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29)

     1910년 6월 14일, 나는 프린스턴대 졸업식에서 윌슨 총장으로부터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 나이 서른여섯, 스물한살 때 한학을 접고 배재학당에 입학한지 15년 만이다.

    그동안 2년 동안의 민중 계몽 활동과 5년 7개월간의 한성감옥서 수감 기간이 있었지만 나는 그 15년이 내 일생의 단련기라는 생각을 한다. 한성감옥서의 5년 7개월과 미국 유학기의 5년 8개월이 나에게는 공부하는 기간이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졸업식에는 애국동지들이 많이 참석해서 축하해 주었는데 모두의 얼굴은 어두웠다는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국은 곧 일본에 병합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오전, 나는 하루코와 함께 태산의 묘 앞에 서 있었다. 하루코는 나하고 이곳에 여러 번 온 터라 꽃병에 새 꽃을 꽂았고 주변을 정돈했다.

    「태산아, 애비가 어제 프린스턴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단다.」
    나는 평소처럼 태산이 앞에 있는 것 같이 말했다.

    하루코는 그럴때면 자리를 피해준다. 지금도 하루코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딴곳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애비는 곧 조선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말을 멈춘 나는 심호흡을 했다.

    태산 앞에 있을 때 갑자기 목이 메이는 순간이 종종 있다. 내가 답답할 때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구나.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다니 말이다.」

    앞쪽으로 부부로 보이는 노인이 지나갔다. 서로 의지한 채 걷는 것을 보자 또 가슴이 메었다. 그들이 행복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태산아, 애비가 살아남는다면 꼭 다시 찾아오마. 그동안 외롭더라도 견디어 다오.」

    손으로 묘비를 쓸었더니 촉감이 찼다. 「태산아(TAISANAH)」라고 쓰인 묘비의 글자도 때가 묻었다. 태산이 죽은 지 어느덧 4년이 넘은 것이다.

    몸을 돌린 내가 발을 떼었을 때 하루코가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잊지 않고 태산한테 와 볼게요.」
    앞쪽을 향한 채 하루코는 말을 이었다.
    「저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나는 하루코의 옆 모습을 보았다. 하루코와의 인연도 길다.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이런 기연(奇緣)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남독녀 하루코는 이곳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그 배후 조종자는 나였다.
    자식을 잃고 아비를 잃은 남녀가 함께 걷는다. 하루코에 대한 아카마스의 사랑 또한 각별했다.

    그 순간 나는 발을 멈추고 하루코를 보았다.
    「하루코,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
    하루코는 잠자코 나를 보았다. 내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살해당하게 만든 사람이야. 아버지가 그걸 아셨다면 내게 하루코를 부탁하셨을 리가 없어.」

    그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하루코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하루코가 입을 열었고 나는 숨을 죽였다. 뭐라고 말했단 말인가?

    하루코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말씀하시더군요. 아버지 죽음이 선생님 책임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너에게 가슴을 열어 보이는 순간이라고.」

    그리고는 하루코가 머리를 젓는다. 여전히 웃음 띤 얼굴이다.
    「하지만 그 말은 믿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다 예상하고 계신거죠.」

    나는 하루코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