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⑩  

     국내의 의병 활동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정보력 그리고 친일 세력의 협조로 인하여 극도로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완용의 말마따나 조선 땅은 일본에 병합되어 천년만년 유지가 될 것이었다.

    백제 시대에 일본으로 간 유민과는 경우가 다르다.
    백제 유민은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언어나 풍속을 지켜낼 수 있었지만 조선 땅의 조선인에 대한 일본 총독부의 통치 방법은 철저한 일본화(日本化)였다.

    관공서나 학교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기 시작했고 조선말과 글, 문화와 풍속을 말살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났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인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즉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

    거리에서 일본 순사가 조선인을 짐승 다루듯이 걷어차고 군도로 내려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일본 군경뿐만이 아니다. 일본 민간인들도 정복자 행세를 했다. 조선인과 싸워 일본 군경에게 잡혀가면 경을 치는 것은 조선인뿐이다.

    그러니 정복자 앞에서 설설 기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땅을 빼앗기고, 가게를 빼앗기고 말과 글도 빼앗겼다. 문화와 풍속도 짓밟혀졌으니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나리, 이번에 대규모 검거 작전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2월 초순, 밤늦게 YMCA의 숙소로 나를 찾아온 기석이 말했다.

    기석은 이제 수입상이 되었다. 일본에서 수입한 모직물을 도매상들한테 넘기고 있다는데 이윤이 많이 남는 것 같다. 지금도 내 앞에 앉은 기석의 차림새는 부자티가 났다.

    모직 코트에 모직 양복, 겨울이어서 일본인처럼 무릎까지 닿는 가죽 장화를 신었다. 내 앞이라 지팡이는 가져오지 않았지만 밖에서는 짚고 다닐 것이다.

    기석이 말을 이었다.
    「지난 번에 잡지못한 반일 인사들을 총독부가 파악하고 있답니다. 이번에 완전히 뿌리를 뽑을 작정이라는데요.」
    기석의 시선을 받은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기석은 이중 스파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석과 같은 인간형이 난세를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조선시대는 기석에게 굶주림과 차별의 기억뿐이었고 일제시대에 들어서자 기회가 열린 셈이다.

    기석이 말을 잇는다.
    「나리도 위험하십니다. 일본놈들이 나리를 가만 둘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연루시킬 수가 있을테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남의 일처럼 말했더니 기석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도 정문 밖에는 정보원 두놈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감시를 두는 대상은 흔치 않습니다. 이번 대규모 검거에 나리도 휩쓸리게 되실 것입니다.」
    「그럼 나더러 어떡하란 말인가?」
    「피신하셔야지요.」
    「조선 땅 어디로? 이제 다 일본 땅이 되지 않았나?」
    「간도나 연해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다시 쓴웃음을 지은 내가 머리를 저었다.
    「견디어 볼꺼야.」
    「조선은 이제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머리를 들었더니 기석이 외면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개화하고 독립하려면 황제가 자리에 앉아있을 때 했어야 됩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
    「백성들 일부는 못난 임금 꼴 안보고 탐관오리 없어진 새 세상이 더 낫다고도 합니다.」

    그 일부 중 한명이 기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