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담배가루를 덧바른 '해초(海草) 인간'

    1976년 9월 9일 아침, 이날은 목요일인데도 수압이 낮아 A동 4층 물탱크에 물이 없었다. 간수의 지시에 따라 하이탑 장군과 나는 경비원 옹바오의 경비 하에 양손에 물통을 두개씩 들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3층 복도 중간에 있는 물탱크에서 물을 길어 올라오고 있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 베트남 치화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두 손에 든 물통의 무게는 각각 13킬로그램 정도였는데, 병들고 허약해진 나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하나하나 힘겹게 올라갔다. 그런데 중간을 채 못 올라가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휘청하더니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물통의 물은 좌악 좌르르 소리와 함께 계단을 씻으며 흘러 내려갔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두 명의 간수가 물벼락을 피해 물러서더니, 좀 있다가 나를 바라보며 나무랐다.

    “왜 미련하게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가지고 가는 거야. 물을 반쯤 담아가면 이런 일이 없잖아.”

    나는 일어나서 피가 흐르는 왼쪽 팔꿈치를 오른 손바닥으로 눌러 지혈을 시도한 후, 내동댕이쳐진 빈 물통을 주워들고 물탱크로 되돌아가서 물을 3분의 2쯤 채워 방으로 올라갔다. 수감자들은 몸에 상처를 입어도 바를 약이 없었다. 나는 담배가루를 상처에 발랐다. 허약해지고 병든 몸이지만 손톱은 자라고 있었다. 손톱 깎기나 가위가 없어서 A동 수감자들은 콘크리트 바닥에 손톱을 갈아야 했다. 콘크리트 바닥이 깨지고 울퉁불퉁해서, 어떤 때는 손톱 옆의 살점이 뜯어져 나가면서 피가 흐를 때가 있었다. 이럴 때는 으레 상처에 담배가루를 발랐다.

    나는 상처가 심한 왼쪽 팔꿈치를 오른 손으로 누르고 어둠침침한 감방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겼다. 정신력 하나만은 옥외(獄外)에 있을 때나, 옥중에 있을 때나 확고하고 건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양실조로 근육의 힘은 옥외에 있을 때에 비해 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 살이 너무 빠져서 옥외에서 입던 러닝셔츠를 입으면 헐렁하여 셔츠가 비쩍 마른 정강이 아랫부분까지 내려가 덮었다.

    영양실조가 극심해서 어느 한계를 넘으면, 사람은 걷지도 못하고 앉거나 누운 자리에서 손만을 허우적거리게 된다고 하이탑 장군은 말해주었다. 체중이 몇 킬로그램까지 내려가면 그런 해초(海草)  인간이 될 것인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낮은 가고 밤이 되었다. 해초 인간이 안 되려면 무엇인가 음식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돼지죽이라도 좋고, 풀잎이나 나무뿌리도 좋으니 한번 배불리 먹고 싶었다. 풀죽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를 생각했다.

    ◆ 리어카 위 엿판의 누런 엿가락, 큰 어머니가 건네 준 후회의 '검은 엿'

    나는 서울 노량진동 236번지 주택단지 입구 길가에 서있는 엿장수 리어카 위의 엿판에 있는 누런 엿가락 생각을 했다. 그 엿 한두 가락을 먹어보면 얼마나 좋고 행복할까. 어렸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42년 전 음력 명절때 였다. 나는 같은 마을에 있는 둘째 큰집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한 달이 좀 더 되었을 때다. 큰 어머니는 내 또래의 자기 외손자도 따돌리고 나만을 부르셨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큰 어머니가 “에이 불쌍한거. 이 어린 것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하며 눈물을 닦으시더니, 검은 엿을 주시며 먹으라고 하셨다.

    보통학교 2학년이었던 어린 나는 검은 엿은 맛이 없어 안 먹겠다며 깨강정을 달라고 했다. 큰 어머니는 “에끼, 이 녀석! 이 엿이 얼마나 맛이 있는데 싫다고 그래”하고 어이없어 하시면서 방으로 들어가서 깨강정을 들고 나와 철부지 조카에게 주셨다. 참으로 오래된 옛 일이지만, 그때의 일이 선명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그 맛있는 검은 엿을 그때 왜 안 먹었을까. 나는 군침을 삼키며 후회하였다.

    나의 확고한 사생관·인생관·국가관·철석같이 굳은 의지와는 달리, 영양부족으로 힘이 부쳐 계단에서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경비원 옹바오가 9월 13일 아침 8시경 우리 감방 철문 밖에서 철판으로 된 손바닥보다 약간 큰 쪽 문을 째까닥 하고 젖혀 열더니, 주위를 살핀 후 신문지에 싼 계란 크기의 뭉치를 방안으로 얼른 던졌다.

    나와 하이탑 장군은 신문지로 겹겹이 싼 그 뭉치를 펴보았다. 그 안에는 거무튀튀한 굵은 소금이 들어 있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휘청거리는 깡마른 나와 하이탑 장군을 보기가 딱해서 반찬으로 먹으라고 가져온 소금이었다. 나와 하이탑 장군은 경비원 옹바오의 고마운 마음씨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옹바오는 우리두수 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이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소금이 얼마나 맛있고 귀중한 반찬인가를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와 하이탑 장군은 우선 소금을 두 알씩 맛보고, 그날 아침부터 격일로 매끼 다섯 알씩 아껴 먹었다.

    연금 상태에 있다가 정식으로 체포되어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1975년 10월 3일 이후, 나와 우리 정부와의 연락은 단절되어 있었다. 우리 정부는 각종 외교경로를 통해 우방국, 중립국으로 하여금 내 거처와 생사여부를 알아보았으나, 베트남 공산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여 정부와 가족들을 애타게 했다. 7월 22일 사이공주재 프랑스 총영사에게 쓴 편지도 치화형무소에 압수된 채, 영영 프랑스 총영사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 훗날에 알았다.

    ◆ 떠나간 하이탑 장군, 외로움의 나날이 다시 시작되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던 중, 1976년 9월 24일 오후 3시경 A동 구 대장이 경비원 두 명을 대동하고 와서 감방문을 열면서 나오라고 했다. 나는 긴장했다. 또 신문을 하기 위해 불러내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구 대장실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많은 차입품을 담은 황색 나일론 포대 겉에는 뜻밖에도 내 이름이 영문자로 크게 쓰여 있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순흥(李順興) 재월 한국교민 회장이었다.

    나는 이순흥 교민회장이 아직도 귀국하지 않고 호치민에 남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A동 구 대장과 경비병 두 명의 호위와 도움을 받아, 차입품을 가지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차입품 일부를 구 대장 허락 하에 경비원에게 주고, 그들이 돌아간 후 하이탑 장군과 함께 오이김치, 배추김치, 돼지고기, 소시지, 쇠고기 장조림, 설탕, 오렌지, 바나나 등을 실컷 먹고, 차입 들어온 칫솔과 치약으로 이를 닦았다. 오랫동안 이를 못 닦다가 칫솔과 치약으로 이를 닦으니 날아 갈 것 같이 상쾌하였다.

    이렇게 꿈 같이 황홀한 경사가 돌발적으로 있은지 4일 후인 9월 28일 아침 9시경,  약 2주전부터 하이탑 장군을 전향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하는 안닝노이찡의 경찰 대좌(大佐)가 또 왔다면서, A동 구 대장이 하이탑 장군에게 짐 보따리를 싸게 하여 데리고 갔다. 이렇게 하이탑 장군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나는 7개월 반 동안의 감방 동료를 잃었다.

    그가 떠나고 나니 대화 할 상대는 없고, 감방은 텅 빈 것 같이 썰렁했으며, 절해의 고도에 홀로 남아있는 듯한 고독을 느꼈다. 엄습해 오는 적막감을 달래기 위해 감방 한구석에서 뻥 뚫려있는 변소의 대청소를 하기도 하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했으나 외로움은 가시지를 않았다. 시에스터 시간에 낮잠을 자다가 기침이 심하게 나서 눈을 뜨고 콜록 거리다가, 달게 자는 하이탑 장군의 낮잠을 혹시 방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의 거적때기 돗자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돗자리도 사람도 보이지 않고, 썰렁한 공기만이 빈자리에 서려 있었다. 외로움 속에 앞날을 예측 할 수 없는 옥중의 세월은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 탁곡의 무리 속, 청직한 길을 걸은 구 중위

    1976년 12월 20일 오전 8시경,  구 중위가 감방 문을 열어주면서 외부와 차단된 복도에 나와서 체조 및 구보를 하라고 했다. 복도는 길이가 35미터쯤, 너비는 3미터가 조금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좁은 감방에 1년 이상 갇혀 있는 수감자의 눈에는 넓고 큰 광장으로 보였다. 나는 여기서 맨손 체조를 하고 구보를 했다. 1년여 만에 처음 하는 구보였다. 운동시간은 약 15분간 이었으며, 운동이 끝난 후에는 복도에 연해 있는 물탱크에 가서 약 10분간 목욕을 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오후 2시경에는 구 중위가 다시 와서 감방 철문을 약 30분간 열어놓고 공기 유통이 잘 안되는 감방 안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고 나가게 해주었다. 이러한 것들은 A동 수감자에게는 파격적인 특혜였다. 날이 가면서 특혜 구보시간은 약 30분으로 늘어났다. 이 구보와 목욕 특혜는 1977년 1월 8일까지 20일간 계속되고 끝이 났다. 그 후에는 한 달에 두 세번 불규칙적으로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1977년 3월 2일 아침에 이발을 했다. 이발사가 이발기 구통에 있는 깨진 반쪽 거울을 주면서 얼굴을 비춰보라고 했다. 실로 500여일 만에 처음 보는 내 얼굴 모습에 나도 놀랐다. 주름살이 많이 생기고 야위고 늙었으며 얼굴이 길어졌다. 상상보다도 더 못쓰게 된 초췌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1977년 3월 16일부터 간수 구 중위가 또다시 매일 아침 복도로 나가 약 30분간 체조와 구보를 하고, 복도에 연해있는 물탱크에서 목욕 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그러한 특혜를 주는 구 중위가 하도 고마워서 1977년 4월 어느 날, 나는 체조와 구보와 목욕을 끝내고 A동과 B동 중간에 있는 그의 간이책상 옆에 가서 내 파카 만년필 75를 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하였다. 은혜에는 은혜로 갚겠다는 내 진심을 그에게 알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착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할 뿐, 만년필을 사양했다.

    제발 마음을 받아달라는 강요와 사양하겠다는 고집으로 약 1분간 옥신각신 하다가, 혹시라도 이런 장면을 누구에게 들키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책상서랍을 열고 만년필을 넣은 후 서랍을 닫아버리고 쏜살같이 빠른 걸음으로 감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구 중위가 따라와서 감방 철문을 닫고 밖에서 잠근 다음, 철판 쪽문을 열고 신문지에 싸온 만년필을 감방 안으로 툭 떨어뜨리고는 미소 띤 얼굴로 가벼운 목례를 하고 돌아갔다. 나에대한 특혜 구보와 목욕이 계속되면서 20일이 지나고 있었다. 형무소에서 담배는 귀중한 약이었다. 외상을 치료할 때 뿐아니라, 걱정거리가 생겼을때나 외로울때, 허기에 시달릴때에 담배 한 대를 피우면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  담배는 수감자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약이었다.

    나는 아껴두었던 베트남 필터 담배 한 갑을 복도 구보와 목욕의 특혜 후, 감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 중위가 앉아있는 책상서랍에 넣었다. 그는 또 따라와서 쪽문을 통해 담배를 돌려주었다. 나는 이것은 정성이 담긴 내 마음의 표시이며, 겨우 담배 한 갑인데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다음날 특혜목욕이 끝난 뒤 또다시 그의 책상서랍 속에 넣었다. 그는 나의 정성담긴 마음을 더이상 거절 할 수가 없다는 듯, 고맙다면서 담배 한 갑을 받았다. 그 후 또 반달이 지났다. 구 중위의 보직이 변경되어 AH동으로 떠나면서 나에 대한 특혜 구보와 목욕은 없어졌다.

    떠나기 직전인 1977년 5월 11일 아침, 그가 베트남 반꼬 담배 한 갑을 감방 쪽문을 열고 나에게 주었다. 나와 헤어지면서 지난날 받은 담배를 되돌려 준 셈이다. 그의 한달 봉급은 85동이었다. 이는 공정 환율로 환산해서 약 47달러이지만, 암시세로 환산하면 겨우 5달러 70센트에 해당한다. 이러한 박봉 때문에 통일 베트남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그러나 이러한 탁곡(濁曲)의 무리들 속에서도 구 중위만은 청직(淸直)한 길을 깨끗이 걷고 있었다. 그는 곧 상위(上尉) 로 진급하였다. 구 상위는 1978년 가을에 정년퇴직하고 북부 베트남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고 나니 나의 마음은 너무 허전했으며, 그의 무한한 행복을 빌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 수감 당시 이대용 전 주월공사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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