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반역자 그룹(최탄, 홍복원, 김일성, 종북) 
     

    趙甲濟    
     

    한민족(韓民族) 역사에 남는 민족반역자로선 고려 시대 몽고 침공기의 최탄과 홍복원이 있다. 두 사람은 관리하던 고려 땅을 몽고에 바치거나, 몽고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을 괴롭혔다.

    동족(同族)을 치기 위하여 소련과 중공군을 끌어들인 김일성도 역사에서 이들 반역자와 같이 취급될 것이다.

    민족에 끼친 해악(害惡)의 규모면에선 김일성이 단연 1등이다. 그는 스탈린의 노리개가 되어 한반도를 국제전쟁터로 만들고 300만 명의 목숨을 앗았다. 이것도 모자라 악마 같은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 또 다시 수백만을 죽음으로 몰았다.

    이 반역자 부자를 추종하는 남한의 종북역도(逆徒) 또한 최탄-홍복원 류(類)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는 종북(從北)분자들일 것이다.

    천국에서 살면서 지옥의 악마를 숭배하고 지옥을 탈출해온 사람을 변절자라고 욕을 해댄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서
     
     최탄(崔坦)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고려시대의 역신(逆臣).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영리(營吏)로서, 1269년(원종 10)에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우자, 한신(韓愼)‧이연령(李延齡)‧계문비(桂文庇)‧현효철(玄孝哲) 등과 모의, 임연을 벤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켰다.
     
     최탄은 용강(龍岡)‧함종(咸從)‧삼화(三和) 등 제현(諸縣)의 사람을 불러모아 현령 최원(崔元)을 죽이고 가도(椵島)에 들어가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 감창(監倉) 박수혁(朴守奕) 등을 살해하였다.
     
     이에 강도(江都)에서는 이군백(李君伯)을 북계안무사(北界按撫使)로, 현문혁(玄文革)을 역적방호장군(逆賊防護將軍)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임금이 없는 지금에 선유사(宜諭使)란 누가 보낸 것이냐.” 하고 항거를 계속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서경유수 최년(崔年), 판관 유찬(柳粲), 사록(司錄) 조영불(曺英紱) 등의 수신(守臣)을 죽이니 제성(諸城)의 원리(員吏)들도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몽고에 귀부(歸附)하고자 몽고로 향하여 출발하였다. 중도에서 몽사(蒙使) 탈타아(脫朶兒)를 만나 그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몽고행은 중지된 듯하다. 그리하여 탈타아를 통하여 서경 이하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황해도 6성을 들어 몽고에 귀부할 것을 표명하였다.
     
     뒤이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의 일당인 이연령을 탈타아에게 보내어 고려의 경군(京軍)이 침노한다고 하여 2,000군을 파송해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몽고의 세조는 요양에 주둔하고 있던 망가도(忙哥都)에게 2,000병을 거느리고 동진할 것을 명하였다.
     
     1270년 정월에 망가도는 고려안무사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하기에 이르러 최탄의 위세를 일단 뒷받침하여주는 동시에 임연에게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한편, 몽고에서 최탄의 요청에 의하여 군사를 파송하려 한다는 소식이 몽고에 가고 있던 원종에게 알려지자, 원종은 몽고군이 고려에 다시 들어와 민폐를 끼치게 됨을 먼저 원나라의 중서성에 항의하였으나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원나라의 세조는 최탄‧이연령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한신에게는 은패(銀牌)를 주고 자비령으로 경계를 삼아 이북의 지역을 몽고에 내속시켜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최탄으로 하여금 동녕부총관을 삼았다.
     
     그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에서는 동녕부를 승격하여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라 하였거니와, 고려에서 자주 동녕부의 환부를 요청한 결과 1290년 세조는 동녕부를 우리에게 환부하였다.
     
     이와같은 최탄의 반민족적 행위 이면에는 자신의 실권을 확고히 하여 서북면일대의 독립정권을 세우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집필자]
     진성규(秦星圭)

     ,,,,,,,,,,,,,,,,,,,,,,,,,,,,,,,,,,,,,,,,,,,,,,,,,,
     
     홍복원(洪福源)에 대하여

     1206년(희종 2)∼1258년(고종 45). 고려 후기의 부원배(附元輩). 본관은 남양(南陽[1]). 초명은 복량(福良).
     
     부친은 1218년(고종 5)에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서 몽고에 투항한 홍대순(洪大純)이며, 아들은 몽고의 관리가 된 다구(茶丘)‧군상(君祥) 등 7명이고, 사위가 충렬왕 때 충찬치사(中贊致仕)에 오른 장위(張暐)이다.
     
     선대부터 인주(麟州)에 옮겨 살았으며, 1231년 인주의 신기도령(神騎都領)으로 있으면서 몽고가 침략해 오자 편민(編民) 1,500호(戶)를 이끌고 투항하여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를 제수받았고, 이후 몽고의 길잡이가 되어 고려를 침공하는 데 앞장섰다. 몽고가 북계(北界)의 40여성(城)을 함락시킨 뒤에는 이곳에서 진수(鎭守)하고 있었으며,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1232년 고려의 강화천도에 대한 보복으로 살례탑(撒禮塔)이 침공해왔을 때에도 북계를 근거지로 하면서 이에 협력하였으며, 때마침 살례탑이 처인성(處仁城: 龍仁)에서 사살당하여 몽고군이 철수하자 북계에 남아 진수하면서 몽고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해에는 서경낭장(西京郞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선유사(宣諭使) 정의(鄭毅)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토벌되어 필현보가 죽음을 당하자 몽고로 도망해 들어가 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거처하였다.
     
     이때 몽고로부터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되어 전쟁 중에 몽고에 투항하였거나 유망(流亡)해 간 고려인들을 통치하였으며, 이들을 이끌고 몽고의 고려 침략에 합세하여 1235년?년?년?년?년의 다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독로화(禿魯花)로 파견되어 몽고에서 생활하고 있던 영녕공(永寧公) 준(綧)과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뒤에 아들 다구와 군상이 몽고에서 관인으로 출세함으로써 가의대부 심양후(嘉議大夫瀋陽侯)로 증직(贈職)되었고, 그 후손들은 계속해서 요양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면서 고려와 대립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元史
     新元史
     元高麗紀事
     洪福源一家와 麗元關係(周采赫, 史學硏究 24, 1974)
     元代 遼東地方의 高麗軍民(金九鎭, 李元淳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敎學社, 1986)
     
     [집필자]
     이익주(李益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