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하 보고 "가만 있으라"고...


  •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

    김지하 김중태 씨등 청년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이 요즘 왕성한 발언들을 하고 있다.

    김 시인의 그런 거침없는 의사표현을 두고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가 불편한 심경을 피력했다.
    가만있으라는 것이었다.
    ‘안하무인’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문인이면서도 운동가였던 김지하로서는 지금 인생의, 사상의, 문학의 또 다른 단계를 살고 있다.
    그의 20대, 30대의 실존과 문학과 사상은 박정희 권위주의에 대한 투쟁을 떠나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왜 가만있지 못하느냐?” “왜 ‘오적’ 같은 욕설로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느냐?”고 했다면,
    그건 “당신은 살지도, 사고하지도, 문학 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지하의 오늘의 실존과 문학과 사상은 생명, 공생(共生), ‘흰 그늘’, 동북아시아 공동체 같은 키워드를 떠나선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존재론, 실존, 세계관, 우주관의 한 고리는 그가 20대, 30대 때 목숨 던져 싸웠던 왕년의 적수(敵手) 박정희 산업화 시대하고 화해하는 것이다.

    왜 화해하는가?
    지금의 시점에선 민주화와 산업화가 옛날처럼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게 무의미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걸 두고 “가만 있으라”?
    시인은 정치적 사상적 역사적 결단도, 그것을 말로 표출도 못하는 채 함구하고 살아야 시인일까?
    사르트르, 까뮈, 앙드레 지드는 참여적 의사표출을 했기 때문에 ‘가만있지 못한 문인’ 소리를 들어야 할까?

    혹시, 누가 함구만 하고 살라 했느냐, 박근혜 앞의 전사(戰士)처럼 서있는 걸 두고 한 말이지...
    그리고 ‘안하무인’ 같은 언사를 두고 한 말이지...
    할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말과 행동과 매너 하나하나를 두고 가타부타 입씨름을 벌이겠다면, 그걸 일일이 다 쫓아다니며 어째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김지하가 박근혜 후보 손을 화끈하게 들어 준 것은, 그가 왕년에 그의 아버지한테 화끈하게 대든 것과 똑같은 값어치를 갖는, 아주 중요한 공적(公的)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민주화 운동의 정통성의 문제]가 걸려있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 볼 때, 김지하 시인은 그가 일찍이 40년 전, 30년 전에 치켜들었던 [민주화 운동의 깃발]이 참으로 엉뚱하고도 말도 안 되는 ‘깡통’들에 의해 네다바이 당하고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건 김 시인에겐 도저히 더 두고 볼 수 없는 수모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대선에서 그런 측이 또다시 득세할 경우, 그 깃발은 그만큼 더 멀리 ‘납치’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럴 때 시인은 오직 가만있어야만 시인일까?

    박정희의 딸과, 박정희의 ‘왕년의 적수’가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만나는 장면은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 본 사람에게는 오주주한 전율마저 느끼게 한 ‘선거보다 더 큰’ 감개(感慨)이자 짜릿함이었다.
    아, 그 시절의 싸움이여...
    그리고 지금의 만남이여, 만감이 끓어오른다.


  • ▲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

    문학인에는 소위 순수문학인도 있을 수 있고, 소위 참여문학인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문제다.

    김지하는 평생 ‘참여’ 쪽에 속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참여문학인은 참혹한 옥살이를 통해 참여의 다른 시각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그는 ‘종북(從北)’들의 “김지하, 너는 죽어서 제물이 돼라”는 끔찍한 공작의 대상이 되었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음습한 ‘실제상황’이었다.
    거기서 그는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적나라한 맨 얼굴을.


  • ▲ 시인의 입이 열렸다.ⓒ
    ▲ 시인의 입이 열렸다.ⓒ

    이런 시인이 오랜 칩거 끝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참고 참았던 말들을...누르고 익히고 새김질 하고 발효 시켰던 절규 같은 것을 터뜨렸다.
    이걸 두고 '가만 있으라“?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