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①  

     태산이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오전인 것 같다. 기숙사로 햄린 목사가 찾아왔다.
    나는 어수선한 방안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햄린은 창문부터 열었다. 2월 말이어서 찬공기가 방 안에 덮여지면서 나는 정신이 났다.

    내 앞쪽 의자에 앉은 햄린이 말했다.
    「리, 교회에서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어. 나가서 동양의 윤회 사상에 대해 이야기 해주지 않겠는가?」

    나는 잠자코 햄린을 보았다.
    햄린은 내 은인이나 같다. 오갈 데 없었던 나를 조지 워싱턴대 니덤(Charles Needham) 총장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또 나에게 세례를 해 주었다. 햄린이 나에게 윤회설 이야기를 하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눈이 뜨거워진 내가 외면했을 때 햄린은 말을 잇는다.
    「교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게. 난 기독교인이지만 때로는 불교의 진리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네.」
    「목사님, 제 자식도 보살피지 못했던 자가 어찌 국가와 민족을 구한다고 떠들수가 있습니까? 모두 위선입니다.」

    내가 혼잣말처럼 말했더니 햄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완전한 인간은 없네. 위대한 인물이 다 제 주변을 잘 정리 한 것도 아냐.」
    햄린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견디면서 자책을 하게. 그것이 더 인간다운 것이네.」

    나는 그때 그 말이 죽는 것보다 살아 견디는 것이 더 어렵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수많은 학우, 친우들이 나를 위로 해 주었지만 햄린의 그 말이 가장 힘이 되어준 것 같다.

    나는 도전형 인간이다. 좋다. 이 고통을 견디면서 살리라. 더 길게 살면서 이 고통을 더 길게 받으리라. 하는 도전심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태산이가 죽은 지 엿새가 되던 날에 나는 교회에 나갔다.
    햄린과 담임 목사가 반겼고 사정을 아는 교인들이 다가와 위로 해 주었는데 그 순간에 느낀 미국인들의 따뜻한 인간미는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아마 국가간의 이해에 따라 대한제국을 냉혹하게 처리한 미국 정부측의 태도와 대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날 내 강연에 모인 교인은 2백명이 넘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교인이 모인 것은 내 사정이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숨을 죽이고 나를 응시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내 조국은 작년 11월, 일본의 보호국이 됨으로써 주권을 상실했습니다.」
    교인들이 시선만 준채 조용했다. 아마 내가 자기네 생각과는 다른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이제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은 사라졌고, 나 이승만은 일본국 공사관의 지시를 받아야하는 식민지 주민이 되었습니다.」

    목이 메었으므로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나는 대한제국에서 개혁운동을 한답시고 인민들을 이끌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나서 5년 7개월을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내 눈앞에 한성감옥서에서 사형을 당한 인재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최정식, 임병길, 장호익. 어느덧 내 눈에 눈물이 고여졌다.

    「나는 감옥서에서 출소한지 석달만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1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더 높였다.
    「내 아들은 만 7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조선 땅에서는 감옥서에 있었기 때문에 며칠밖에 얼굴을 못 보았고 아들이 이곳에 온지 8개월이 되었지만 보육원에서 자랐지요. 그런데도 내 아들은 보육원에서 이 애비를 부르다가 죽었습니다.」

    나쁜 애비다. 내가 죄를 지었다. 태산아, 내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