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⑦ 

     출국 사흘 전이 되는 날 밤, 그날은 집에 일찍 돌아와 있던 내가 문 밖의 인기척에 머리를 들었다.

    「서방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복례의 목소리였는데 조금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뉘시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방문을 연 나는 어두운 마당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앞쪽에 서있는 여자는 복례다. 그리고 뒤쪽에 장옷으로 머리를 가린 여자가 서있다.
    그때 여자가 말했다.
    「궁에서 어명을 받잡고 왔습니다만.」

    궁이라니? 하마터면 되물을 뻔 했던 내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복례가 주춤거리더니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이제 나와 여자만 어둠속에 마주보며 서있다.
    궁이라면 임금, 이제는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가 계신 곳을 말하는 것 아닌가?

    내가 입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오시지요.」
    「아니오. 여기 앉겠소.」

    여자가 맑은 목소리로 말하더니 다가와 마루 끝에 앉는다. 방 안에서 비쳐나온 희미한 빛을 받아 여자의 반쪽 얼굴이 드러났다. 30대 쯤은 되었다. 희고 또렷한 용모의 궁녀(宮女)다.

    내가 비스듬한 위치에 앉았을 때 여자가 말했다.
    「황제폐하의 은밀한 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숨을 죽였고 그때 담장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옳지. 시중꾼들이다. 궁녀가 혼자 왔을 리가 없다. 가맛꾼에다 안내역도 있을 것이다.
    심호흡을 한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폐하께서 이공을 부르시오.」

    낮게 말했던 궁녀가 서두르듯 덧붙인다.
    「이번 미국행에 대해서 격려 해주시려는 것 같소.」

    그 순간 내 어깨가 늘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긴 숨이 뱉아졌다.
    집안은 조용하다. 아버지는 잠이 드셨고 복례한테서 이야기를 들은 아내도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폐하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지요. 저는 몸이 아파서 뵙지 못하겠습니다.」
    궁녀는 시선을 준 채로 잠시 말을 열지 않았다.

    대불경(大不敬)이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는데 아프다면서 만나지 않겠다니.
    그때 궁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상궁 김윤이라고 하오. 폐하께는 이공을 만나뵙지 못했다고 말씀드려야 될 것 같군요.」

    긴장한 내가 숨을 죽였고 상궁 김윤의 말이 이어졌다.
    「폐하께옵서는 만일 이공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렇게 전하라고 하명하셨소.」

    잠깐 말을 멈췄던 상궁이 머리를 들고 나를 보았다.
    어둠속에서도 흰창에 박힌 검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상태가 되었으니 애국지사가 진실로 필요한 때라고 하셨고...」
    「......」
    「공을 이루고 돌아오시면 대신(大臣)으로 봉하고 함께 국사(國事)를 논하겠다고 하셨소.」
    「......」
    「그리고 이것.」
    하면서 상궁이 치맛폭에서 꽤 묵직해 보이는 붉은색 뭉치를 꺼내 옆에 놓았다.
    비단으로 싼 덩어리는 목침만 했다.

    「폐하께서 내리신 하사금이오. 경비로 쓰시지요.」
    「아닙니다.」

    내 목소리가 컸는지 상궁이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주었다.
    머리를 저은 내가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했다.
    「난 받지 않겠습니다. 도로 가져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