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2월 28일 “세종시 문제가 지금처럼 아무런 결론을 못 내리고 계속 흐지부지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적절한 시점에 중대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 보도.

     이 기사를 보고 느끼는 것은 세종시 문제 자체에 관한 것 이전에, 현대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다.
    현대의 리더십은 권위주의적이어서도 안 되겠지만 포퓰리즘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민주화 이후만 본다면 우리 사회의 추세는 갈수록 포퓰리즘의 늪에 빠졌다.
    소위 ‘여론조사’라는 것에 그토록 의존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대중의 여론이라는 것은 그들의 상식적인 생각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겠지만, 반면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측면도 다분히 안고 있다.
    예컨대,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용어(用語) 자체로서 그것에 반대한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추운 겨울이 가고 따듯한 봄이 오는 것이 좋은가?” 라는 물음 만큼이나, 너무나 당연지사(當然之事)를 묻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전개 되는 정상회담인가?”가 중요한데도, 여론조사에서는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우문우답(愚問愚答) 또는 중우(衆愚) 증후군(症候群)-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것-이 오늘날엔 대통령, 국회의원, 그리고 심지어는 사법부 판사들까지 꼼짝 못하게 얽어매고 있다. 학자들까지도 이런 현상을 마치 ‘민주주의’의 당연한 귀결인양 생각하는 것 같다.
    과연 그런가?

     세종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고도의 전략적인 이슈를 대중, 군중에 대한 ‘여론조사’로 묻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한 노릇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아전인수(我田引水)와 지역감정의 산물이 되기 쉽고, 주변 패거리가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우르르...’ 휩쓸리는 식이 되거나,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여론조사든 국민투표든 무엇이든,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일일이 길거리 대중과 광장의 군중에 묻는 것은 반드시 최선이라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가 모처럼 ‘대중, 군중에 겁먹기’를 벗어나 “정히 그렇다면 대통령 노릇을 해 보이겠다”는 생각에서 ‘중대결단’이라는 말을 썼다면 그것은 환영하고 싶다. 리더는 민주주의 아니라 그보다 더한 시대의 리더라 할지라도 ‘고독한 결단’을 위해 한 목숨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소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여기서 밀리면 ‘대통령 아닌 상태’로 식물화 할 것이 뻔하다. 그렇게 사느니 장수(將帥)답게 목숨을 던지는 게 백 번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목숨을 그렇게 확 던지는 것이 오히려 확실하게 사는 길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장수가 돼야지, CEO만으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