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마고지에서 전사(戰死)한 동생을 찾아준
    서정갑 본부장의 일화 

     
    43년만에 동생을 찾은 노신사 김수근씨(氏)

    고성혁   
      


  • 군인을 싫어했던 노(老)신사.

    1991년 5월 21일 육군 중앙문서관리단장인 서정갑 대령은 정복차림으로 부산으로 가는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서 중앙문서관리단 창설 기념회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서 대령의 옆자리에는 어느 중후한 모습의 노신사가 앉아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신사는 말 한마디는 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서 대령은 옆자리에 앉은 노신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노신사는 들은체 만체 하였다. 약간 마음이 상한 서 대령은 재차 말을 건넸다.

    “왜 제가 옆에 앉은 것이 기분이 나쁜가요?”
    “전 군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 대령은 뜻밖의 대답에 적지않이 당황스러웠다.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시 정중하게 질문했다.

    “왜 군인을 좋아 하지 않는지요? 저는 육군 중앙문서관리단장입니다. 사연이라도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대화는 놀라우면서도 애틋한 가족사(家族史)가 담겨 있었다.

    6.25때 강제징집 된 동생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는 말로 노신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당시 중학생이던 동생은 군에 강제징집당했다고 말했다. 부산 영도다리에서 군용 트럭에 몸을 실은 동생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하면서 생사조차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을 서대령에게 전해주었다.

    육군본부에 전사자(戰死者) 관련 문의를 수도 없이 했지만 돌아 오는 답변은 알 수 없다는 회신 뿐이었다고 노신사는 말했다. 그래서 군인에 대해서 좋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노신사의 동생을 찾아준 서정갑 대령

    서 대령은 중앙문서관리단장으로서 그 노신사분의 동생을 꼭 찾아주겠다고 마음먹고 동생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중학생 신분으로 군에 강제징집당한 노신사분의 동생 이름은 '김수택'이었다.

    서 대령은 이후 '김수택'을 찾았다. 관련 문서를 샅샅이 뒤졌다.
    찾고 보니 백마고지에서 전투 중 부상으로 대구 제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수술 도중 사망한 것으로 문서에는 기록되어 있었다. 병상일지에는 분명하게 전사(戰死)라는 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군번까지 알아냈다. 국립묘지에 연락해 군번과 이름을 알려주고 안장되어 있는지 확인요청을 했다.

    국립묘지에서 알려온 내용은 국립묘지 동쪽묘역에 안장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서 대령은 바로 노신사분 집에 전화를 걸었다.
    “김수근씨. 동생분 ‘김수택’을 찾았습니다. 동작동 국립묘지 동쪽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서대령의 수화기속에선 김수근씨 가족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43년만에 김수근씨는 동생을 찾은 것이다. 서대령도 김수근씨 가족의 울음소리에 같이 눈물을 흘렸다. 중앙문서관리단장 서 대령은 43년만에 국군가족을 재회시켜 준 것이다. 당시 서 대령이 오늘날 애국운동의 선봉장 국민행동본부장 서정갑 예비역 대령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묘비에는 ‘병사(病死)“로 기록되어 그곳에 묻혀 있었다. 전쟁 중 병원에서 사망해 '病死'로 기록됐고, 전사자로 처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사자명부에 이름이 빠져 있었고 가족과 연락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 직후 혼란스러웠던 상황과 명단 분류의 오류로 가족에게 통보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병사(病死)처리 6.25전사자 명예회복

    지금도 서정갑 예비역 대령은 그때의 일을 말할때면 목이 메인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육군 중앙문서관리단장으로서 서정갑 대령은 잘못된 표기를 바로 잡고자 마음 먹었다. 육군 병원 병상일지를 모두 대조하여 “병사(病死)”로 처리된 문건을 모두 찾았다. 그리고 그 내역을 확인하고 모두 전사(戰死)로 바꾸었다. 육군병원 문건과 국립묘지 묘비와 문건을 모두 대조했다. 그렇게 해서 1,600여명의 잘 못된 표기를 찾아냈다. 국립묘지의 묘비도 바꾸었다.

    이 일은 서정갑 예비역 대령에게 가장 보람있는 현역시절의 추억으로 남았다.

    오늘은 6.25전쟁 발발 62주년이다.
    20년전 일을 서정갑 예비역 대령은 바로 어제일처럼 회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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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 한번째 맞는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하는 서정갑씨(서정갑.56.예비역 육군대령)의 표정은 모처럼 환했다. 국립묘지에 묻힌 6ㆍ25 전사자중 전쟁터에서 산화한 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한 1천6백여명의 명예를 뒤늦게나마 회복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창피한 얘기지만 휴전 4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사-순직처리 조차 되지 못하고 방치된 전몰장병 묘들이 수천기나 되더군요. 당연히 가족들도 모르고 있지요. 미국인들은 지금도 북한에 흩어져 있는 미군 전사자들의 유골까지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말입니다. 』

    서씨와 군동료들의 3년간의 노력으로 국방부는 국립묘지에 묻힌 6ㆍ25 전사자중 「병사(병사)」로 잘못 기재된 1천6백13명(육군 1천6백8명、 해군 5명)의 사망원인을 국가유공자급인 「전사」나 「순직」으로 최근 정정했다. 국립현충원(구국립묘지관리소)측은 이에 따라 한창 묘비명 바꾸기 작업을 벌이고 있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등에 따르면 병사자나 단순 사망자로 분류된 이는 연금수여 등 국가유공자로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서씨는 『뒤늦게나마 이중 일부 선배들의 잊혀진 명예를 살릴 수 있게 돼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지난 64년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학군장교(ROTC) 2기로 군문에 투신한 서씨가 이 일에 매달리게 된 때는 92년 육군 중앙문서관리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국립묘지에 안치된 6ㆍ25 전사자중 「무연고」 무덤이 의외로 많은데다、 이들 대부분이 당시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숨져간 전사자인데도 행정착오로 「단순 병사」로 처리돼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나라가 가장 위급하던 시절에 조국을 위해 전사한 분들이 철저히 잊혀져 왔습니다. 이래서야 역사나 기강이 바로 서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92년12월 전역한 서씨는 6ㆍ25 당시 병적부, 병상일지,  매장-화장 보고서 등 관련자료들을 모아 일일이 대조하면서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혀나갔다. 틈틈이 국립묘지로 가 현장확인도 했다. 월 수당으로 나오는 1백여만원은 몽땅 활동비로 들어갔다. 그럴 무렵 서씨가 회장으로 있는「육-해-공군 예비역대령 연합회」 회원 2백13명도 이 일에 동참했고, 마침내 큰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서씨는 이제 또 한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 6.25 전사자 명예 회복 운동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이들의 잊혀진 유가족을 찾아주는 일이다. <조선일보 함영준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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