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군정청이 보낸 비행기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지방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승만이 직접 조직한 것이 아니라, 지방의 단체들이 이승만의 명성 때문에 호응해 왔던 것이다.
       1945년 11월 23일, 마침내 중경 임시정부의 김구 일행이 귀국했다. 미군이 김구의 귀국을 추진한 것은 군정의 협력자로서 공산주의자들을 견제시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수세력인 한민당도 열렬히 환영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중국을 떠나기 전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 주석은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30만 달러의 전별금도 제공했다.
       장개석은 2대의 비행기로 상해까지 태워 주는 한편, 귀국후 중국정부와의 신속한 연락을 위해 무전사 3명을 딸려 보내기도 했다.
       그와 같은 환대에는 임정세력이 한국에서 집권하기를 바라는 중국정부의 소망이 담긴 것이기도 했다.

  • ▲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 임정주석을 미군정 최고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소개하는 이승만.(1945. 11월 말)
    ▲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 임정주석을 미군정 최고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소개하는 이승만.(1945. 11월 말)
       상해에서 임정요인들은 하지 중장이 보낸 미군 비행기로 서울에 오게 되었다. 
       김구 일파는 이승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임시정부의 요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것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미군정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국한 뒤의 임시정부측의 태도는 달라졌다. 귀국 즉시 경교장에서 각료회의를 여는 등, 정부로서 행동하려 한 것이다. 이승만도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첫 각료회의에 참석했다.
       12월 3일 임시정부는 미군정측에 대해 행정권을 넘겨 돌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한 요구에 대해 미군정측은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정만이 유일한 정부임을 확인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인정을 거부했다.  
       송진우가 이끄는 한민당도 임시정부를 우파 세력으로 보고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친일혐의를 받고 있던 보수세력들은 대중에게 별로 인기가 없어 고심하고 있던 터였다.
       좌익들도 임시정부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임시정부측이나 좌익들을 대등하게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합작은 실현되지 못했다.
       온건한 중도파인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만이 김구의 한독당과 통합했을 뿐이었다. 
             
  • ▲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절 경축식(1946년)에서 축사하는 이승만.
    ▲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절 경축식(1946년)에서 축사하는 이승만.

    소련과 합의해 정부를 세우려는 미군정청
     
       미군은 한국인들에게 빨리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워주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병사들도 하루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게다가 미 국방부는 한반도를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 통일정부의 수립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군은 동유럽에서와 마찬 가지로 북한에 공산정부, 또는 단독정권을 세울 작정이었다. 그것은 일본이 항복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1945년 9월 20일에 스탈린이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순진하게도 미군측은 소련군의 협조를 얻어 남북통일 정부를 세워보려고 했다.
       그래서 소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우파 세력들과 꼭같이 대우했다. 그 때문에 공산당 행사에 미군정청 간부가 참석해 축사를 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리고 1946년 5월에 서울의 공산당 본부 건물 지하실에서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어낸 어마어마한 조선정판사 사건이 터졌는 데도 불구하고, 미 군정청은 공산당이 사무실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금도 풍부했다. 북한에서 화폐개혁으로  못쓰게 된 구화폐가 남한으로 몰래 쏟아져 들어 왔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돈으로 신문사와 영화관을 사들여 대중 선동에 이용했다.
  • ▲ 1945년12월 미국과 소련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된다는 소식에 좌·우익을 망라한 대규모 반대운동이 전개됐다. 사진은 동대문에 있던 서울 운동장 집회 모습.
    ▲ 1945년12월 미국과 소련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된다는 소식에 좌·우익을 망라한 대규모 반대운동이 전개됐다. 사진은 동대문에 있던 서울 운동장 집회 모습.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서다

       1945년 12월 28일 마침내 미국과 소련 사이에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선언문으로 발표되었다.
       그것은 미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와 영국 외무장관 어네스트 베빈이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제시한 초안을 대부분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선언의 골자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5년에 걸쳐 신탁통치(信託統治)를 하게 되는 데, 그것을 추진할 기구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는 제2차대전중인 테헤란 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구두로 합의되어 얄타 회담에서 확인된 것이었다. 
       그것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이 그 가능성을 간파하고 계속 추궁해 온 문제였다.
       이승만의 추측이 사실이었다는 것은, 일본이 항복한 지 두 달 뒤인 1945년 10월 20일 미 국무부 극동국장 존 카터 빈센트가 신탁통치 가능성을 언급한 데서 드러났다.
       그때 이승만은 워싱턴에 있던 구미위원부의 임병직에게 연락하여 빈센트 발언의 의도를 묻는 동시에 미국이 빨리 한국의 통일독립정부를 세우게 할 의지가 있음을 확실하게 표명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한 이승만의 요구에 대해 미 국무부의 회신은 애매모호했던 것이다.
       그러 하던 때 모스크바 선언에 신탁통치 계획이 포함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승만은 12월 28일 저녁에 반대 성명을 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김구가 주도했다. 그 때문에 1946년 1월 1일 서울 거리는 온통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는 시위행렬로 시끄러웠다.
       공산주의자들도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신탁통치국에 그들의 제2 조국인 소련이 포함된다 할지라도 한국의 독립을 늦춘다는 데는 찬성할 수 없을 정도로는 민족주의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이 12월 28일밤 급히 비밀리에 평양에 소환되어 지령을 받고 서울에 온 다음 부터 공산당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1946년 1월 3일의 서울운동장 집회부터 좌익들은 갑자기 신탁통치 지지를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한국인들은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좌익은 찬성하고 우익은 반대하는 좌 · 우 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주영 /뉴데일리 이승만 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