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⑨ 

     나와 이중혁이 탄 오하이오(ohio) 호가 제물포항을 출발한 것은 1904년 11월 4일이다.

    내 수중에는 선교사들의 추천서와 함께 외부(外部)에서 발행한 여권인 집조(執照)가 넣어져 있었는데 밀서는 물에 젖지 않도록 기름 종이에 몇 번이고 감아서 가슴에 동여 매었다.

    제물포 항에는 아버님이 봉수를 데리고 나와 주셨으므로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모에게는 불효이고 자식에게는 무책임한 애비라는 자책감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나는 3등칸 손님이어서 하와이로 떠나는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야만 했다.
    그들은 우리를 유학생으로 대접해서 좋은 자리는 양보해 주었고 밥도 먼저 배식해 준다.

    「형님, 저기 구석에 누운 사내는 중이었다는군요.」
    내 옆으로 다가온 이중혁이 말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다.

    선창 바닥의 3등칸은 환기가 안되어서 악취가 심했고 언제나 떠들썩했다.
    내가 이중혁이 눈으로 가리킨 구석쪽을 보았다. 바닥에 팔벼게를 하고 비스듬히 누운 사내의 뒷모습만 드러났다.

    이중혁이 말을 이었다.
    「경상도 진주에서 백성의 피를 빨아먹던 관리 둘을 죽이고 이민선에 타게 되었답니다.」
    「설마.」

    이맛살을 찌푸린 내가 머리를 기울여 보였더니 이중혁이 정색했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었습니다. 마산 근처에 산다는 사람도 맞다고 증언을 해주는데요.」

    그때 사내가 돌아누웠으므로 내 시선과 마주쳤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 둘의 말을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사내가 몸을 일으키더니 사람들을 헤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중혁이 놀란 듯 얼굴을 굳히고 있다.
    이윽고 내 옆으로 다가온 사내가 쪼그리고 앉았다.
    40세쯤 되었을까?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검은 피부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사내가 똑바로 나를 보았다. 흰창이 맑고 검은 눈동자에서 품어내는 시선이 강하다.

    「난 관상을 공부했소.」
    불쑥 사내가 말하더니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긴 숨을 뱉는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의 불굴(不屈)의 상이오. 그러나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소.」
    「무엇을 말이오?」

    호기심이 일어난 내가 물었더니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입술만 달삭이며 말했다.
    「그대가 소원하는 것.」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나는 외면했다.
    사내는 뭔가를 아는 것 같다. 그때의 내 머릿속에 깃든 소원이 무엇이겠는가?
    조선의 자립(自立)이다.
    황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오래 기다려야 된다니. 몇 년, 몇 십 년이 될것인가?

    나는 살인을 하고 이민길에 올랐다는 이 중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뉘시오? 그리고 나를 아시오?」

    옆에 앉은 이중혁이 긴장한 듯 숨도 죽이고 있다. 그때 사내가 대답했다.
    「내 이름은 안복삼. 무당의 아들로 태어나 열일곱살에 절에 들어갔다가 관상에 재미를 붙여 20년을 공부하고 나왔소.」

    그러더니 나를 향해 빙그레 웃는다.
    「조선 땅을 버리고 떠나는 배 안에서 귀공을 만나게 되다니. 나에게 새 힘이 솟는구려. 우리는 또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사내의 눈빛을 받은 내 몸 안에도 왠지 모르게 생기가 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오하이오호가 부산을 떠나 고베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와 안복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