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 사경을 헤맨지 1년이 넘었는데...”
  • ▲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청와대 문건유출 관련 현안보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청와대 문건유출 관련 현안보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1939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올해 77세를 맞이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그의 마음 속 한켠에는 크고 무거운 돌덩이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 거취에 대해 무슨 관심이 없다. 나는 이 자리에 결코 연연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도 자식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 사경을 헤맨지 1년이 넘었는데 자주 가보지도 못해 인간적으로 매우 아프다.”

    9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기춘 실장이 내놓은 발언이다.
    공식석상에서 아들이 처한 위기상황을 언급하기는 처음이다.

    비공식적으로 전해진 내용은 있었다.
    지난해 12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도부의 오찬회동에서다.

    “지난해 말 아들이 갑자기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다. 개인적으로도 어려운 일이고 아내는 늘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당시 김기춘 실장을 발언 내용이 알려지자 여권 내부에선 안타깝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오로지 박근혜 대통령 걱정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대통령께서 국민행복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고 계시고 해외 세일즈 외교를 다녀오면서 굉장히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한 후 하루도 못 쉬고 업무에 시달리고 계시다”며 가정 문제보다 국정운영을 우선시하는 김기춘 실장이다.

    “박근혜 대통령 보좌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입버릇처럼 말해온 비서의 자세를 꿋꿋하게 관철하고 있는 그를 보면 ‘충신(忠臣) 중의 충신’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 ▲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위해 입장하고 있다. 오른쪽이 김기춘 비서실장. ⓒ뉴데일리 DB
    ▲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위해 입장하고 있다. 오른쪽이 김기춘 비서실장. ⓒ뉴데일리 DB



    김기춘 실장은 1963년과 1964년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서울대 대학원을 다닐 때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 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이 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인연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각별한 믿음으로 발전했다. 김기춘은 2013년 8월부터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고 있다. 역대 최고령 비서실장이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두터운 신뢰가 없었다면 벌써 은퇴를 택했을 나이다.

    하지만 굳은 절개(節槪)와 충성스러운 마음 만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난국이다.

    ‘정윤회 문건’ 파문에서 촉발된 작금의 사태를 보면 정국혼란이 그리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급기야 사상 ‘초유의 항명(抗命)’ 파동까지 일어났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라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사의를 표명했다.

    어떠한 사유를 불문하고 직속상관인 김기춘 실장의 명령을 현실적으로 수석비서관이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더욱이 김기춘 실장은 김영한 전 수석의 법조계 대선배(각각 사시 12기, 24기)다. 이는 곧 공직기강 해이(解弛)로 직결된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초유의 사태다. 김영한 수석은 자신의 해명처럼 ‘정치공세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태는 더욱 더 꼬여버리고 말았다. 견해의 깊이와 부담감이 어땠을지는 몰라도 신년 기자회견을 앞둔 박근혜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됐고, 직속상관인 김기춘 실장에게는 ‘사태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기게 됐다.

      

  • ▲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9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 무거운 표정으로 현안보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9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 무거운 표정으로 현안보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꼬일대로 꼬여버린 정국을 누군가는 풀어야 한다.

    이제 청와대의 인적쇄신은 불가피하다. 앞서 김기춘 실장은 “이렇게 애국하는 대통령께 조금이나마 보조할 것이 있어서 여기에 있는 것이지, 이 자리에 절대 연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내 소임이 끝나면 언제든 바로 물러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뉴데일리>는 정치권 원로들의 발언을 인용해 누차 김기춘 실장의 용퇴(勇退)를 촉구한 바 있다.

    통일과 경제 대도약을 향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걸음에 있어 김기춘 실장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현 정부가 처한 위기를 뚫을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김기춘 실장의 충정(忠情)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다만 김기춘 실장이 공직사회에 기여할 유일한 기회이자 마지막 도리를 내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윤회 파문’과 이번 항명 사태는 박근혜 정부 3년차 출범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김기춘 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해서야 되겠는가?” 누군가 책임을 지고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권의 지적은 괜한 얘기가 아니다.

    “사표 요구에 떠밀리기보다는 억울하더라도 책임을 안고 먼저 사표를 던지는 게 박근혜 정부를 위한 길”이라는 제언이 이어지고 있다.
     
    國家昏亂有忠臣(국가혼란유충신): ‘국가가 혼란할 때 충신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태평성대는 충신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기춘 실장의 용단(勇斷)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