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한 50년 흘렀으니 우리 정치사에 대한 객관적 조명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격하하지만) 과정에 있었던 이승만 박사의 공로에 대한 허심탄회한 평가다.
    역사적인 인물에는 항상 몀암(明暗)과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대다수가 명(明)이나 공(功)보다는 암(暗)과 과(過)에 치우쳐 왔다. 이게 학문적으로 옳은 일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그것은 소련 중공, 김일성 박헌영, 남노당, 한독당, 중간파, 그리고 초기 미국의 모호한 정책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헌법과, 체제와, 국가의 건설을 줄기차게 밀어부쳤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남침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미국, 유엔, 참전 16개국을 우군(友軍)으로 동원한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근대적 조선왕조, 식민주의자 일본제국주의, 전근대적 중국의 낙후성과 단절하고 미국 유럽이 주도하는 선진적 근대문명, 자유민주주의 문명, 시장 경제 문명과 접목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레일을 깐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단행해 농업자본을 근대적인 상업, 산업 자본으로 전환 하는 데 획기적인 공적을 남겼다.

     반면에 그는 이른바 사사오입 3선 개헌과 야당 탄압, 부정선거의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비록 최인규, 장경근, 한희석 곽영주, 등이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은 악행을 자행한 것은 이승만과는 직접적인 상명하복의 관계가 없었다 할지라도, 대통령으로서의 감독 책임은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승만은 4.19가 나자 4.19 부상자들의 병실을 찾아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위로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4.19 혁명을 ‘불순’이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대세를 파악하자마자 즉각 사임했다. 

     한국 민주주의는 언제 처음 시작됐나? 4.19인가? 아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1948년 7월 17일의 대한민국 헌법이 반포된 날 시작됐다.

    그 민주주의가 자유당 강경파에 의해 난폭하게 훼손되고 배신당했다. 그래서 4.19 학생 시민 지식인 언론이 “왜 헌법을 무시하고 선거법을 무시했느냐?” 하면서 일종의 민간 경찰행위를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자유당 경찰이 실탄을 발사했다. 이 실탄이야말로 학생 시민 지식인 언론의 ‘항의’를 ‘혁명’으로 바꿔 놓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따라서 1960년의 4.19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처럼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아니라, 이미 1948년 이래 있었던 대한민국 민주헌법 체제의 복원을 위한 봉기였다. 

     4.19 혁명 50 주년을 맞아 유관단체들이 각종 행사를 할 모양이다. 잘 하기 바란다. 그러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과(過)만 부각 시키고 그의 건국의 공(功)을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1960년의 4.19 이전에는 마치 이 땅에는 <앙시앙 레짐(구체제=절대왕정)>만 있었다는 양 설정하고서 4.19가 한국의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의 최초의 출발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공정(公正)하지 않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유의했으면 한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은 대한민국 헌법제정과 대한민국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선두에서 리드 했다. 4. 19는 훼손당한 그것을 되살린 혁명이었다.
    이 점에서 4.19는 반(反)대한민국 체제 아닌 친(親)대한민국 체제였다.
    한 마디로 자유주의 봉기였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대한민국 헌법 체제에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