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파리에서 연수할 때의 일이다. 여섯살 난 아들을 집 근처 공립유치원에 보냈더니, 아이의 점심값을 책정해야 하니 구청에 와서 상담을 받으라는 공문이 왔다. 구청에 갔더니 상담원이 "소득 증빙 서류를 내면 심사해서 아이의 점심값을 책정해 통보해주겠다"고 했다. 부모가 고소득자면 한끼당 8유로, 소득이 기준 이하면 무상으로 점심을 제공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프랑스에서 돈을 버는 게 없고, 한국에서 송금해 생활비를 쓴다"고 하자, 그럼 대신 '집 월세 영수증'을 제출하라고 했다. 월세 영수증을 내고 며칠 후 구청에서 아이의 점심값을 통지해 주었다. 학교에선 당신 자녀가 끼당 얼마의 점심값을 내는지 전혀 모른다는 설명도 곁들여서.

    요즘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 '무상급식' 논쟁을 보고 있으면 황당한 느낌이 든다. 급식 문제에 관한 한 진보(부모 소득 상관없이 100% 무상급식)와 보수(서민층 자녀만 무상급식) 간 이념적 지형이 뒤바뀐 듯하다. 또 솔직히 말해 다른 복지 현안도 많은데 학교 무상급식 문제가 지방선거의 중심 이슈로 부각될 만한 거리(?)인지도 의문이다. 사회주의 정책 종주국인 프랑스의 사례를 보면 그런 의심이 더욱 강해진다. 프랑스에도 '무상 급식'은 있지만, '일률적인 무상'은 없다.

    앞서 설명했듯이 무상 급식은 철저한 소득조사에 기초해 서민층 자녀에게만 제한적으로 제공된다. 한국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야당 정치인들은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해야 서민층 자녀들이 겪는 마음의 상처를 없앨 수 있다"고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논리다. 프랑스처럼 무상 급식 자격에 대한 '심사'와 '집행' 절차를 이원화해, 학교 교사와 아이들이 누가 점심값을 얼마를 내는지 모르게 하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현재 프랑스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점심값으로 한끼 평균 내는 돈은 3.66유로(약 5700원). 하지만 학부모가 부담하는 점심값은 실제 원가의 절반 이하로 나머지는 지자체가 예산으로 보조한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경우 부모 소득 수준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상황에 따라서도 점심값이 달라진다. 재정사정이 좋은 지차제에선 한번 책정한 점심값 등급을 1년 내내 적용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곳은 가장의 취업 등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즉시 '무상 등급'을 박탈한다.

    프랑스의 경우 모든 초중고 학생들이 학교급식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초등학생 2명 중 1명, 중고생의 3명 중 1명은 점심시간 때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온다. 학교 급식을 먹을지 말지, 어느 정도의 돈을 부담할지가 모두 학생, 학부모의 선택사항인 셈이다.

    굳이 뭐든지 일률적으로 시행하길 좋아하는 한국과 비슷한 사례를 찾자면 있긴 있다. 프랑스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2008년 9월 1000여개의 학교에 후식(後食)으로 과일을 무상제공하는 '디저트 무료 급식' 협약을 맺었다. 서민층 밀집지역 학교에선 재정사정상 후식을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가 특별 예산을 지원해 일괄적으로 과일을 무상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서민층 자녀의 영양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국에서 전면 무상급식을 시행하는 덴 총 3조원의 추가 예산이 든다고 한다. 점심값 보조가 필요없는 중상류층에 돌아갈 돈을 서민층 자녀의 영양불균형 문제 해결에 투입하는 등, 보다 섬세한 '급식 정책'을 논의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