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⑩  

     그렇다. 내 유용한 가치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웨스트만이 전해준 윌슨의 전갈과도 맥락이 통한다.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19세의 나이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깨우쳤으며 졸업 후에 만민공동회,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연사로써 이름을 알렸다. 협성회보와 제국신문 매일신문을 창설했으며 중추원 의관을 지냈고 개혁운동을 하던 중에 역모 사건에 휩쓸려 잡혔다가 탈옥범이 되었고 곧 사형수로 5년 7개월을 감옥서에 갇혔다.

    그러나 감옥서에 있는 동안에도 제국신문의 논설로 엄비까지 독자로 만들었으며 석방 후에는 황제의 비공식 밀사로 미국 땅으로 건너가 루즈벨트를 만난다. 그리고 5년 10개월만에 미국에서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정치학 박사가 되었다. 귀국 후에 YMCA 교장으로 1년 7개월을 지내다가 다시 도미.

    38년의 인생이 이만하면 파란만장하지 않은가?

    그리고 며칠 후에 나는 인편을 통해 하와이 제일감리교회 감리사인 와드만(John. W. Wadman) 목사의 초청을 받는다. 하와이 한인기숙학교를 운영해달라는 것이다.나를 찾아온 사내는 하와이 교민 유종구였는데 편지도 가져왔다. 박용만이 보낸 편지였다.

    놀란 나에게 유종구가 말했다.
    「박선생은 하와이 국민회의 주간지인 신한국보의 주필을 맡게 되셨습니다.」

    편지를 읽은 내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방황하던 박용만도 길을 찾은 것이다.

    하와이는 조선 교민의 본거지나 같다. 본토의 조선인은 하와이에서 빠져나온 교민이거나 유학생인 것이다.
    하와이에는 아직도 조선 교민의 7할이 모여있다. 나는 이것이 시드니 목사가 말해준 내 유용한 가치를 희생시킬 장소로 믿어졌다.

    그렇다. 미국 땅에서 교민들에게 독립정신을 교육하자. 그것이 나에게 가장 유용하고 교민들이게도 소용이 닿는 일이다.

    시드니가 다녀간 것이 마치 주님의 계시 같게도 느껴졌다.

    「좋습니다. 가지요.」
    내가 말했더니 이제는 유종구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우리는 내가 묵는 「이스턴」 호텔의 좁은 라운지에 앉아있었는데 1912년 12월 중순이다. 날씨가 흐린 오후여서 창밖으로 우중충한 워싱턴의 거리가 보였다.

    정신을 차린 듯 유종구가 눈의 초점을 잡고 나에게 물었다.
    「박사님, 정말 오시겠습니까?」
    「갑니다.」
    「보수가 적을지도 모릅니다.」
    「와드만 목사가 그 말까지 하라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당황한 유종구가 손까지 저었다.

    40대 초반의 유종구는 한인기숙학교에서 동양문화를 가르친다고 했다.

    「제가 와드만 목사님의 심부름을 왔지만 박사님께서 일하시기에는 너무 빈약한 곳이어서...」
    「고맙습니다.」

    머리를 숙여보인 내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편지를 써 드릴테니 내일 오전에 다시 찾아와 주시지요.」
    「예, 박사님.」

    자리에서 일어선 유종구가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와드만 목사님도 승낙 해주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시고 계십니다. 기뻐하시는 모습이 뵙고싶어 어서 돌아가고 싶군요.」
    「제가 필요한 곳이라면...」

    다시 시드니 목사의 얼굴이 떠올랐으므로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곳이 제가 일을 할 곳이지요.」

    그렇게 내 하와이 행이 결정되었다. 인간의 운명은 우연 같지만 인연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