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말이면 자유당 정권의 횡포가 4. 19 혁명의 원인을 난폭하게 만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 무렵 일어난 사건 중 하나가 진보당 사건이었다. 이 사건 피고인들이 1심 재판부(류병진 부장판사)에 의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중심인물 조봉암 피고인도 별건(別件)과 련해 5년 형을 받았을 뿐, 그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 피고사실과 관련해선 무죄판결을 받았다.

     

     류병진 판사로서는 당시의 정치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 있는 소신 판결을 한 셈이었다. 이에 대해 집권당인 자유당이 길길이 뛰었고,  길거리에는 “용공 판사 류병진을 타도하라”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우익청년단체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뿌린 것이었다. 요즘 운동권이 그 때 있었다면 아마 ‘극우 적폐 세력’의 소행이라며 게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60년 후 서울 장안에선 그 우익단체와는 정반대 끄트머리에 있는 운동권 패거리가 여권(與圈)의 입장에서 사법부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否定)하고 있다. 드루킹 사건의 김경수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한 재판부를 성토하고 이를 적폐로 몰아 ‘탄핵‘ 시키겠다는 것이다.

     

     세상은 아무리 돌고 도는 법이라곤 하지만, 자기들이 악(惡)이라고 규정해 마땅히 ’혁명‘ 해야 할 상대라고 지목한 세력이 했던 행위를 이렇게도 똑같이 베껴서 하는 운동권의 뻔뻔함에는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질서의 핵심적인 요건 중 하나는 제도에 의한 통치다. 제도에 의한 통치란 입법 사법 행정을 군중에 맡기는 게 아니라 법이 선출 또는 임명한 전문가 집단에 맡기는 통치다. 이걸 무시하고 군중이 들고 일어나 매사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그게 바로 홍위병 직접민주주의다. 아건 결국 군중을 조종하는 ’아방가르드(전위 투사)‘의 무시무시한 1당 독재 정치로 귀착한다.

     

     자유인들은 이제 선택해야 할 때다. 저들의 ’좌파 권위주의(left authoritarianism)‘ 질주에 쓸려 버릴 것인가, 아니면 ’자유 있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인가? 저들의 성난 언동 이면에는 두려움도 한 자락 깔려있다. 경제실패에 이어 그들의 정치-도덕적 실패가 국민들의 분노를 살 경우 그들의 위기는 급속히 증폭될 것이기 때문이다.

     

     체념과 우울을 털고 자유의 촛불을 들어야 한다. 촛불은 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법부 안의 양식 있는 법관들의 분발도 촉구한다. 김명수 대법원이 가는 길은 과연 사법부 독립에 부합하는가? 이에 대해 모든 법관들은 분명한 어조로 답해야 한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9/2/1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