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대만해협에 해군 8함대 파견… 중공, 대만 접수 불가능해지자 6·25에 인민군 투입"
  • ▲ 6.25전쟁 70주년인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전사·순직자 묘역이 한산하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수도권 공공시설 및 다중시설의 한시적 운영중단 방침에 따라 지난 1일부터 일반시민의 방문을 제한하고 있다.ⓒ뉴시스
    ▲ 6.25전쟁 70주년인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6.25전쟁 전사·순직자 묘역이 한산하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수도권 공공시설 및 다중시설의 한시적 운영중단 방침에 따라 지난 1일부터 일반시민의 방문을 제한하고 있다.ⓒ뉴시스
    70년 전 오늘 김일성이 이끄는 13만5000명의 북한 인민군이 남한을 침공해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오늘날까지 상처를 남긴 전쟁을 시작했다. 6·25전쟁은 발발 5년 전에 끝난 더 대규모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미군 3만6000명이 목숨을 잃은 미국에서조차 6·25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시 미국을 포함한 16개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 유엔군사령부 산하에 병력을 파견했다. 북한은 중국이 도왔다.

    미국 CNN은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해 '당신이 잘 몰랐던 6·25전쟁에 관한 5가지 사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아래는 해당 보도를 요약한 것이다.

    1. 미군이 평양을 8주간 통치했다

    1950년 10월19일 미군 제1기병사단은 남한의 군대와 함께 평양을 접수했다. 10월22일 미8군은 김일성이 사용하던 건물에 본부를 설치했다. 이후 같은 해 11월 말 중공군이 참전했고, 미군은 12월5일까지 약 8주간 평양을 통치했다. 현재 평양은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도시가 됐다. 미국 여권을 가지고 있어도 미 국무부의 특별허가 없이는 평양에 들어갈 수 없다.

    2. 북한에 투하한 폭탄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투하량보다 많다

    6·25전쟁 사진은 장진호전투와 인천상륙작전 같은 지상전투가 담긴 사진이 많다. 하지만 미군의 북한지역 공격작전은 대부분 공중폭격이었다. 미군 폭격기는 6·25전쟁 3년 동안 63만5000t의 폭탄을 북한지역에 떨어뜨렸는데, 역사학자 찰스 암스트롱의 주장에 따르면 이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태평양에 투하한 폭탄 50만t보다 많다. 

    실제로 이 같은 폭격으로 북한지역의 건물 대부분은 폭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암스트롱은 이것이 북한 공산당에 큰 교훈을 남겼다고 지적하며 "북한은 자신들이 미군의 공습에 취약하다는 걸 깨달았고, 대공방어 강화와 지하시설 구축에 심혈을 쏟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기 위해 마침내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분석했다.

    3. 6·25가 대만을 살렸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대만으로 건너간 장제스와 국민당 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며 중공의 이 같은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바로 미 해군이 중국 코앞에 닥쳐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6·25전쟁이 동아시아 전체로 번질 것을 염려해 중국대륙과 대만 사이의 해협에 미 해군을 파견했다. 미 국무부 자료에 따르면, 1949년 말에서 1950년 초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대만을 접수하는 것을 방치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6·25전쟁이 터지자 (다른 전쟁을 수행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대만해협에 미 해군 제8함대를 파견했다. 대만 접수가 불가능해져 분노한 중국 공산당은 전선을 한국 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인민군을 6·25전쟁에 참전시켰다.

    4. 최초의 제트기 도그파이트

    도그파이트는 전투기가 공중전을 하면서 적기의 뒤를 쫓아 총을 난사하는 격추전이다. 제트 전투기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출현했지만, 이 같은 '탑건' 스타일의 전투가 최초로 이뤄진 전쟁이 바로 6·25전쟁이다. 기록에 의하면 1950년 11월8일과 9일 신의주, 압록강 인근, 중국 국경지대에서 도그파이트가 있었다고 한다.

    8일 도그파이터의 미 공군 측 주인공은 F-80 슈팅스타 기종이었고, 이 전투기와 맞닥뜨린 것은 소련제 미그-15s 기종이었다. 이 미그기는 중국의 기지에서 출발해 소련군 조종사가 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한 보고서에는 F-80이 미그-15s기를 60초 만에 격추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소련 측 기록에는 이날 소련 공군이 전투기를 잃었다는 기록이 없어 아직까지 논란이다. 9일 도그파이트는 미 항공모함 USS 필리핀시에서 이륙한 F9F 전투기가 압록강 다리 공습 도중 미그-15기를 격추한 것인데, 이날 격추 사실은 소련 측 기록도 인정했다. 

    5. 미 의회는 6·25 참전선언을 하지 않았다

    6·25전쟁 참전은 '기술적으로는' 전쟁이 아닌 '경찰적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 헌법에는 오직 미국 의회만이 참전을 선언할 수 있다. 6·25전쟁은 그와 같은 의회의 선언 없이 미군이 해외에 파병된 최초의 전쟁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기록은 "미국 외에 15개국이 유엔군사령부 산하에 군대를 파병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공식 참전선언을 받지 않았다. 그와 같은 결정은 '경찰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6·25전쟁 이후 미국의 '경찰적 조치'는 미국이 타국에 군사적 개입을 결정하는 새로운 '표준'이 됐다. 베트남전쟁·이라크 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코소보전쟁 등 모든 군사개입에서 군사력의 사용을 의회가 승인하는 형태로 이뤄져왔다. 미 하원 웹사이트에는 "이런 형태는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에 군대를 파견하는 데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