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26)

     러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보호에 대한 열강의 지지를 얻었다.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를 승인한 것이다.

    그 해 11월 (1905. 11. 17), 이또 히로부미는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께,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그리고 헌병대장이 이끄는 수십명의 헌병을 인솔하고 궁에 들어가 보호조약을 체결한다.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다. 대한제국은 일본국의 보호를 받는다는 5개 조약으로 이뤄졌는데 주(主)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고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대한제국을 통치하는 기구인 것이다. 정무는 물론이고 국가 보호의 대권, 관헌 감독권, 병력 동원권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곧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 없게 되었다.

    「오적(五賊)이 보호조약에 찬동했습니다.」
    밤에 기숙사로 숨어 들어온 김일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기숙사 건물 뒤쪽의 나무 기둥에 붙어 서 있었는데 추운 날씨였다. 사방은 짙은 어둠에 덮여졌고 기숙사 창문의 불빛도 대부분 꺼졌다.

    김일국이 말을 잇는다.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무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오적입니다.」
    김일국이 마침내 손등으로 눈을 닦는다.

    예상하고는 있었으나 대한제국은 이제 국가가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각 국은 제 국익만을 위해 처신을 하는 것이다.

    김일국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
    「참정대신 한규설이 통곡을 하며 불가를 외쳤더니 헌병놈들이 잡아 가두고는 반항하면 죽인다고 위협 했답니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까지 셋은 끝까지 불가를 주장 했습니다.」

    고종은 대신들에게 결정을 맡겼다는데 8명 대신 중 5명이 찬성을 했으므로 조약이 가결 되었다는 것이다.
    고종이 승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본에 통하겠는가? 형식일 뿐으로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뱃속에 들어가 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일국이, 한탄만 해서는 안되네. 힘을 길러서 기필코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야 하네.」
    「지난 수십년간 기를 썼지만 민중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있습니까?」

    김일국도 조선 땅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 무리보다도 더 해를 끼친 것이 수구, 기득권 세력이다. 그들이 개혁과 개방을 막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제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과 일본군은 누가 불러들였는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해산 시킨 것이 누구인가?
    왕권만을 지키려고 기를 쓰다가 왕권은 물론이고 삼천리강산과 이천만 민중을 일본국에 바쳤다.

    머리를 든 내가 김일국의 번들거리는 눈을 보았다.
    「대한제국은 망하겠지만 산천과 민중은 남아 있을 것 아닌가?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이네.」

    그때 내 눈 앞에 행정관 보좌역의 비서가 되어 필리핀으로 떠난 구피의 얼굴이 떠올랐다.
    2백년간 스페인 통치를 받다가 다시 미국 영토가 된 필리핀에서도 끈질기게 독립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새 나라가 일어나야지. 그러려면 우리가 힘을 길러야 되네.」
    「저는 의병이 될랍니다.」

    잇사이로 말한 김일국의 얼굴은 결의로 굳어져 있다. 그 순간 나는 목이 메었다. 만리타향의 겨울 밤, 이렇게 둘이서 망해가는 나라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갑자기 서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두 손을 뻗어 김일국의 어깨를 쥐었다.
    「이보게 일국이, 우리 조선 땅을 잊지 말고 노력 해보세나.」
    내 목소리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