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언장담하던 경기-강원 고교 평준화 불발“학생 볼모로 한 공약 밀어붙이기”
  • #1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최한나(경기 의정부)양은 그동안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끊고 ‘입시 특별반’을 수강했다. 취미생활을 위한 예체능 학원 외에는 사교육과는 담을 쌓고도 살면서도 늘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최 양이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사정이란 다름 아닌 학교와 교육청에서 ‘호언장담’했던 ‘고교 평준화’가 갑자기 취소된 것. 최 양의 경우 일반계(인문계) 고등학교를 갈 성적은 충분했기 때문에 진학 걱정은 없었지만, 이제는 이 때문에 더 마음이 급해졌다. 타 지역에 비해 고등학교 서열이 뚜렷한 의정부는 고입 진학 성공이 대학교 명패까지 가름할 수 있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최 양은 “학교와 교육청에서 고입 전형이 평준화가 된다고 해서 고등학교 선행 학습 위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평준화가 취소돼 꼼짝없이 연합고사를 준비해야 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라면서 “왜 평준화가 취소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한 교육청 때문에 학생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2 안산에 사는 이정민(중2)군의 부모는 얼마 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이사까지 했다. 고교 평준화가 된다는 소식에 평소 눈여겨봤던 고등학교 인근으로 미리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사를 위해 이래저래 본 경제적 손해만도 수천만원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말 그대로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경기도교육청은 오는 6월 평준화 지정 권한이 교과부가 아닌 교육청으로 이관되기 때문에 이 군이 진학하는 2013년에는 평준화가 될 것이라고 이 군의 부모를 달랬지만, 이제는 더 이상 교육청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이 군의 부모는 “이번 사태가 교과부와 교육청의 싸움이라고 들었다”면서도 “하지만 권한이 교과부에 있는 이상 애초에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사안을 마치 이미 결정된 것처럼 호도한 교육청에 문제가 있다. 이제와 (평준화가)안된다면 믿고 준비한 학생 학부모들은 어찌하란 말이냐”고 화부터 냈다.

  • ▲ 교육과학기술부는 경기-강원교육청이 신청한 고교평준화를 '준비 부족'을 이유로 거부했다. 덕분에 이것만 믿고 있던 학생, 학부모들은 혼란에 빠졌다.
    ▲ 교육과학기술부는 경기-강원교육청이 신청한 고교평준화를 '준비 부족'을 이유로 거부했다. 덕분에 이것만 믿고 있던 학생, 학부모들은 혼란에 빠졌다.

    경기교육청과 강원교육청이 신청한 고입 평준화 지역이 교과부의 ‘불가’ 판정에 따라 ‘불발’되면서 해당 지역 일선 중학교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특히 이들 지역은 “확실하다”는 교육청의 말만 믿고 내년 평준화 시행을 기정사실로 여겨왔다는 점에서 그 사태가 자못 심각하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25일 광명-안산-의정부 고교 평준화를 위한 경기도교육청의 부령 개정 요청을 거부했다. 이유는 ‘준비 부족’이다. 교과부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학군과 학생배정방법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며 “이를 확정하려면 수차례 모의배정(시뮬레이션)을 통해 사전에 문제를 파악해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기-강원교육청이 너무 성급하게 평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과부 구자문 학교제도기획과장은 “앞서 평준화된 포항은 시행 계획이 나온지 3년4개월 만에, 목포·여수·순천도 4년9개월 만에야 지정을 받았다”면서 “하지만 강원은 겨우 5개월 지났고 경기도 1년 반의 준비에 불과해 주민여론을 수렴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교과부는 학군설정, 학생배정방법 의견수렴, 시뮬레이션 등을 거쳐 평준화 시행안을 확정하려면 최소 1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 ▲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권한'도 없는 평준화를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하다 결국 실패, 학교 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권한'도 없는 평준화를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하다 결국 실패, 학교 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미 경기교육청이 발표했던 2012년 고교 평준화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김상곤 교육감은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평준화 요청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교육자치단체로서 법적 대응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반발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다.

    부령 개정권이 교과부장관에게 있는 만큼 교과부가 부령(교육감이 고등학교 입학전형을 실시하는 지역에 관한 규칙)을 개정하지 않으면 김 교육감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이에 대해 김 교육감 측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라며 “교과부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애초 자신이 권한도 가지지 않은 사안을 “할 수 있다”며 밀어붙이다가 이를 믿고 따라온 애꿎은 학생·학부모들만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학생을 볼모로 김상곤 교육감이 도박을 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아직 평준화에 대한 주민 여론 수렴이 충분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묻지마 식’으로 강행했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경기도교육청 학교 혁신과 한 장학사는 “안산-광명 지역 고교 평준화는 많은 주민들이 찬성한다고 도교육청은 밝혔지만, 여전히 이를 반대하는 학부모들도 많았다”며 “또 실제로 평준화가 될 경우 소위 ‘기피학교’로 불리는 학교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아 실력이 아닌 ‘운’으로 진학을 하게 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일부 시민단체들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임동균 경기지역고교평준화반대실천협의회 상임대표는 “교육청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협의에 참여할 수 없었다”며 “이제라도 폭넓게 의견을 수렴하고 기피학교에 2~3년간 집중 지원하고 나서 평준화 시행여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종준 의정부지역고고평준화저지투쟁위원장도 “교육부 결정이 올바른 선택”이라며 “평준화는 시기상조이고 이번 기회에 각계가 모여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