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개방적이고, 변화를 희구하며, 진리와 선과 자유에 민감합니다. 최근 중국에서 우리는 그 실례를 보았습니다. 앞으로 공산권의 변화는 정치체제의 변혁과 아울러 인민의 체질(human composition) 개선이 큰 과제가 될 것입니다. 공산국가 중에서도 동구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초가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이룩될 수 있는데, 쿠바나 북한 같은 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동구권에서도 루마니아, 체코와 동독은 아직도 개혁을 거부하고 있는데, 앞으로 공산세계 개혁이 어떻게 될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 : 전세계 특히 동구의 변화를 분석하시고, 민족분열과 갈등이 상존하는 한국문제 해결의 실마리에 대하여 갚은 관심을 가지신데 감사드립니다.
      
       우리 나라는 과거 이조 500년의 전제왕정과 근 40년의 일제통치가 있었고, 2차 대전이후 비로소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간에 많은 변화와 시행착오를 경험해 왔습니다. 오랜 권위주의 통치에 대하여 국민들이 분노하고 민주화를 요구했으므로 저는 1987년에 6.29 민주화선언을 하였고, 그 이후 민주화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라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자유, 개방과 함께 사회각계의 욕구가 분출하여 법질서까지 문란하게 되어 국민생활과 민주질서를 해치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민수준이 높기 때문에 국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민수준이 높기 때문에 국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우리 나라 기독교의 큰 영향입니다. 천주교도는 1984년에 약 200만 명이었는데, 성하께서 방한하신 후 그 수가 늘어서 현재는 250만에 이르고 있고, 그 외 신교도는 약 1,000만 명 정도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신앙은 민주질서를 유지하고 물질만능주의의 폐단을 시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내정치는 민주화의 궤도에 진입했으니 앞으로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가장 큰 우리의 문제는 역시 북한입니다. 성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북한에는 아무런 종교의 자유도 없습니다. 이번 성체대회에도 초청했지만, 그들의 대표는 오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복음의 전파로 개방을 촉진시켜야 될 것입니다. 성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젊은 세대에 기대를 걸어야겠습니다. 최근 그들간에도 동요의 기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해외에 나와 있는 외교관이나 유학생들이 자유를 찾아 이탈하고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변화하되, 지나치게 급격하게 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나친 변화는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계적으로 변화되기를 우리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체대회의󰡒그리스도-우리의 평화󰡓라는 메시지가 북한에도 전파되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 황 : 기독교의 모든 종파 특히 카톨릭이 그러한 변화에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기회에 더욱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번 성체대회에는 전 교회가 참여했고, 이를 통해서 한국교회와 한국 사람들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것입니다. 한국과 한국의 민주화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전번 방한시 각하의 전임자께서 저쪽에 있는 지도를 가지고 서울과 휴전선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고르바쵸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무력 위협은 계속 경계해야 합니다.
      
       대통령 : (교황을 지도 있는 곳으로 안내하고) 이곳이 서울이고, 여기가 휴전선입니다. 이 휴전선 양쪽에 100만명 이상의 중무장한 병력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 고르바쵸프의 영향이 중국에까지는 도달한 것 같은데, 아직은 북한에는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소련은 북한에 대하여 MIG-29기 등 신예무기를 공급해 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장 신부께서도 잘 아시지만, 북한의 종교실상은 참담합니다. 그들의 국어사전에 보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죄악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여러 가지 드릴 말씀은 많으나, 시간이 다 되어 나가 보실 시간이 된 듯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좋은 여행하십시오.
      
       교 황 :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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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군대의 힘은 상당히 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해방군을 장악하고 있습니까.
      
       『鄧小平이 당과 군대를 장악하고 있으니 당이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겠지요』
      
       ―많은 사람들은 鄧小平이 죽은 후엔 리더십이 무너져 중국 공산당의 군대 장악력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鄧小平이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개방정책을 지속할 수 있는 정비를 해놓고 갈 것이고, 빨리 죽으면 군을 조직적으로 정비하는 것이 늦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내수에 중점 둔다
      
       ―얼마전 중국을 다녀온 일본경제 신문기자가 『가서 보니 중국은 내수 중심의 경제이더라. 한국은 중국을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국은 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수출을 중시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수에 치중할 것입니다. 중국이 무역을 하는 것은 자본을 끌어들여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의 무역규모가 한국을 능가했습니다. 세계시장에서 중국은 우리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 중국의 경제가 어느 수준에 올라서게 되면, 경쟁자가 아닌 우리의 방대한 시장이 될 것이란 의견이 있습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중국이 잘 살게 되면 미국처럼 전세계를 먹여 살리게 되겠지요. 그런데 저는 반도체와 철강을 제외한 지금의 전제조업의 비교 우위가 없어져 궁극적으론 중국에 지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한 우리의 좌표 설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창의력 있는 인력자원의 개발과 과학기술의 개발밖에는 다른 방안이 없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을 꿰뚫어 보고 21세기를 대비한 대한교육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질적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질적인 대학 교육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대학 안에 기강이 있어야 합니다. 기강이 바로 선 대학이라야 교수와 학생이 부지런히 공부합니다. 총장선거 같은 것을 해선 대학교육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가 없어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집단은 기업가집단이고 가장 경쟁력 없는 집단은 교수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업가에 대한 평가는 절하하고 교수집단에 대해선 과대평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대학에서는 전임강사만 되면 평생이 보장됩니다만 미국의 대학에서 전임강사, 조교수는 계약직입니다. 교수 사회에 경쟁이 도입되어 있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한국의 어떤 대학에 갔더니 15년 전에 만든 노트로 아직도 강의한다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래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대학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럼요. 그래서 우리의 미래가 비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원은 인적자원과 과학기술뿐입니다』
      
       ―앞으로의 일본은 대학과 기업 전체가 과학기술을 연구함으로써 일본 전체가 연구소가 되고 공장은 외국에 두는 형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북아지역의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동북아지역의 나라를 돕지 않으면 일본은 결국 이 테두리를 망가뜨리는 역할을 할 지도 모릅니다. 일본 돈 1만엔에 나오는 게이오(慶應)대학 창시자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가 아시아를 벗어나자는 탈아론 (脫亞論)을 주장했었는데 지금은 아시아와 접촉하자는 접아론(接亞論)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도 이제는 이런 변모된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1백년 만에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李光耀 전 싱가포르 수상이 『장차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는데 하나가 일본이 자본과 기술을 이 지역에 풀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 이 지역에 군사적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남아서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군국주의 테두리 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라 사고하는 방식이 다른 나라를 무시하고 종속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자라나는 신세대는 평등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은 李光耀 전 수상이 전제조건으로 말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일본의 뉴리더로 꼽히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는 과거의 일본 지도자와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빙빙 돌리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한다든지….
      
       『호소카와(細川) 일본 총리가 과거에 동서문화센터에 왔을 때 만났었는데 아주 개방적입디다. 영어도 잘 하고 아주 진지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과거의 일본 지도자들과 다른 것 같습니다』
      
       ―호소카와나 오자와 같은 일본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일본은 경제성장만 추구하고 국제사회에 대한 책임 있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하겠다는 쪽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이 우리를 바짝 쫓아오다 보니 우리의 미국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대신 우리는 중국시장을 개척해 미국에서 잃은 것을 보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요 시장이 선진국인 미국에서 개도국인 중국으로 이전하게 된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제품을 만들다가 낮은 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이전하게 된다는 의미 아닙니까. 우리는 역시 미국·일본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제품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5∼10여년간 지금처럼 계속해서 인전 가원과 과학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세계 시장에 팔아먹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 천진 공단에선 한국이 투자한 공장에서만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과거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업체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나 군대까지 출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외국에 나가서도 한국식 사고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가.
      
       『한국인들은 배타적이라 타민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한 편입니다. 왜정 때 일본 관동군의 앞잡이로 중국에 들어갔음에도 마치 우리가 중국을 쳐들어 갔었던 듯 우쭐한 마음으로 「뙤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근세사에서 일본을 한번도 앞서보지 못했으면서도 일본인들에게는 「왜놈들」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단일민족이라 그런지 몰라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행동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국 화교들을 못살게 볶아서 쫒아낸 나라는 한국뿐일 것입니다』
      
       한국, 화교 쫓아낸 것은 큰 실수
      
       ―한국이 화교를 쫒아낸 것은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화교는 대개 산동성 출신들이었는데 지금 산동성과 뱃길이 놓였습니다. 이 화교들이 남아 있었으면 활발하게 상업이 이뤄져 상호 발전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중국과 연해안 개발계획을 처음 논의했을 때 중국 측에서는 한국에 산동성 출신 교포들이 있어 상호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당한 기대를 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화교들이 없었어요. 이러한 편협된 사고를 줄이려면 먼저 객관적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훈력을 해야 합니다. 저는 동북아 경제권 개발사업의 한 맥락으로 한중일의 역사교과서 비교연구를 시킨 적이 있었는데 세 나라 교과서가 공통적으로 객관성을 잃고 있었습니다. 역사 기술에 객관성을 잃었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생략했다는 뜻입니다. 왜곡보다 더 심각한 것이 생략부분입니다. 동양 3국은 역사 교과서에 빠뜨린 것과 왜곡한 부분을 되살려서 역사를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 교수와 같은 사람은 실제로 「일본인은 도래인이다」라면서 역사 교과서의 객관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과 협력하려면 인맥의 형성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역시 상대국에 대한 문화적인 이해가 있어야겠지요.
      
       『그럼요. 역사를 객관화해놓으면 상대국의 문화에 대해 바르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경제 원리는 서양의 계약적인 경제원리와 달리 문화적, 역사적, 제도적인 것을 내포합니다. 우리에게는 폭을 넓혀서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동양3국은 동일한 역사 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평양처럼 주체를 외치다가 뒤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중국은 북한을 계속 지원할까요.
      
       『지난 10월2일 중국 인민해방군 창설 기념식에서 金日成의 축하 전문을 가장 앞에 놓았던데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이겠지요.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붕괴는 원치 않기 때문에 북한의 자위가 가능하도록은 도와줄 것입니다. 북한이 붕괴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동북아에서의 함수가 바뀌는 것이므로, 앞으로의 상황예측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중국은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북한이 대남도발을 한다면 중국은 어떻게 나올까요.
      
       『북한의 대남도발에 적극 반대할 것입니다』
      
       ―중국의 입장에는 한국의 경제적 번영이 자기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입니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국은 북한이 붕괴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중국이 러시아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당분간은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자국의 내부사정 때문에 그럴 여지가 없습니다. 鄧小平은 지금의 러시아 사태가 최대의 교훈이기 때문에 내부를 다지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시간이 지나면 지난 세기 러시아에 넘겨준 영토를 되돌려 받으려고 애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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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後記/'아시아 冷戰史'의 중대 관점
     
      趙甲濟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을 어제 읽었다. 일본 法政大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씨가 쓴 '아시아 冷戰史'란 책이었다. 작년 9월에 中公新書 문고본으로 나온 222페이지짜리 작은 책이다. 著者는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를 많이 인용하면서 2차 세계대전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한반도에선) 戰後 냉전의 줄기를 아주 쉽게 서술했다.
      
       그는 특히 북한정권의 성립과 생리를 중점적으로 해부했다. 著者는 북한정권의 탄생이 철저하게 스탈린의 시나리오에 의한 것임을 설명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소위 國號도 소련에서 작명한 것을 直譯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의 헌법도 1948년4월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스탈린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 주다노프가 참석한 가운데 결정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는 북한요인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現代러시아 역사가 안드레이 라니코프는 '북한정권은 소련의 제25軍이 만든 괴뢰국가'라고 단정했다. 그는 東歐공산국가를 만들 때보다도 소련의 역할이 더 절대적이었다고 분석했다. 소련군 장교로서 출세할 생각을 하고 있던 金日成을 꼭두각시 지도자로 선택한 것도 소련이었다.
      
       당시 김일성과 親交가 있었던 소련군 장교 고비첸코는 '김일성의 미래의 꿈은 소련군의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막 출생한 아들 김정일에게 유라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지어준 것이 그런 정황을 보여준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북한노동당을 소련공산당을 본떠서 만든 사람도 소련공산당원 許嘉誼였다. 군대 등 북한의 국가기구도 거의 전부 소련이 만들어주었다.
      
       '아시아 冷戰史'에서 저자 시모도이 노부오 교수는 중대한 관점을 하나 제시했다. 그는 소련이 2차세계대전 후 미국을 따라잡기 위하여 핵무기 개발에 국력을 집중하는 바람에 1946-47년 사이 대기근이 발생하여 200만 명이 굶어죽었고, 중국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대약진 운동을 강행하다가 약2000만 명을 굶겨죽였으며, 1990년대 북한정권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중 약200만 명을 아사시킨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면 국민들에게 큰 부담과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북한의 餓死사태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핵무기 개발이 부른 人災였다. 즉 핵개발의 代價였다>
      
       이를 필자가 부연설명한다. 金日成-金正日 공동 정권은 1990년을 전후하여 동구 및 소련 공산제국이 붕괴하자 체제의 위기에 직면했다. 고르바초프나 鄧小平식으로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핵무기를 개발하여 이것에 의지하는 공갈외교로 버틸 것인가. 북한정권은 태생이 괴뢰적이었기 때문에 인민들에 대한 동정심이 원천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주민들을 먹여살리는 문제를 포기하고 집권층 일당이 공포의 논리로써 생존하는 방식, 즉 핵무기 개발을 선택했다. 그렇게 되니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경제는 붕괴되고, 북한정권도 군사와 외교에만 집착하고 경제개혁은 거부했다. 그 결과가 수백만의 굶어죽음, 또는 굶겨죽임으로 나타난 것이다.
      
       김정일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부 개혁을 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핵무기가 체제의 생존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手를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핵무기를 포기해야 개혁으로써 다른 살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핵무기 개발이 북한주민 집단 餓死의 主因이라면 '북한의 핵문제는 한국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이 해결해주어야 할 문제'라느니, '북한의 핵은 통일후에는 우리 것이 될 것이니 내버려둬야 한다'는 남한내 철부지들의 주장이 얼마나 민족반역적이고 反인륜적인지 알 수 있다.
      
       한국 정부만 미국과 공조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북한의 핵무장을 방치한 책임을 져야 할 두 사람, 金大中 盧武鉉의 역사적 범죄를 새삼 생각케 하는 책이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