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⑪

     

    휩쓸렸다.
    허둥지둥 성 밖으로 도망치면서 내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가 그것이었다.

    나는 황해도 평산(平山)의 둘째 누님댁으로 피신했으나 집안에만 숨어있지는 않았다.
    누님은 평산의 청송(靑松) 심씨(沈氏)댁으로 출가했지만 내가 태어난 곳도 평산이었다.
    세살때 한양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그동안 이충구는 재판을 받아 종신형이 선고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으며 주모자인 임최수(林最洙), 이도철(李道徹)은 사형을 받았다.

    나는 누님집에서 십리쯤 떨어진 대원사(大原寺)란 작은 암자에 매일 다녔는데 때로는 이삼일씩 묵고 돌아왔다. 대원사에는 스님 한분과 부처님을 모신 작은 법당 옆에 움막같은 거처 한 채가 붙여져있을 뿐이다.
    너무 외진데다 남루해서 암자같지도 않고 화전민의 버린 집처럼 보였다.
    내가 처음 찾아간 날 법당 앞 손바닥만한 마당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물었다.

    「숨을 곳을 찾아 오셨는가?」

    돌아보니 흰 수염이 긴 노인이다.
    바지저고리 차림에 머리만 반들거려서 스님같기도 했고 도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갑자기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이 숨기에 적당한 것 같습니다.」

    「숨을 곳은 아무 곳에도 없네.」

    다가온 노인이 손에 들고있던 마른 나뭇가지를 마당 구석에 내려놓더니 법당문을 열었다.
    그러자 부처님이 드러났고 이곳이 산사(山寺)임을 알았다.

    「들어오시게.」

    노인이 법당으로 들어서며 말했으므로 나도 신발을 벗었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동짓달의 날씨는 춥다.
    법당 안은 제법 따뜻했으므로 구석에 앉은 내가 어깨를 폈을 때 노인이 물었다.

    「죄를 지으셨는가?」

    노인의 눈이 맑았다.
    피부는 검고 갈라졌지만 목소리는 굵게 울린다.
    아마 이 노인도 사연이 있으리라.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여러 번 절집에 다녀본 나는 산사(山寺)에서의 안정되고 신비한 느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스님들의 중후(重厚)한 태도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금도 선하다.

    그러나 이 노인은 아니다.
    내가 노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왠지 가슴이 탁 터지는 것 같다.

    「휩쓸렸습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것이 차츰 부끄러워지고 있습니다.」

    「뉘우친단 말씀이신가?」

    「아니오.」

    머리를 저은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미숙하다고, 또는 시기가 아니라고 자위하고 합리화 시켰던 것이 부끄러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노인은 입을 다물었고 내가 말을 이었다.

    「내 부모, 처자식의 안위를 무의식중에 챙겼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버리고 뛰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대는 정직하오.」

    노인이 불쑥 말하더니 길게 숨을 뱉는다.
    나에게 시선을 준 채로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대는 열정(熱情)이 있소.」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주 이곳에 들리시오.」

    노인은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박학다식했으며 사람을 볼 줄 알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노인이 나에게 정직하고 열정이 있다고 말한 그 순간부터 그 단어가 평생 내 가슴속에 박혀져 있었으니까.

    내가 스스로 붙인 부적이나 같다.
    그때는 아무것이나 잡고싶은 심경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