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③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은 나하고 친분이 깊다.
    두 분 다 개혁을 지지하는 성향인데다 민영환은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했으며 한규설은 내가 투옥되어 있을 때 구명 운동을 해준 분이다.

    나는 지금 정동교회 근처의 사가(私家) 방 안에서 대한제국의 두 대신과 마주보며 앉아있다.

    민영환은 1861년 생이니 나보다 14세 연상으로 올해 43세가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살해된 황후 민비의 조카로 약관 17세때 문과에 급제한 후부터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등으로 일취월장 했다.

    그러나 임오군란때는 생부(生父)인 선혜청 당상이며 병조판서였던 민겸호가 살해된 아픔을 겪는다. 두 분 다 군부대신과 법부대신 등을 지낸데다 특히 한규설은 1848년생이니 나보다 27세나 연장자다.

    나는 기를 썼지만 약간 위축되었다. 두 분 대신은 나하고 서너 번씩 만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독대(獨代)는 처음인 것이다.

    저녁 무렵이어서 어느 집 아궁이에서 나뭇가지 타는 냄새가 흘러들고 있다.
    그때 한규설이 입을 열었다.
    「우남, 그대가 적임자일세.」

    나는 잠자코 시선만 보내었다.
    한규설의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오전 10시 경이다. 오늘도 상동교회에 나가있던 나는 한규설댁 하인이 밖으로 불러내었을 때 변복한 일본군 헌병인 줄 알았다.

    하인은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을 지킬 것을 부탁했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 올 때도 뒤를 열 번도 더 돌아보았다. 그리고 방안에는 민영환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규설의 말이 이어졌다.
    「우남, 그대가 미국에 가줘야겠네.」
    놀란 내가 숨을 멈췄다가 물었다.
    「미국에 말씀입니까?」
    「가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주게.」

    서두르듯 말한 한규설이 힐끗 옆에 앉은 민영환을 보았다.
    그러자 민영환이 말을 잇는다.
    「국무장관 헤이부터 만나는 것이 순서겠지. 존 헤이는 현재 아칸소주 하원의원으로 있는 딘스모어를 통해 접촉을 하게나. 딘스모어는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인물이고 우리와 친분이 있네.」
    「대감.」

    내가 둘의 말을 끊듯이 상반신을 세우고 말했다.
    「저같은 관직도 없는 백면서생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영문은 둘째치고 저한테 과분한 일이올시다.」
    「밀사로 가는 것일세.」

    불쑥 말했던 한규설이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잇는다.
    「대한제국의 밀사일세.」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는데 그것을 민영환이 보고는 쓴웃음을 짓고나서 부른다.
    「이보게, 우남.」
    「예, 대감.」
    「이 일은 조선과 조선 백성을 위한 일일세. 대한제국 황제폐하를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닐세.」

    민영환은 내 심중을 안다. 한규설이 모르겠는가?
    고종 황제는 나를 위험인물로 취급했다. 일본 세력보다 더.
    그때는 왕권을 위협하는 만민공동회, 독립협회를 제거하려고 일본 공사의 간언까지 귀담아 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개혁은 안중에도 없었던 임금이다.
    오직 왕권을 지키려고 청군(淸軍)을 끌어들였고 동학란에 일본군을 불러들였다.

    다시 민영환의 말이 이어졌다.
    「일국의 대신으로써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나 정식 사절을 보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네.
    그대가 황제의 밀서를 미국 대통령께 전해 주게나.」

    그 상황이야 안다. 그러나 나는 일국의 비공식 사신으로 선택된 내가 조금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