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과 그의 시대>를 읽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삶과 역사의 진실에 관한 고찰

    영웅의 탄생

    정 영 지(고려대 법학과3년)

     “이례적인 무더위가 무섭도록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다. 이어폰에서는 빠른 비트의 최신곡이 흘러나오고, 컵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스커피는 보랏빛 빨대를 타고 올라온다. 이윽고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동반한 차가움이 나를 찾아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수백만 권은 족히 되어 보이는 서적이 구비되어 있는 서점. 지식과 정보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한 권의 책이 여기 있다. 어느 중학교 교사가 어린 학생들을 위해 쓴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 세련된 표지가 마음에 든다. 잠깐 읽어 볼까?하는 생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첫 페이지부터 넘기기 시작한다.
    고조선의 단군부터 출발해서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당대의 지도자들이 시대별로 분설되어 있고 페이지 하단에는 인물을 상징하는 일러스트가 있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가 이 책이 ‘대한민국의 영웅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싱거운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은 고구려가 아니고 조선도 아니기 때문에. 책장은 계속 넘어가고 조선시대를 지나 구한말을 지났다. 자 이제야 본격적인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역시나 가장 먼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나온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지금껏 보아온 인물들 중에 부정적인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경우는 없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피노키오 코처럼 늘어난 노란머리 미국인의 코 위에 아주 작은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아, 말을 해야겠다. 목소리를 내야겠다. 일그러진 우리의 초대 대통령을 위해.”

     4월이 되면 고려대학교 교정 전체가 들썩이는 행사가 열리는데 바로 4.19보다 하루 먼저 시작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4.18 혁명을 기념하는 마라톤이 그것이다.
    내가『이승만과 그의 시대』를 읽은 것은 올해 봄 마라톤 행사가 끝나고 학교에 추모화환이 가득할 때 즈음의 일이다. 오전 수업시간에 어느 교수님께서는 “이런 날 출석을 부를 수는 없죠, 다들 독재에 맞선 당시 선배들의 피와 눈물을 기억하며 오늘의 의미를 되새기길 바랍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열정이 없어요.”라고 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한 번도 마라톤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문득 내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 시작된 이승만 박사에 대한 공부는 나의 무지함을 절절히 통감하게 해주었으며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기억하게 만드는 역사교육에 대한 회의로 나를 이끌었다.

     깊이 공부를 하면서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미국이 그에게 ‘독재자’라는 타이틀을 맨 처음 붙여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라, 이승만은 친미파가 아닌가? 우리의 역사교과서와 선생님들 모두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차분히 책을 읽어 내려갈수록 놀라움만 더해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닮고자한 것이지 미국 정부의 입장 자체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일은 결코 없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건국과정에서 자주독립 수호를 위해 미국과 잦은 충돌을 빚으며 지속적으로 각을 세웠다는 일화들은 쉽사리 믿기 힘들 정도였다.

     법학도로서 제1공화국 헌법을 배우면서 느꼈던 놀라움도 전하고 싶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빛바랜 구호나 “공산당이 싫어요.” 혹은 “북진통일”로 대변되는 고루한 정치적 비명 아래 묻혀있던 아름다운 우리의 건국 헌법은 현행 헌법보다도 사회주의 이념이 짙게 베어있다는 점을 국민 대다수가 놓치고 있을 것이다.

    빈민과 부자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협조해서 같이 이익을 보게 할 것이라는 일민주의(一民主義)가 4대 정강이었다는 사실도 아마 외면하고 있을 것이다.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원칙을 내세운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계급의 몰락이 가속화 되었고 그로 인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또 어떠한가. 평화선을 지정해 독도를 우리 영토라 천명하고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역사적 실체는 영영 드러나지 못할 것인가. 이것은 진실의 문제가 아닌 관심의 문제고 교육의 문제라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차올랐다.

     ‘문명의 전환’이라고 표현되는 역사의 교차지점에서 올바른 식견을 가진 지도자를 갖게 된 국민은 행복할 것이다. 도도한 시운은 종종 위정자의 단 한 번의 선택에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맡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총선거를 고집하고 반공주의를 기치로 남한의 자유주의 세력들을 견고히 결속시킨 이승만의 지도력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미소 냉전 체제 속에서 어느 진영이 민족의 앞날에 도움이 될 것인가의 판단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국익과 소신에 있어서는 한 치의 타협도 없었던 그의 모습 속에서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그래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나 보다 하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면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로 여겨지는 자유, 평등, 연대 세 가지 중에 제일을 꼽으라면 자유라고 믿는 나에게 이 대통령은 감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늘 내가 영국에서 출판된 책을 읽고 일본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고 칠레산 포도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위해 그 분은 매일 전쟁을 치룬 셈이니. 첫 울음을 터뜨리는 신생국 대한민국을 손수 받아 내었고, 그 핏덩어리가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일관된 소신과 현실적인 대안으로 지켜낸 이승만 대통령의 일생은 파란만장했지만 강철과도 같았고 그의 여정은 결코 멈출 줄을 몰랐다. 청년기의 독립협회 활동, 중년에서 노년에 걸친 독립운동, 해방직후의 건국운동, 대통령 재임기간의 통치행위까지. 실로 우리 젊은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위인이라 할 만 하지 않은가.

     그런 그에게 붙는 이름 ‘독재자(dictator)’. 그것은 얼마나 큰 오명인가!
    현시대에 독재자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민주세력의 혁명에 의해 반드시 타도되어야 할 악랄하고 잔인한 인물들이 아닌가. 가깝지만 먼 저 북녘 땅의 김씨왕조에게나 붙는 이름이 아니었던가. 마지막 챕터에 이르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도 결국 물러나야 할 때를 놓친 독재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세간의 평이 나의 고정된 관념들과 더불어 시종 따라 붙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목마름은 『이승만과 그의 시대』를 통해서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한 채 봄은 지나갔다.

     알게 된 딱 그만큼만 보이는 어느 여름날 우연히 4.18 학생운동에 선봉장으로 참가하셨던 고려대학교 선배님을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전해 들으며 이 책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 그 분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며 말미에 이런 말씀을 더하셨다.
    “나는 그 때 이 박사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미워했어. 사람이 한 번 증오와 원망을 품기 시작하면 진실이란 중요하지 않게 되지. 지성과 야성으로 똘똘 뭉친 대학생들에게 늙은 악마와도 같았던 그 분의 하야는 곧 승리였고 축제였지. 일이 이기붕과 그의 세력들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접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야. 80이 훌쩍 넘은 노령인 그가 모든 것을 통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겠지. 이 박사를 내가 많이 오해했네. 오해했어.” 나의 묵은 갈증도 그 선배님처럼 그렇게 최근에 와서야 해소되었다. 이윽고 내 안에 영웅(英雄)이 탄생했다.

     우남 이승만 하면 바로 독재자라는 연관검색어가 따라오는 이 역사교육의 현장에서 어떠한 외침을 통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영웅의 탄생을 가로막는 왜곡된 시선의 해체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단 말인가. 건국대통령을 가르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를 국사교과서에서 제외하고 근현대사로 따로 묶어 가르치는 나라. 과연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키케로는 ‘역사는 참으로 시대의 증인이요 진실의 등불이다.’는 말을 남겼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우리의 역사는 가감 없는 진실이 되어야 할 것이고 전달 또한 주관의 철저한 배제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선재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담담하게 나열하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이 『이승만』이 아닌 『이승만과 그의 시대』인 것일까.

    그렇다. ‘그의 시대’에 대한 통찰은 장래를 위한 우리의 숙제이자 사명이다. 나는 이제 ‘이승만을 재조명하자’ 혹은 ‘역사왜곡의 굴레를 파괴하자’ 라는 미명을 부르짖기 보다는 그를 알고 배우고 익히자고 권고하고 싶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대들도 아는 만큼 보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