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풍파에도 흔들림 없던 박근혜 정치인생, 최순실 등장에 급속 붕괴
  • ▲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순방에 나서기 전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DB
    ▲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순방에 나서기 전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DB

     

    4년 전까지만 해도 선거(選擧)의 여왕이라 불렸다.

    최근까지는 원칙(原則)과 법치(法治)의 여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처 뿐인 영광이 됐다. 씁쓸한 아쉬움만 남게 됐다.

    이제 정치인 박근혜가 아닌 자연인 박근혜로 돌아갈 시간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은 "상황이 곧 정리되는대로 삼성동 사저로 떠나겠다는 계획"이라고 전했다.

    탄핵으로 파면된 탓에 받을 수 있는 예우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됐다.

    전직(前職) 대통령 예우법에 따르면 퇴임한 대통령은 현직 시절 받던 보수의 95%를 연금(月 1,200만원 수준)으로 지급 받는다. 여기에 비서관 3명과 운전기사 1명을 둘 수 있다. 또한 국·공립병원의 무료 진료, 교통·통신 및 사무실 비용, 서거 후 국립현충원 안장, 기념사업 등을 지원받는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권리 정지 및 제외를 규정한 7조 2항 1호 규정에 따라 약 25명 내외의 경호·경비 인력만 지원 받게 된다. 나머지 혜택은 받을 수 없다. 규정에는 '재직 중 탄핵 결정을 받아 퇴임한 경우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대통령경호법상 현직 대통령이 임기 만료 전에 퇴임할 경우 경호 기간을 5년으로 정하고 있으며, 필요하면 5년 더 연장할 수 있다. 국가가 전직 대통령을 경호하는 것은, 재임하며 얻은 국가기밀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5년간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다. 현직 대통령에게 보장된 형사상 불소추 특권이 사라져 검찰의 조사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이 나오자 태극기 진영에선 "최순실이 박근혜를 파면했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돌아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길고도 짧은 역사의 중심에 늘 서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52년 2월 2일 경북 대구 삼덕동의 한 셋방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35세였던 아버지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 제1정보과장이었고, 27세의 어머니 육영수는 옥천의 부호 육종관의 딸이었다. 2세 때 서울로 이사를 와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6세이던 1958년 그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평범한 삶이었다. 그러다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1963년 2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18년 간 영애(令愛)로 청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로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평소 검소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 육영수가 자녀들이 특권의식을 갖게 될까봐 신당동 외할머니 댁에 맡겼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성심여중 재학 시절에도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2학년 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박근혜가 애국애족, 원칙과 신념을 보고 배운 것도 이 시기다.

    학창시절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는 옷을 줄여입을 정도로 검소했고, 아이들을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창생은 "대통령 딸 도시락이니 근사할 거라 생각했는데 보리쌀 섞인 잡곡밥이라 솔직히 실망했었다"고 언급했다.

    모범생이었던 그는 중·고교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고,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이공학부 수석으로 졸업했다. 역사소설을 즐겨 읽으며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전자공학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 4년 간 평균 학점 4점 만점 중 3.82점으로 수석 졸업했다.

    그 후 1974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가, 같은해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모친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공작원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자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고(故) 육영수 여사의 시신은 현충원에 안장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 후 22세부터 퍼스트레이디 대행 역으로 모친의 빈자리를 채웠다.

    1979년 10월 26일에는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마저 자신의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당시 그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은 일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부친이 서거한 뒤의 심정에 대해서는 "피묻은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흘릴 눈물을 다 쏟아냈다"고 표현했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간 뒤 18년 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순실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가문의 비극(悲劇)이었다.

     

  • ▲ 국정농단 사태의 장본인 최순실이 헌법재판소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 ⓒ뉴데일리 DB
    ▲ 국정농단 사태의 장본인 최순실이 헌법재판소에 출석하고 있는 모습. ⓒ뉴데일리 DB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1997년이다. 당시 11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정치를 시작하면서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대중 앞에 나섰다. 이회창 후보는 패배했으나 이듬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 재보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정치적 토양은 당에 크고 작은 위기가 생길 때마다 당을 구해 내며 단단해졌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발휘된 위기 극복 능력은 그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안겨줬다. 특히 2004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구원투수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2007년 처음으로 대선에 도전했지만, 당내 경선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11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다시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등판해 이듬해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직후 압도적 지지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기도 했다. 2012년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취임 후 2~3년 간 30%대 콘크리트 지지층이 형성됐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정부 책임론이 불거졌음에도 콘크리트 지지층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집권 4년 차인 2016년에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19년 정치인생도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전 수차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자진사퇴를 위한 정치권 합의를 제안했으나 흔들리는 민심을 되돌리진 못했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10일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 탄핵 인용을 결정했다.

    어떠한 풍파에도 끄떡하지 않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지가 오래 인연을 맺어온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 사태에 의해 무너진 셈이다.

    어린 시절은 대통령의 딸인 영애로, 20대는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한 때는 선거의 여왕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이었다. 모두가 역사의 조각, 조각들이다. 하지만 한켠에 감춰졌던 최순실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 헝클어놓은 모양새다. 최순실과 엮여온 인생유전(人生流轉), 그 결과와 종막은 불명예 퇴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