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⑥ 

     미국 선교사들은 내 미국행(行) 계획을 놀라면서도 반겼다.
    그들에게 유학을 목적으로 떠난다고 했더니 모두 기꺼이 추천서를 써 주었다.
    나에게 그 추천서들은 통장이나 같았다. 두 대신은 겨우 여비만 보태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학을 떠난다는 소문이 알렌(Horace·N·Allen) 미국 공사한테도 들어 간 것은 당연했다.
    알렌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는 출발 열흘 쯤 전인 10월 중순이다. 공사관의 공사실에서 둘이 마주앉았을 때 알렌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알렌의 한국명은 안련(安連)이며 한국어도 유창하다. 1858년생이니 나보다 17년이나 연상인 46세가 된다.

    「리, 잘 생각 하신거요.」
    알렌이 영어로 말을 시작했다.
    「이 혼란한 시기 동안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오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내가 시선만 주고 있었으므로 알렌이 말을 잇는다.
    「밖에 나가서 국제 정세를 보시면 개안(開眼)이 되실 것이오. 그 세상이 얼마나 비정한지 깨닫게 되시리다.」

    알렌은 내가 수감되었을 때 석방시키려고 백방으로 애쓴 인물이다.
    조선에 선교사로 왔다가 공사관의 서기관을 거쳐 공사까지 되었으니 조선통(通)이다.

    그러나 「비정」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으므로 내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공사님, 조·미 수호조약에 거중조정(居中調整) 항목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일본이 대한제국의 목줄을 죄고 있는 상황을 미국이 조정해줄 수는 없습니까?」

    그 순간 알렌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입은 꾹 다문 채 입끝이 올라간 쓴웃음이다.
    그러더니 알렌이 외면한 채 말했다.
    「리, 조약은 얼마든지 이해에 따라 변경 혹은 취소가 됩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며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는 수시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되풀이 해 온 열강들의 행태를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알렌에게 물었던 말을 미 국무장관 헤이, 또 기회가 온다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도 물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리 대답을 들은 것 같았으므로 내 가슴은 답답해졌다.

    그때 알렌이 말을 잇는다.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습니다. 극동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요. 그리고,」

    길게 뱉는 숨소리가 들리더니 알렌이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했다.
    「미국이 일본을 적으로 삼으면서까지 대한제국을 위해 희생 해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입니다.」
    그렇겠지, 나는 알렌의 솔직한 충고가 고마웠기 때문에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중인 것이다. 전 국력을 동원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선 땅 때문이다. 조선 땅이란 먹이를 놓고 두 마리 야수가 싸우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 전에 체결한 조약 한줄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매달리다니, 이제는 나도 외면했다. 낯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약소국(弱小國) 국민의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때 알렌이 다시 말을 잇는다.
    「리, 개혁은 일본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일 것 같습니다. 이것이 대세이기도 하구요.」

    알렌만큼 국제정세, 또는 미국 정부의 정책을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내 가슴은 절망감으로 납덩이가 들어간 것처럼 무거워졌다. 
    심호흡을 하고 난 내가 머리를 들고 알렌을 보았다.

    「공사님, 말씀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도 알렌에게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대로 가만히만 있을 순 없지요. 저만이 아니라 조선 백성이 다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