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례식을 마친 다음 날 정기철의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떴다. 이유미다.
    「조금 전에 민화한테서 이야기 들었어. 난 믿지만 힘내. 언제든 전화하고.」

    한참동안 문자를 들여다 보면서 정기철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오늘 아침 일찍 다시 주인집으로 일하러 갔다. 나흘 동안이나 집을 비웠기 때문에 어머니는 어젯밤부터 조바심을 쳤다.

    민화는 아버지가 목을 맨 집에 혼자 살기가 무서울 것이다. 그래서 정기철이 넌 친구하고 같이 지내라고 먼저 말해 주었다. 집안은 어머니가 치웠지만 아직도 퀴퀴한 냄새가 밴데다 어수선한 느낌이 든다. 아버지 옷가지나 신발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벽시계가 오후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휴가 기간은 연장 되어서 이제 8일이 남았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정기철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벽을 보았다.
    오연희를 떠올린 것이다.

    그날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 전화를 받고 정기철은 오연희와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정기철이 집에 일이 생겨서 돌아가야겠다고 했더니 오연희는 두말하지 않고 따랐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KTX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정기철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오연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역에서 헤어질 때 정기철이 다시 연락 하겠다는 말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싫다. 숨기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으니 안만나는게 나은 것 같다.

    정기철의 시선이 현관의 신발장에 놓은 군화에 닿았다. 집에 온 날 벗어놓고 사복 차림으로 다닌 바람에 한번도 신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휴가 기간이 남았지만 귀대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여기서 뭐 한단 말인가? 이러고 있을 바에는 귀대 하는 것이 낫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정기철이 현관으로 다가가 군화를 집어 들었다.
    군에서는 매일 군화를 닦았다. 머리끝과 신발이 단정해야 된다는 말을 군대에서 실감했다. 군화를 들고 구둣솔을 찾던 정기철이 문득 군화 속에서 잡히는 종이 촉감을 느낀다.

    현관 앞에 주저앉은 정기철이 종이를 꺼내었다.
    종이에 아버지의 글씨가 보였다. 아버지의 편지다.
    숨을 들여 마신 정기철이 종이를 펴고 읽는다.

    「너한테만 남기려고 궁리하다가 네 군화 속에 이 편지를 넣는다.
    기철아, 내 자랑스런 아들. 난 이제 마음 놓고 갈란다.
    널 믿고 갈테니까 네가 엄마하고 동생 민화를 보살펴다오.
    너는 내 분신이니까 이런 부탁을 해도 되겠지.
    네 엄마하고 민화한테는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말 남기지 못하겠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네가 잘 이야기 해주기 바란다.
    아빠가 이런 꼴을 보여서 정말 미안해.
    근데 아빠는 자신이 없구나. 내 아들한테 모범이 되어야 할텐데.
    기철아, 내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내 아들 기철아.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어. 아빠를 본보기로 이겨내.
    넌 네 할아버지 피를 받은 놈이야. 넌 이겨 낼꺼야.
    부탁한다.
    두서없구나.
    기철아, 아빠는 간다.」

    그렇게 편지는 끝나 있었다.

    정기철은 한동안 편지를 쥔 채 현관 앞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벽시계의 초청 소리가 크게 울렸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소리도 들린다.
    정기철은 옆쪽 벽에 등을 붙이고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편지 속에서 울리는 것 같다.

    기철아, 기철아, 난 이제 마음 놓고 갈란다. 정말 미안해.

    그러다가 정기철은 현관 앞에서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손에 아버지의 편지를 쥔 채.

    편지속의 정수용이 정기철의 꿈속에도 따라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기철아, 넌 이겨낼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