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 조직

    좌절된 ‘정한’의 꿈을 실현하고, 일본에서의 실의(失意)를 대륙에서 보상 받으려는 대륙낭인들은 현지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행동을 위한 조직체를 만들었다. 흥아회(興亞會),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락선당(樂善堂) 등 많은 조직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정부보다 한 걸음 앞서 대륙진출의 길을 닦았고, 일본과 한국에서 한국병탄의 첨병으로 활동했다.

    정한론의 열사들 단결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겐요샤(玄洋社)
    일본 최초의 극단적 국가주의(ultra-nationalism) 단체라 할 수 있는 겐요샤는 1881년 조직된다. 주체세력은 후쿠오카 출신의 하급무사들이다. 그들은 막부말기에는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 참여했고, 메이지유신 후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1877년 서남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규슈 일대에서 일어나는 반정부운동에 가담하면서 개인적으로 대륙웅비의 길을 모색했던 사람들이다.
    겐요샤 결성의 중심인물은 세 사람이다. 광산업에서 성공한 규슈 제1의 부호인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일본 우익사의 대부이며 대아시아주의의 챔피언인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서남전쟁과 하기(萩)의 난(1876)에 깊이 관여했던 하코다 로쿠스케(箱田六輔) 등이었다.
    하나같이 막말의 격동기를 살아오고 정한론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일본의 부강과 함께 대륙으로 그 영토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발기문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결성의 동기와 지향하는 목표는 이 조직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겐요샤는 우국지사의 단결이고, 애국지사의 단결이다. 그리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신의 단결이고 군국주의자의 단결이다. 천금을 가볍게 아는 의기(義氣), 천하를 짊어질 기상, 비분강개의 뜨거운 피,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 겐요샤가 태어났다.”

  • ▲ 겐요샤 3걸(傑)과 최초의 본부 
    ▲ 겐요샤 3걸(傑)과 최초의 본부 

    동학봉기에 개입, 청일전쟁을 유도하는 특수활동

    겐요샤는 전국적 조직이라기보다는 규슈에 국한한 단체였다. 또한 뒤에서 볼 수 있는 고쿠류카이(黑龍會)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거나 또는 해외웅비의 실현을 위해 일선에서 직접 활동하는데 주력을 기울인 단체는 아니다. 그 보다는 정부 내에서 대륙으로의 국권확장 지지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관계와 군부의 보수 세력과 유대를 긴밀히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다고 해서 겐요샤가 대륙팽창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효과적인 대륙팽창을 위하여 국내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힘썼을 뿐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한국에서 동학봉기가 격화될 때 청일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특수조직을 만들어 한국에 파견하여 실상을 정탐하면서 활동케 하기도 했다. 물론 한국병탄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중국대륙에서 혁명의 기운이 소용돌이 칠 때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쑨원(孫文) 등과 같은 개혁파나 혁명파를 도와 대륙에 일본세력의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멸청흥한(滅淸興漢)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국권론(國權論)의 기둥' 도야마 미츠루, 김옥균등 각국 망명객들 지원

    겐요샤는 많은 국권론자,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국사(國士)’를 배출했다. 그리고 근대 일본 우익활동의 원류로서 일본의 정치·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겐요샤 출범이후 끝까지 멤버로 활동해온 도야마 미츠루(頭山滿)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국권론의 정신적 지주로,  그리고  ‘민간 지사’의 대표적 인물로, 우익의 영원한 대표자로 추앙받고 있다. 한 번도 관직을 가지지 않았으나 ‘무관의 제왕’으로 권력 안과 밖에 많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혁명아들도 고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망명할 때는 그의 지원을 받았다. 갑신정변 후의 김옥균, ‘멸청흥한’을 꿈꾸었던 쑨원과 황싱, 인도의 스브하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필리핀의 에밀리오 아귀날도(Emilio Aguinaldo) 등 모두가 일본에 있는 동안 도야마의 지원을 받았다.

  • ▲ 1931년 일본을 방문한 인도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와 도야마 미츠루.
    ▲ 1931년 일본을 방문한 인도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와 도야마 미츠루.

     
    겐요샤는 한국문제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병탄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해 온 겐요샤의 상층부는 때때로 병탄의 방향을 제시하고 정부의 병탄정책을 독촉하기도 했다.

    조선진출의 찬스 '동학봉기'...일본 정부에 청일전쟁 건의

    덴유쿄(天佑俠)
    덴유쿄는 겐요샤가 한시적으로 조직·운영한 행동단체였다. 목적은 동학봉기로 혼란한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와 명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 후 한국에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반대로 중국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됐다. 그러나 일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1894년 한국의 전라도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동학이라는 대규모의 민중봉기는 일본으로 하여금 열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을 반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반외세’의 깃발을 내걸었던 동학운동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외세를 불러들이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는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관계 형성의 실마리가 되었다. 동시에 정한론 이래 한국에 진출할 틈을 엿보아 왔던 병탄론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다.
    겐요샤의 지도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찍부터 부산의 오자키(大崎正吉) 법률사무소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던 대륙낭인과 겐요샤의 요원들은 동학봉기와 이로 인한 혼란이 한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적시라고 판단했다. 그들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민중봉기를 계기로 “반일 망국의 한국정부와 오랫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청나라의 세력에 철퇴를 가하고” 한국반도에 “친일정부를 세울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을 실천하기 위하여 겐요샤의 지도자들이 움직였다. 도야마 미츠루, 히라오카 고타로, 마토노 한스케(的野半介)는 외무대신을 찾아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어서 육군참모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를 예방하고 조기개전론을 폈다. “전적으로 동감”의 뜻을 표시한 가와카미는 겐요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외무대신 "일단 불을 붙이시오, 불 끄기는 내가 맡겠소"

    "원래 겐요샤는 많은 인재를 포용하고 있는 대륙진출의 근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지금의 시국을 급속도로 진전시키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바다를 건너가 불을 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겐요샤 사람 가운데 그 일을 맡아 해낼 만한 사람이 없을까요? 일단 불만 붙여 놓는다면 그 다음 ‘소화작업’은 나의 임무이니, 그것은 내가 기꺼이 이행하겠소."(藤本尙則, <巨人頭山滿翁>(1922), p.340)

    가와카미가 요청하는 ‘불 지르기[放火]’가 무엇을 부추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단체의 조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도야마 미츠루에 의하면, 덴유쿄는 “한국의 동학당을 고무하여 한국에서 풍운을 일으켜 급기야는 일청전쟁의 대결전을 꾀할 수 있는 계기를 잡자는, 이른바 가와카미 장군의 ‘방화의 역할’을 하기 위한 ‘조직체’였다

  • ▲ 덴류쿄를 해체하면서 활동을 정리하여 발표한 <덴류쿄 보고서>.
    ▲ 덴류쿄를 해체하면서 활동을 정리하여 발표한 <덴류쿄 보고서>.

    덴유쿄는 15명으로 구성된 유격대 형태의 작은 단체였다. 뒷날 고쿠류카이를 조직하여 한국병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위시한 겐요샤의 젊은 세력과 이미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륙낭인으로 구성됐다.    
    그들은 1894년 6월 하순에 부산에 도착한다. 그 후 그들은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3개월 동안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사태의 흐름을 정탐하고, 소요를 일으키고, 폭력을 감행하는 게릴라식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활동이 청일전쟁 발발에 직접적으로 어떻게 또 얼마나 작용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과장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청일전쟁의 “불 지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덴유쿄는 해체했으나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일본군대의 정보원으로 한국에 남아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러일전쟁 후 다시 모여 한국병탄의 완성을 위하여 활동하게 된다.

    대륙경영-한국병탄의 최전선 부대

    고쿠류카이(黑龍會)
    근현대 일본사에서 대표적 국권주의 단체로서 고쿠류카이를 내세우는 데 아무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 단체는 대륙을 향한 일본의 국력확장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나라 안팎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한국병탄을 위해서도 최전선에서 길을 열어나갔다.
    고쿠류카이는 1901년 결성됐다. 주도자는 덴유쿄에 직접 참여했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그는 죽을 때까지 회두(會頭)로서 이 단체를 이끌면서 우익진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쿠류카이’라는 이름은 흑룡강(Amur River)에서 유래한다. 시베리아와 만주 사이를 흐르고 있는 흑룡강을 중심으로 대륙경영의 대업을 이룬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즉 일본의 국력을 대륙으로 팽창하여 흑룡강까지 지배의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는 희망과 각오의 뜻을 담고 있다.
    창립취지문은 이 단체의 성격과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취지문에 의하면 동아시아는 서양의 아시아 잠식이라는 “세계 역사상 미증유의 중대한 비상시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비상시국을 타개하고 아시아를 이끌어야만 할 능력과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본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의 실정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아시아의 오지를 누비고 다니면서 그곳의 세태를 수집하고 분석한 대륙낭인들이 한데 모여 대륙의 사정을 널리 알려 “모든 사람의 각성”을 촉구할 필요가 있었다. 고쿠류카이 결성의 일차적 목적은 ‘대륙문제’에 대한 국민계몽이었다. 그럼으로써 “황국의 백년대계의 틀을 튼튼히 하고 만리웅비의 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 지어먹고...요동의 들판 장막에서 밤을 지새우며..."

    고쿠류가이는 겐요샤처럼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도 않았고, 또한 덴유쿄처럼 한시적인 단체도 아니었다. 물론 그 뿌리는 겐요샤라고 할 수 있지만 조직의 지도층이나 일반회원 모두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또한 취지에 동조하는 회원들을 꾸준히 영입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쿠류카이는 전국적이고 대중적이며, 또한 일반에게 공개된 조직이었다.
    고쿠류카이가 활동은 다양했다. 결성하면서부터 <흑룡(黑龍)>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대륙의 사정’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했다. 물론 시기에 따라 관심부분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동아시아 전반의 실태를 알리는 한편, 초기에는 러시아와 시베리아의 발전,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05년 고쿠류카이가 한국병탄 프로젝트에 직접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는 러시아, 중국, 만주, 몽고, 한국의 사정을 일본사회에 전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흑룡강변에서 노숙하고,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을 지어먹고, 요동의 들판에 세운 장막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얻은 그 지역의 풍속과 인정”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등의 지도를 발행하여 그 지역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또한 간다(神田)에 흑룡어학교(黑龍語學校)를 열고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고쿠류카이는 1902년 후쿠오카와 교토에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 활동범위를 해외, 특히 한국으로 넓히는데 주력했다. 한국의 사정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대구에 비룡상회(飛龍商行)라는 사무실을 열어 거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1903년에는 고쿠류카이의 해외본부를 부산에 설립하고 많은 회원들이 상주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다. 월간지의 발행소도 도쿄에서 부산으로 이전했다. 이 조직은 1905년부터 1910년 까지 한국병탄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여 한국의 지배계층과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을 넘나들며 병탄성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