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獨島를 지켜 낸 것은 이승만이었다! 
     6.25 전쟁중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獨島를 확보했다. 침범한 일본배 수백 척, 어부 수천 명을 붙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청와대 문서 무단 반출 사건으로 유명해진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평화선'을 검색해 보았다. 이런 기록이 나타났다.  
      
     <발생배경
     
      1945년 9월27일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일본점령과 함께 일본인의 어업활동을 일정 水域으로 한정하는 맥아더 라인을 선포하였다. 이 맥아더 라인에 대해서 미국은 일본에 일본을 방위하는 군사경계선이라고 선전하였고, 한국에 대하여는 한국의 主權이 미치는 水域경계선이라고 통고하였다.
      이후 1951년 9월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은 미국 및 캐나다와의 〈어업회담〉을 진행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한·일 예비회담〉에서 한국은 일본에 대해 어업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구실을 내세워 시간만 끌었는데,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하여 한국은 일본이 맥아더 라인의 철폐를 기대하여 그 후에 회담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18일, 일본이 〈어업회담〉을 거절한 지 2주 만에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였다. 한국은 이 선언이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고 명분을 밝혔는데, 이에 따라 소위 ‘평화선(平和線)’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선포된 평화선의 배경에는 韓日 간 어선수와 어업기술의 심한 격차, 그에 따른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 보호의 필요성, 임박한 맥아더 라인의 철폐에 대한 보완, 세계 각국의 영해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專管化) 추세 등의 상황에 대한 대처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용
     
      평화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하였다 하여 ‘이승만 라인’ 또는 ‘이 라인(Lee Line)’이라고도 불렸는데, 해안에서부터 평균 60海里에 달하며 그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인접해역과 연해안의 上下에 현존하거나 혹은 장래에 발견될 광물, 해산물 등 모든 자연자원을 보호·개발하기 위하여 국가의 주권을 보전하며 또 행사한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는 멸종될 우려가 있는 자원이 남획·감소·황폐되어 한국과 그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 水域 내의 모든 자원과 이에 관련된 수산물을 정부의 감독·관리 하에 둔다.
      셋째, 대한민국은 새로운 발견, 연구 혹은 이익 등 장래에 발생하는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보호水域의 경계선을 수정할 수 있다.
      넷째, 이 선언은 공해상의 자유항해권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의 평화선 선포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반대반응을 보인 것이 일본이었으며, 그 밖의 미국·영국·대만 등의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일본은 평화선이 어업 및 어선에 대한 규제뿐만 아니라 獨島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침 고등어 성수기가 다가옴으로써 수산청의 감시선뿐만 아니라 보안청의 함정까지 출동시켜 호위出漁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호위에 의한 출어를 감행하기 직전인 1952년 9월,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M. W. 클라크 대장은 북한의 잠입을 막고, 전시(戰時) 밀수출입품의 해상침투를 봉쇄한다는 이유로 한반도 주변에 평화선과 거의 비슷한 범위의 해상방위水域을 설정하였다. 클라크 라인으로 불린 이 수역이 설정된 것은 한국전쟁이 격렬하던 당시, 한일 간의 충돌은 전쟁수행에 좋지 않다는 미국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미국은 일단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미국의 평화선에 대한 묵시적인 옹호 때문에 일본은 평화선에 대하여 강력한 행동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평화선이 선포된 후 일본은 즉각 〈어업회담〉의 재개를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한일회담〉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선을 사용하려 하였고, 이로 인하여 〈어업회담〉은 일본의 평화선 철폐요구와 한국의 평화선 고수의 입장이 대립되어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선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1950년대 말부터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원조의 감소와 이로 인한 한국경제의 불황이라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일본자본의 도입에 의한 경제 불황의 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평화선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오늘 저녁 촛불 반대 시위를 했던 젊은이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獨島를 지켜낸 사람은 李承晩 대통령이다"고 말하자 모두가 놀라는 것이었다. 촛불시위를 반대할 정도로 깨어 있는 젊은이들이었지만 반 이상이 李承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통해 李 건국 대통령을 '매국노' 비슷한 인물이라고 배웠다는 이들이 많았다. 다수가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한 사람이라고 배웠는데 그 사람이 독도를 지켜냈다니?"하는 표정이었다. 이들은 2년 전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런 기사를 읽지 않은 모양이었다.
     
     
     <[책갈피 속의 오늘]1952년 이승만 평화선 선포 
       
     1952년에 접어들면서 일본 어민들은 4월 28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이 연합국 측과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강화조약이 그날 발효되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할 수 없도록 했다. ‘맥아더 라인’으로 명명된 이 선은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될 터였다.
     
     1952년 1월 18일. 100일 뒤면 동해는 일본 어민들의 텃밭이 될 판이었다. 바로 이날 바다 건너, 전화(戰火)에 휩싸인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한 것이다.
     
     일본으로선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고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다. 우방인 미국, 자유중국도 비난했으나 이승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웠다.
     
     평화선은 어업 보호의 절박함이 낳은 산물이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톤수는 10만 t. 그나마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다. 일본은 총톤수 200만 t에다 그중 상당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이었다. 맥아더 라인이 사라지면 한국의 어업이 침몰할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건 아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이 절묘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를 넣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선수를 친 것이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다.
     
     항일 투사 이승만의 쾌거인 평화선이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조인(1965년 6월 22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우리 국민은 울분을 토했다.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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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에 실린 '평화선' 항목 기사(아래)를 읽어보면 李承晩 대통령이 다각적인 관점에서 평화선 선포를 결단했음을 알 수 있다. 李 당시 대통령은 독도를 평화선 안으로 두어 이를 보호함으로써 일본이 점령할 수 없도록 했다. 당시 참전중이던 유엔군은 공산군의 침투를 막는다면서 평화선과 비슷하게 해상방위水域을 선포하여 일본 어선의 조업을 금지시켰다. 이는 미국이 韓日間 분쟁에서 한국 편을 들었음을 의미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란 박사 논문을 쓴 적도 있어 국제법에 대해서 정통했다. 평화선이 선포되었을 때는 이승만이 독단적이라고 국제적 비판을 받았으나 그 뒤 해양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배타적 경제水域 선포가 세계적으로 잇따랐다. 李 대통령의 평화선 선포는 국제법적으로도 정당성이 있는 先覺者的 결단이었다.
     
     이승만의 학식 있는 용기, 국제정세를 꿰뚫어본 안목이 평화선 선포를 결단하게 했다. 이 평화선 선포에 의하여 한국은 獨島와 어업자원을 확보했으며, 韓日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新生 대한민국이 일본 선박 수백 척과 어부 수천 명을 나포하는 것을 불사해가면서 지켜낸 것이 獨島이고 인접 水域이었다. 이래도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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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 백과
     
     평화선
     
     평화선(平和線, Peace Line, 이승만 라인, Syngman Rhee line)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서 설정된 한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이는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이승만은 이를 "평화선"이라 불렀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이 경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미일평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됨에 따라 무효화되자 이를 대체하여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하고자 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李承晩ライン)으로 부른다.
     
     이 선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반대하였는데, 특히 당시 일제강점기 이후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일본과는 어로 문제,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문제로 이후 13년간의 분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깊게 관련된 미국은 두 동맹국 간에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지켰다.