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⑦  

     로스앤젤리스에는 동포들이 꽤 많은 편이다. 위쪽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미국 서부의 관문으로 날씨도 온난한데다 특히 하와이에서 가깝기 때문에 동포들이 모인 것 같다.

    10월 중순, 나는 로스엔젤리스의 교민 최상용의 집에서 사흘째 신세를 지고 있었다.
    최상용은 50대 초반으로 10년 전에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하고 나서 그 다음 해에 로스엔젤리스로 옮겨왔다고 했다.

    부부와 장성한 30대의 두 아들, 그리고 이제는 두 며느리에다 네명의 손자손녀를 둔 유복한 가장이다. 그러나 최상용의 경우는 특별히 성공한 경우일 것이다. 부부와 두 아들이 피땀 흘려 노력도 했지만 운도 따랐다.

    지금 최상용은 로스앤젤리스 남부의 시장에서 청과물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20명 가깝게 된다. 최상용은 독립운동 단체에 거금을 기부하는 숨은 애국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날 밤, 로스엔젤리스의 대한인국민회 동지들과 모임을 마친 내가 최상용의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밤 11시쯤 되었다. 나는 본채 왼쪽의 별채에 묵고 있었으므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걸었다.

    옆쪽 본채의 불은 군데군데 켜져 있었지만 조용하다. LA 시내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대 저택이어서 정원의 잔디밭도 넓다.

    그때 나는 앞쪽에서 어른거리는 인기척을 보았다. 별채 앞 벤치에서 누가 일어나고 있다. 다가간 나는 그것이 최상용의 둘째아들 최기문인 것을 보았다.

    「아니, 최형.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시오?」
    놀란 내가 물었더니 최기문이 한걸음 다가왔다. 우리 둘은 이제 벤치 앞에서 마주보며 서 있었다.

    최기문이 정색하고 말했다.
    「이박사님, 죄송합니다만 우리집에서 떠나 주셨으면 해서요.」

    옆쪽 본채에서 흘러나온 빛이 최기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시선을 준채로 최기문이 말을 잇는다.
    「아버님께선 독립운동 인사들을 무조건 집에 들이시지만 자식들 입장에서는 난처한 점이 많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미국 시민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최기문이 눈을 가늘게 떴는데 쓴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 주에도 연해주로 떠난다는 독립운동가가 묵고 갔는데 아버님한테서 군자금으로 5백불을 가져갔습니다. 또 지난달에는...」
    「알겠소.」

    나는 30대 초반으로 온갖 고생을 겪어 기반을 굳힌 그 젊은 교민을 보았다. 최기문은 나보다 대여섯살 아래였지만 오히려 더 나이 먹어 보였다.

    머리를 끄덕인 내가 말을 이었다.
    「이해합니다. 내가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나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최기문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혹시 여비를 주신다고 해도 받지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당황한 최기문이 손까지 젓더니 주머니에서 뭘 꺼내려고 했으므로 나는 서둘러 말했다.
    「최형, 그러시면 나를 더 모욕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는 내가 길게 숨을 뱉았다.
    「최형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오늘 말씀 해주시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할 뻔 했습니다.」
    머리를 숙여 보인 나는 몸을 돌렸다.

    교민이 다 애국자는 아니다. 가족 간에도 이견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다.
    나는 지금 지난주에 돈을 뜯어간 그 독립군보다도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