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從北, 우리 안전에 크게 위협되지 않아(?)"

    다시보는 민주당 문재인 前 대선후보의 문제 발언

    金泌材     



  • 정치인들의 모든 발언은 기록(記錄)으로 남고, 그 기록(記錄)이 모여 증거(證據)가 된다.

    이번대선에서 ‘낮은단계연방제’를 주장했던 문재인은 지난 6월27일 한 토론회에서 ‘종북(從北)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유약한 대응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었다.

    “과거에 군부독재가 엄혹했던 시기에 우리의 체제에 절망감을 느껴 사회주의나 북한을 나은 대안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북한에 비해 우월해졌다.”

    文씨는 이어 “이제는 그런 사람들(從北세력)이 많을 것이란 생각을 저는 하지 않고 있고,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다. 우리 안전에 크게 위협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종북(從北)이 문제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종북(從北)이다.



    [김필재의 추적]

    한국(韓國)사회 곳곳에 뿌리박은

    종북(從北)세력의 실체(實體)

    "언론계·종교계·공공(公共)기관,

    그리고 각 단체에 뿌리박은 조직들도 있었다."



  •  1. 從北지하당의 역사적 배경(통혁당을 중심으로)

    전향한 거물간첩 金用珪(김용규)씨는 자신의 저서인《소리없는 전쟁》과 《時效人間》을 통해 통혁당(통일혁명당, 1968년 조직검거) 조직이 북한 노동당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밝힌 바 있다. 통혁당 사건은 북한의 전형적인 對南 공작사업에 의해 결성된 남한 내 지하당이다.

    金씨는 두 책에서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甥姪(생질)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고 했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노동당에도 입당을 한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을 다시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正(정)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이원화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 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생질인 김수상을 내세워 金鍾泰(김종태, 前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1969년 死刑)를 포섭하기로 한다. 당시 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金鍾泰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은 쉽게 이루어졌다.

    평양으로 밀입북한 金鍾泰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金日成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 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金鍾泰는 김질락, 이문규, 이진영, 임진영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통혁당은 게릴라식 무장투쟁으로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후 모택동 전법과 베트콩 게릴라 전법 및 동학혁명식 민중봉기 전법을 모방해 무장투쟁을 현실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진행했다. 이와 관련 통혁당은 북한과의 합의하에 농촌에서는 테러투쟁으로, 도시에서는 폭발물을 이용해 주요시설과 청와대를 폭파하는 등 무력투쟁으로 사회혼란을 조성하기로 했다.

    조직원 이진영, 오병현을 특수전술교관 후보로 선발, 1968년 4월 월북시켜 무력투쟁을 위한 고성능 무기 및 폭발물 취급 등 특수교육을 받게 했으며, 유사시에 대비해 각 지역에 무기고 획득과 무기 비축방법 등을 연구하고 지형 정찰을 실시했다.

     


  • 또한 유격전에 대비한 신체훈련과 더불어 사상토대 강화훈련을 병행했으며, PS작전(from paper to steel) 등 실제 무력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다.

    金用珪씨는 또 자신의 책에서 북한이 통혁당 재건을 위해 지속적인 공작을 했음을 지적했다. 1973년 7월에는 자신이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함께 적고 있다. 포섭대상은 과거 金鍾泰와 연계됐던 인물들이었다.

    통혁당 재건 계획과 관련해 金用珪씨는《소리없는 전쟁》에서 매우 우려스런 점을 폭로했다. 그는 북한의 공작망이 우리 사회 어느 곳까지 깊게 뻗쳐 있는지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이렇게 두 사람이 낮과 밤을 이어 지시문을 모두 해독하고 보니 그것은 그동안 평양의 공작팀들이 각각 관리하고 있던 일부 현지조들과의 접선암호와 특정 조직원들의 기록 대장이었다. 기록대장에는 발전소, 전신전화국 등 요충부문에 점 형태로 특별 관리하던 개별적 대상도 있었고, 2∼3명 또는 4∼5명으로 구성된 조직도 있었다. 그 중에는 최근에 구성된 조직도 있고, 1960년대 초·중반에 布置(포치)된 교수와 박사들로 구성된 조직, 언론계·종교계·公共기관, 그리고 각 단체에 뿌리박은 조직들도 있었다.”

    2. 公安기관이 파악하고 있는 極左세력 규모

    얼마 전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운동권 출신의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진보의 그늘》 著者)는 당시 토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석기 통진당 비례대표 당선자가 연루됐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反국가단체)의 핵심은 1백여 명에 달했다. 민혁당의 영향권에 있던 인원이 총 1만 명 가량 되며, 이들 가운데 4~5천여 명의 인원이 통진당에서 NL노선으로 黨을 접수했다. 이미 모든 신원이 노출된 이석기와 같은 인물은 북한 입장에서는 활용가치가 떨어진 인물이다. 얼굴 없이 지하에서 활동하는 세력이 더 큰 문제다.”

    한기홍 대표의 이 같은 주장은 상당 부분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국가안전기획부는 국내 左翼(좌익)세력을 총 4만2천명으로 파악했다. 구체적으로 대학 등 학원가에 1만8천명, 노동계 1만 명, 재야·종교단체 5천5백 명, 교육·문화·언론계에 8천5백 명이었다. 이들 중 핵심세력은 1만2천명∼1만5천명, 적극 동조세력은 3만 명. 이념성향별로는 주사파 등 NL계는 2만7천명, 사노맹 등 PD계는 1만5천명으로 보았다.(1995년 <월간조선> 6월호 보도 인용)
     
    이와 함께 1997년 2월 <경향신문>은 대검 공안관계자의 발언을 인용, “정보기관이 파악한 북한에서 날아오는 전파나 北으로 가는 전파수로 미뤄 볼 때 대략 4만~5만 명의 간첩 및 親北세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대검 관계자는 황장엽 씨의 ‘간첩 5만 명 암약설’과 관련해 이 같이 밝히고 “이 5만 명은 고정간첩과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까지 포함한 숫자”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고정간첩 1명당 10명의 부화뇌동자가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5만 명이라는 숫자는 이 같은 근거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3. 北 225국, 남한 내 從北 지하당 관리 및 조직

  • 북한의 對南 공작 조직 가운데 대외연락부 2009년 2월 노동당 내각 산하로 소속이 변경되면서 명칭이 ‘225국’으로 변경됐다. 225국은 남한 내 親北조직(지하당 포함)을 유지·확대하고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기관이다. 225국과 연계된 대표적 對南 공작원 및 지하당 관련 사건은 다음과 같다.

    ▲지하당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1964년) ▲1967년 동백림 사건 ▲1968년 지하당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경남ㆍ부산지역 거점 간첩 강XX 일당 사건(1974.8) ▲일본거점 간첩 진XX 일당 사건(1974년 9월) ▲학원침투 간첩 백XX 일당 사건(1975) ▲지하당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1979년) ▲지도핵심 간첩 정XX 사건(1983) ▲입북 자수간첩 오XX 사건(1986) ▲지하당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1992) ▲지하당 구국전위 사건(1994) ▲부여 침투 간첩 김동식 사건(1995)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사건(1997년), ▲지하당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1999) ▲대만 화교간첩 정XX 사건(2006) ▲지하당 일심회 간첩 사건(2006) ▲지하당 왕재산 사건(2011년)

    4. 19대 국회로 진출한 문제인사 리스트

    4.11총선을 통해 각종 公安사건-反국가단체 연루자 및 국보법 위반자들이 민통당과 통진당을 통해 대거 19대 국회로 진출했다. 이석기의 선도투쟁으로 대다수의 한국 언론들은 그의 뒤에 숨어있는 從北세력의 실체를 자세히 보도하지 않고 있다.

    4.11총선을 통해 19대 국회로 진출한 문제인사들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1960년대: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연루자: 한명숙(민통당)
    2. 1970년대: 남조선민족해방준비위원회 사건 연루자: 이학영(민통당), 이재오(새누리당)
    3. 1980년대: 利敵단체 삼민투위(三民鬪委) 연루자: 강기정·김경협(민통당), 오병윤(통진당)
    4. 구국학생연맹(구학연: 主思派 지하조직) 연루자: 김기식(민통당)
    5. 1990년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 연루자: 이석기(통진당)
    6. 利敵단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출신: 김재연(통진당)
    7. 1990년대: 남한사회주의자노동자동맹(사노맹, 反국가단체) 사건: 은수미(민통당)
    8. 1980년대: 利敵단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신: 김태년, 박홍근, 이인영, 임수경, 오영식, 우상호, 정청래, 최재성(민통당) (총18명)

    2012년 從北세력의 대표적 전략은 남한 내 反혁명세력 제거이다. 이와 관련, 정대연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최근 작성한 <2012년 진보운동의 대도약을 위한 다섯 가지 과제>에서 2012년의 정치적 의미와 진보운동의 목표를 1)자주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여는 것 2)수구­보수세력의 재집권 저지와 통일지향적 정권창출 3)진보세력의 수권세력화라고 밝히고 있다.

    鄭 위원장은 ‘자주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예속적 한미(韓美)동맹체제에 결정적 파열구를 냄으로써 ▲연합연방제 통일이 실현단계로 접어드는 국면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위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수구­보수세력의 재집권을 저지하고 통일 지향적 정권을 창출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향후 한반도 정세의 향방을 左右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밝혔다. 19대 국회에서 從北세력의 국회활동을 방치하면 2015년 韓美연합사가 해체된 이후 치러질 20대 국회에는 더 많은 從北세력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國體를 변경하려 들 것이다.

    그 결과 不知不識間에 대한민국이 사라지고 북한이 원하는 ‘연방통일조국’이 들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자세로 근거없는 낙관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끝>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참고자료-

    김성동, <귀순 공작원 金用珪씨 증언>, 월간조선 2001년 5월호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왕재산 사건 검찰 수사결과>, 2011
    조갑제닷컴 편집부,《從北백과사전》, 2012, 도서출판 조갑제닷컴
    한기홍 《진보의 그늘》, 2012, 도서출판 시대정신

    -인터넷-

    팩트파인딩넷: http://www.factfinding.net/
    조갑제닷컴: http://www.chogabje.com/index.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