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⑪  

     내가 하와이의 호놀루루에 도착한 날은 1913년 2월 3일이다.
    거의 1년간을 미국 본토에 있다가 이제 태평양 상의 미국령 하와이에 도착 한 것이다.

    하와이는 8개 유인도(有人島)로 이루어졌는데 1898년에 미국령으로 병합되어 미국 총독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2년 12월부터 시작된 조선인들의 하와이 이민은 1905년에 일본의 압력으로 금지될 때까지 65회에 걸쳐 7천여명이나 되었는데 내가 도착했던 1913년에는 5천명 가까운 교민이 거주했다.

    나는 감리교에서 운영하는 한인 기숙학교 교장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착한 다음날 오전에 숙소로 박용만이 찾아왔다. 박용만은 단정한 정장 차림에 오늘은 모자까지 썼다. 어디 행사장이라도 갈 차림이다.

    어제도 항구에서 마중 나온 박용만 일행과 저녁때까지 같이 있었던 터라 내가 숙소의 소파에 앉은 박용만에게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래, 무슨 회의에 나가는 참인가?」

    박용만은 작년 말에 하와이에 도착한 후에 특유의 활동성과 포용성, 거기에 강력한 애국심으로 교민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국민회의 하와이 지방총회를 독립시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내 시선을 받은 박용만이 헛기침부터 했다.
    「형님, 제가 어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정색한 박용만의 표정을 본 내가 긴장했다.

    박용만이 말을 이었다.
    「작년 12월 5일에 아버님께서 작고하셨습니다.」

    나는 박용만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잊으려고 했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조선 땅에 혼자 남겨두고 온 아버지다. 평소에도 며느리와 사이가 나쁜 아버지인데다 이혼까지 한 터라 혼자 살고 계셨던 아버지. 누님 댁에서도 나와 병든 몸으로 혼자 계셨다는 풍문을 듣고 있었다.

    박용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을 울린다.
    「그, 창신동 이문교회 구석방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이상재 선생님께서 장례를 봐 주셨다고 합니다. 평산군 신암면 장지에 묻으셨다는군요.」
    「......」
    「제가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더운 날인데도 정장 차림에 모자까지 썼구나. 나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보다 눈 앞의 박용만이 보인 인정에 가슴이 더 미어졌다.

    「고맙네.」
    내가 겨우 말했다.

    박용만은 태산이를 데리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나에게 온 사람이다. 한성감옥서에서 나하고 같이 학당을 운영했던 감옥서 동기이기도 하다. 내가 감옥서에서 쓴 「독립정신」을 가방 밑바닥에 숨겨 넣고 미국으로 건너와 기어코 출간되게 한 내 동생. 그리고 하와이에서 내 후견인이 되어있다.

    외면한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부모 자식에다 나라까지 잃은 방랑자 신세로군.」
    「형님, 기운 내십시오.」
    「인간은 유한한 생명체니 할 수 없지.」
    「......」
    「하지만 잃은 나라는 돌아올 수 있을까?」
    「형님, 꼭 찾아야지요.」

    박용만이 주먹으로 눈을 씻으면서 말한다. 눈물이 흘렀던 모양이다. 그것을 본 내 가슴이 미어졌다.

    아버지 장지에는 갈 수 있게나 될 것인가? 세상에 이런 불효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내 입에서는 생각하고 다른 말이 나왔다.
    「내일부터 나는 전도 사업을 해야겠네. 각 섬을 다니며 교민들도 살펴봐야 될 것이고.」

    그래야 잊혀 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