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西獨의 뮨헨에서 열린 여름 올림픽의 선수촌으로 침입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 및 코치들을 인질로 잡아 경찰과 대치한 끝에 11명을 죽였다. 서독 경찰관 1명도 사망하였다. 테러단 5명이 총격전으로 죽었고 세 명이 잡혔다. '검은 9월단'은 그 뒤 서독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여 西獨 정부를 위협한 끝에 잡혀 있던 세 명의 동료를 구해냈다.
     
     골다 메이어(여성) 이스라엘 총리는 이 테러를 기획하고 가담한 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 군대가 합동으로 특수조직을 만들었다. 이 팀의 첫 작전은 1973년 4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침투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보책임자 모하메드 유수프 알 나자르 등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 特攻작전의 지휘관은 나중에 이스라엘 군의 총참모장, 그리고 수상이 된 에후드 바락(현재 국방장관)이었다. 이 국가公認 암살단은 주로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추적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였다. 1973년 6월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한 모로코인을 뮨헨사건 관련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誤認하여 암살하였다가 요원 다섯 명이 붙들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외교를 통하여 2년 뒤 옥살이하던 요원(여성 2명, 남성 3명)을 전원 송환받았다. 이스라엘 암살팀은 살라메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9년 1월22일 그를 베이루트에서 발견, 원격조종 폭탄으로 죽였다.
     
     이 보복작전은 '신의 분노'라는 암호명을 가졌다. 1992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관련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뮨헨 사건 관련자 중 생존자는 두 명이라고 한다. 이 보복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수년 전 개봉되었던 '뮨헨'이란 작품이다. 스필버그가 제작하였다.
     
     한국이 이스라엘 같이 보복하였더라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 관련자,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관련자, 아웅산 폭파사건 관련자, KAL기 폭파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김일성, 김정일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국가가 自國民에게 가해진 외부세력의 危害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조차 갖지 않는다면 正義불감증에 걸렸다고 봐야 한다. 그 첫 징조가 法治파괴 현상에 대한 정부의 무감각이다. 두번째 징조는 主敵에 대한 적개심의 무감각이다.
     
     李明博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은 확실하게 正義불감증에 걸렸다. 그의 위선적인 중도실용 노선이 이 불감증을 더욱 깊게 한다. 敵과 犯法者에 대한 분노를 죽이는 게 중도실용이다.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선 안 된다는 교훈 하나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