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⑭
     
     「나으리를 뵙습니다.」

    학당 정문 앞에 선 기석(奇石)의 몰골은 흉했다.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후줄근한 양복 차림에다 짚신을 신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내가 정문 옆의 담장가로 기석을 데려가 물었다. 기석은 혼자 온 것 같다.
    「그래, 무슨일이냐?」
    이시다에게 절연 선언을 한 터라 내 심사는 언짢았다.
    그래서 말투도 곱지 않게 나온다.

    기석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나으리, 저는 이시다님 통역을 맡지 않습니다.」

    「이시다씨는 통역이 필요없는 사람 아닌가? 당연한 일이지.」
    해놓고 내가 다시 기석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기석은 내가 배재학당에 들어가게 한 동기(動機)중의 하나를 준 인물이다.
    인간은 본의건 아니건 간에 타인에게 어떤 동기를 제공한다.
    반면교사(反面敎師)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때 기석이 말했다.
    「나으리, 소인이 쫓기고 있소이다.」
    놀란 내가 숨을 죽였고 기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소인이 일본인 앞잡이가 되어서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누명을 받고 있소이다.
    그래서 군졸들이 소인을 잡으러 왔다가 대신 제 처를 잡아갔소이다.」
    그리고는 기석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이시다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소인은 전혀 몰랐소이다.
    허나 이시다님이 모습을 감추시니 이놈 저놈이 다 들고 나서서
    소인이 일본놈 앞장을 서서 조선인을 무고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시다씨는 어디 있느냐?」
    「공사관 안에 피신해 있다는 소문도 있고 일본군 병영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매로 눈을 씻은 기석이 더 더러워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으리, 제발 덕분으로 제 식구의 목숨을 살려줍시오.
    제 어미가 잡혀간 후부터 네 살짜리 딸자식은 울기만 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기석의 말은 다 사실이 아니다.
    이시다가 시킨 일은 아무 생각없이 했을 것이고 때로는 앞장도 섰을 것이다.
    처음 기석을 만났을 때 호가호위(狐假虎威)를 떠올리지 않았던가?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것이 힘없는 백성의 본색이다.
    기석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네 처는 어디에 잡혀 있다더냐?」
    「예, 나으리.」
     딸꾹질을 하고 난 기석이 말까지 더듬는다.

    「예, 시위 제 3대대 병영에 있답니다. 나으리.」
    「네 처 이름이 무엇이고?」
    「막내올시다. 안씨 성을 씁지요.」
    「알았다. 내가 힘은 써 보겠지만 기대하지는 말고 네 딸자식이나 잘 간수해라.」

    「나으리.」
    기석이 그 자리에 털석 무릎을 꿇고 앉았으므로 나는 당황했다.
    다행이 주위에 오가는 사람은 없다.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기석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제 처를 살려만 주신다면 나으리께 목숨을 내놓겠소이다.」
    「시끄럽다.」
    이맛살을 찌푸린 내가 몸을 돌렸을 때 기석이 소리치듯 말한다.
    「안막내올습니다. 나으리.」

    나는 잠자코 발을 떼었다.
    친일 내각의 대신들이 길거리에서 맞아죽는 상황이니 이시다도 당분간 은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얼마나 갈까?
    임금은 언제까지 그곳에 계실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